< -- 럭비공 -- >
5익일 오전 10:25분.
면담 예정시간인 5분전에 총리공관에 도착한 우리 일행은 미리 기다리고 있던 총리 비서실장의 영접을 받는다.
그의 안내로 소접견실에 이르러 잠시 차를 나누며 환담하다가 약속시간이 되자, 주접견실인 영빈관으로 안내된다. 참고로 사우디도 마찬가지이지만 쿠웨이트도 왕세자가 곧 총리이다.
사우디는 제1총리라 부르고, 쿠웨이트는 그냥 총리다. 장방형의 탁자가 길게 놓인 회담장에는 특별한 상거래를 위한 만남(?)도 아닌데도, 태극기와 함께 사우디와 쿠웨이트의 삼 개국의 국기가 탁자에 꽂혀있다. 그런데 문제는 태극기가 음양이 뒤집혀 청색이 위로 올라가게 꽂혀 있어서 나의 은근한 지적에 정 윤희양이 이를 정정하여 꽂아놓는다.
우리가 나를 중앙으로 우로는 신 사장, 최 이사, 좌로는 정양과 정 비서실장이 자리를 잡고앉아 두 왕세자를 기다린다. 그냥 앉아있기가 무료해 나는 언제나 이 양반들이 오려나 하고 열린 문을 바라보고 있는데, 사우디의 총리 비서실장 또한 기다리기는 마찬가지인지라 연신 복도를 힐끔거리며 자신의 손목시계를 몇 번이고 쳐다본다.
그렇게 5분 정도가 지나자 무료함에 지친 내 입에서 선하품이 슬슬 나오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총리비서실장이 뛰듯이 복도로 달려 나간다. 이제야 오는 모양이라고 알아서 전부 자리에서 일어난다.
마침내 터번에 아랍 특유의 복장을 한 사우디 왕세자를 필두로 5인이 더 들어온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두 명의 왕세자와 양측 두 명의 통역관 그리고 양측의 비서실장들이다.
"이거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갑자기 긴급한 일이 생겨서 처리하고 오느라고 말이야."
나는 사우디 왕세자의 말에 그를 쳐다보다가 통역하는 정 양을 힐끔거리기도 하며 반 박자 늦은 인사말을 한다.
"괜찮습니다. 막 하품이 나던 참인데, 이제는 안 나게 되어 다행입니다."
나의 어쩌면 무례할(?) 수도 있는 조크를 통역을 통해 들은 두 왕세자가 한 박자 늦은 웃음을 터트리는 바람에 나도 덩달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경우를 처음 경험하다보니 내 말이 끝나고도 한참이 지나 웃는 둘의 모습을 보니, 그 모양이 나에게는 더 우스워 웃는 것을, 저들은 자기네 웃음에 동조한 것이라고 착각한다.
하여튼 이렇게 시작된 초면의 인사가 끝나고 저들이 자리를 잡자 이때부터는 가벼운 신상 및 날씨 이야기로 괜히 시간을 죽이고는, 이제 본격적으로 메인 게임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본 게임은 어제 신 사장으로부터 들은 쿠웨이트 왕세자의 46만 달러의 수의계약 건을 내가 수용하겠다는 말과 함께 감사를 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우리는 침을 꼴깍 삼키며 메인이벤트를 기대한다.
점잖게 콧수염을 한 번 쓰다듬은 사우디 왕세자가 드디어 입을 뗀다.
"신 사장을 보내놓고 총리실 산하 각부 장관들이 모여 이 문제를 협의한 결과 주택성에서 발주하려던 대단위 아파트 건설 건은.........."
왕세자의 말이 이쯤에 이르렀을 때 내가 갑자기 제지를 하고 나선다.
"잠시 만요, 전하!"
왕세자의 호칭이 우리말로 '전하'인지, '저하'인지 헷갈리지만, 영어로 통역하면 하등 다를 게 없을 것이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나의 말이 이어진다.
"그 전에 제 입장에서는 대단위 아파트 건설 건도 중요하지만, 차라리 유망지역 유전의 탐사권과 개발권을 주십사 감히 청하옵니다."
갑작스런 나의 제지와 나의 황당한 발언에 정말 정양이 당황했는지 콧등에 송글송글 땀을 맺어가며 통역을 한다. 그런데 더욱 황당한 것은 내 제의를 듣고 난 사우디 왕세자의 표정이, 벌레는 아니어도 땡감 씹은 표정은 지을 줄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파안대소를 하더니, 쿠웨이트 왕세자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뭐라고 소곤거린다. 당연히 영문을 모르는 정양도 내 얼굴만 쳐다보고 당황한 모습이다. 그리고 잠시 후 사우디 왕세자가 쿠웨이트 왕세자에게 눈을 찡긋하고는 막 나에게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나는 짙은 음모의 냄새와 함께, 오한이 들린 듯 온몸이 진동을 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말하니 내, 우리 사우디와 쿠웨이트 형제국 간에, 약간의 분쟁이 있어 얼마 전에 타결을 본 국경지대 즉, '와스라 유전지대'의 탐사 및 개발권을, 동방의 형제에게 주기로 즉석에서 우리 두 사람은 합의를 봤습니다. 형제여, 받겠는가?"
유전지대라는데 찬밥 더운밥 가릴 내 처지가 아니다. 나는 황급히 통역이 대답하기도 전에 내가 먼저,
'YES!'
아니 정정해서
'예설(yes sir)!'
이라고 큰 소리로 답한다.
"하하하.........! 급하긴 급했는 모양인데, 이젠 아파트 건설 건은, 국제입찰에 붙여도 내 닥터 신을 보기에 부끄럽지는 않겠고........"
"헤헤헤........! 각하!"
'에이, 호칭이 오늘은 웬 횡설수설이야!'
"그것은 그것이고, 이것은 이것대로 다시 협의를 진행해 보십시다. 여기 우리 건설회사가 서울에서 진행시키고 있는, 15층짜리 2,100세대의 건설 현장의 사진과, 완성되었을 때의 조감도를 보시고, 우리의 빼어난 실력을 인정하시어, 그냥 수의계약으로 체결하십시다! 존경하옵고 사랑하는 나의 형제여!"
오글오글 나의 닭살스러운 멘트에, 통역하는 정 양의 팔뚝에까지, 웬 닭살이(?) 생기는지 모르겠다.
"푸 하하하.......!
'공짜를 너무 좋아하면 머리 벗어진다.'
는데, 형제는 양잿물도 마실 판 아닌가! 형제의 접견에 대비해 한국 속담을 몇 개 배워두었는데, 오늘 통쾌하게 써먹을 줄은 몰랐습니다. 형제여! 하하하........!"
여기서 웃음을 고치고 진지하게 표정을 고친 파드 왕세자의 말.
"한마디로
'NO!'
입니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내 사우디의 기름을 많이 팔아주기 위해, 한국에 일산 100만 배럴의 정유공장을 짓되..........."
여기서 갑자기 내 말이 팍 줄어들어 겨우 통역하는 정 양만 알아들을 정도로 작아진다.
"........ 처음에는 50만 배럴을, 추후 증설해서 100만 배럴을, 처리할 수 있는 정유공장을 지을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목소리가 커지는 나다.
".......... 그리고 그쪽에도 40%의 지분을 주어 현물출자를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나의 말이 끝나도 어리둥절한 두 왕세자의 표정이 가관인데다, 거기에다가 이를 통역하는 정 양의 목소리가 나를 그대로 흉내 내어 증설부분에 가서는 나와 똑같이 옆 사람이나 알아들을 정도로 작게 하니, 나는 그만 이 부분에서 엄숙한 회의장임에도 불구하고 빵 터지고 말았다.
"푸 하하하...........! 아이고, 배야.........!"
그런데 더욱 가관인 것은 이것을 통역으로 들은 쿠웨이트 왕세자의 말이 더 웃긴다.
"우리는?"
자기네 기름은 안 팔아 주느냐는 말에, 탁자를 두드리면서 까지 내가 웃으니, 이제는 정상으로 달렸던 태극기가 엎어져 홀랑 뒤집힌다.
"험, 험..........!"
내 광태에 가까운 실수에 나는 얼른 엄숙하게 표정을 굳히고 말한다.
"쿠웨이트도 기름을 팔아주기 위해 정유공장을 짓되, 싸우스 코리아가 아닌 쿠웨이트 자국 내에 저희들 경비로 짓겠습니다. 조건은 사우디아라비아와 동일하되, 단 부지는 공짜로 제공했으면 합니다."
나의 말에 쿠웨이트 왕세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곰곰이 생각하더니
'O.
K!'
한다.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사우디 왕세자가 근엄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형제가 그렇게까지 아국에 신경을 써주는데, 내가 아파트 건을 주지 않으면 내 입에서 방금
'형제!'
라 호칭한 말이 부끄러울 터. 단 공사비로
'3억 달러!'
이상은 못 주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형님!"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내가 맨 바닥에 엎드려 두 왕세자에게 정중하게 절을 한다. 이 모양을 보고 입만 쩍 벌리고 있는 두 왕세자에게 정 양이 바쁘게 통역한다.
"한국 고유의 인사법으로, 극상의 존경과 감사를 표하는 예절법입니다!"
"푸 하하하.........! 나는 형제가 갑자기 저러길래 우리와 같은 이슬람 형제인 줄 알았다네. 형제가 그렇게 까지 나를 존경하고 사랑........ 험, 험........ 이제는 나도 자네를 닮아가는 지 말이 헛갈리네만, 아무튼 금년 여름에 공고할 '주베일 항만공사'에 참여할 수 있는 입찰권을 덤으로 주겠네!"
"네? 감사합니다. 형님! 정말 감사합니다!"
"험, 험..........! 그럼, 우리 또한 그냥 있을 수 없으니, 주베일에 비하면 작지만, 슈아이바 항만국이 발주하는, 항만 확장공사 입찰권을 주겠네!"
"자이르 왕세자 전하께도 한없는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여기에서 나는 다시 한 번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맨바닥에 오체투지를 한다.
"그만, 그만 하게! 우리는 닥터 신의 말 이전에, 형제의 열정과 의지에 불타는 눈을 보았고, 창의에 빛나는 여러 형제들의 과감한 실천을 보았네. 우리 두 사람은 오늘 이 신뢰를 바탕으로, 상호 간에 무궁한 발전이 있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네! 자네 회사가 한국과 중동을 넘어 세계 유수의 기업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듯이, 우리의 관계 또한 영원할 것으로 믿네. 단 우리 두 사람에게 자네는 반드시 앞으로도 영원히
'형님!'
으로 모시고, 그렇게 부르도록 하게!"
"그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제가 죽는 그날까지.........."
'아니지. 나이 많은 너희들이 먼저 죽을 거니까, 너희 둘이 먼저 죽는 그날까지......'
"형님으로 영원토록 모시고, 존경하고 받들겠습니다!"
'돈 몇 푼에 이, 강 태민이 오늘 한없이 치사하고 비굴해 지네. 몇 푼은 아닌가?'
"탱큐!"
"땡큐, 썰!"
맞잡은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의 손에는 그 어느 사람과의 관계보다도, 믿음과 사랑의 온기로 따뜻하다. * * *
"아..........! 꿈이었네!"
한 밤중에 깨어나 보니 너무나 선명한 꿈이었다.
하지만, 이튿날 진행된 회담은 정말 꿈그대로 진행되었고 계약도 체결되었다.
이제는 예지몽이라도 꾸는지 너무나 선명한 꿈과 그대로 진행되는 회담에, 나는 회담 내내 섬칫 섬칫 몇 번을 놀라야 했다. 현실의 회담에서는 형식과 예의를 갖추기 위해, 대화 내용이 좀 더 정중하고 진지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광태에 가까운 나의 웃음과 오체투지는 꿈속에서의 일이고, 실제 회담장에서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나의 큰절 정도는 있었다는 것은 부기하고 싶다. ----------------============================ 작품 후기 ============================이번 회로 럭비공 이라는 장이 마감되었습니다.
이 제목은 원래 정 사장의 어디로 튈지 모를 행태를 나타내려 한 것이지만, 지난번에 언급했듯이 3일 동안 내리 자료조사만 하고 1회 분도 쓰지 못했을 때, 나 자신도 글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답답한 심정을 표현한 소제목이기도 합니다.
즐거운 휴일되시고요!
^^오늘도 4종 셋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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