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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차랜드의 행복한 도미닉 경-423화 (511/528)

〈 423화 〉 [422화]히어로즈 오브 레전드

* * *

도미닉 경은 어째서 모션 캡쳐를 하는 데 블랙 그룹에 와야 하는지 의아해했다.

감독은 그 의문을 알아차린 듯, 도미닉 경에게 자세한 경위를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히어로즈 오브 레전드의 가능성을 본 모르가나 블랙 회장님께서 팀을 인수하셔서 말입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밴시 박사라고 불리는 회사의 요직이 이 모드를 좋아하므로 인수하셨다고..."

도미닉 경은 밴시 박사라는 말을 어디서 들어 봤다고 생각했다가, 그 칭호가 동생 레미의 것을 깨달았다.

흠. 동생이 이 모드를 좋아한다고?

도미닉 경은 히어로즈 오브 레전드에 조금 더 호감이 가는 것을 느꼈다.

"이쪽입니다."

감독은 도미닉 경을 데리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리고 17층, 22층, 13층을 누르고는 문이 닫히길 기다렸다.

"왜 세 개나 누르는 거요?"

도미닉 경은 왜 세 개나 되는 층을 누르는지 궁금해했다.

그러자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저희가 172,213층으로 가야 하니까요."

도미닉 경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곳이라면 모르겠지만, 가차랜드라면 그런 식으로 엘리베이터가 운영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으니까.

조금 멀리 본다면, 타이쿤 시티의 건물들도 기본적으로 수천, 수만 층까지 올라가기도 하지 않는가.

가차랜드에서 1위를 달리는 그룹인 블랙 그룹이라면 수십만 단위의 층수가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엘리베이터는 유리로 되어 있어 창밖을 바라볼 수 있는 구조였다.

도미닉 경은 문득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구름이 걸려 있었는데, 도미닉 경은 갑자기 눈앞에 몇몇 사람들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

곁눈질로 힐끗 그 광경을 본 감독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아마 거래처와 만나러 가는 사람들일 겁니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보다 떨어져 죽고 부활하는 게 더 빠르거든요."

저도 예전에는 여기서 편집하다가 퇴근할 때 자주 저러곤 했습니다. 라고 감독이 말했다.

도미닉 경은 갑작스러운 사람들의 투신에 놀랐으나, 이내 여기가 가차랜드라는 걸 떠올렸다.

가치만 있다면 죽음과 얼마든지 거래할 수 있었고, 삶은 얼마든지 사고팔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기억한 도미닉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다 왔습니다. 여기가 모션 캡쳐실입니다."

도미닉 경이 이런저런 생각할 때, 엘리베이터는 172,213층에 도착했다.

도미닉 경은 그 숫자를 보며 마치 어린아이가 쓴 소설에나 나올 법한 층수라고 생각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모션 캡쳐실은 도미닉 경의 기억보다 더... 흉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수많은 카메라와 모션 센서들, 그리고 모션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녹색 도료로 칠해진 내부까지 정돈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히어로즈 오브 레전드가 워낙 인기가 많은데다가, 기본적으로 한 달에 한 번은 새로운 인물을 업데이트하다 보니 모션 캡쳐실이 쉴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엉망이지요."

감독은 모션 캡쳐 팀을 변호하듯 그리 말했다.

"뭐야, 감독님 아니십니까? 영상 쪽에서 저희 모션 쪽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또 모션 캡쳐로 CG넣을 일이라도...?"

그때, 구석에 있던 모션 센서들이 들어 있는 상자 뒤에서 누군가가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눈 아래가 퀭한 단발의 팬더 수인이었는데, 목이 늘어진 누런 티셔츠와 올이 나간 츄리닝 바지를 입고 있었다.

"아니, 이번에 특별한 분을 모셔서 말일세."

감독은 팬더 수인에게 그렇게 말했다.

"특별한 분이라니, 누구... 도미닉 경?"

팬더 수인은 졸린 눈을 비비며 감독과 대화를 나누다가 그제야 도미닉 경을 발견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와 세상에. 도미닉 경이라구요? 잠이 확 깨네."

팬더 수인은 정말 놀란 듯 손으로 입을 막으며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왜 이렇게 갑자기 찾아왔는지 알겠지?"

"그러게요. 사실 원래 오늘 오전에 있을 모션 캡쳐 끝내고 집에 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일이 추가로 들어와서 욕하고 있었던 참이거든요."

"오전에 모션 캡쳐를?"

"네. 지금은 동생이 들어가 있어요."

"마침 다 끝났습니다!"

팬더 수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반대편 스튜디오에서 또 다른 팬더 수인이 등장했다.

그녀는 언니와 다르게 장발이었다.

"와 세상에. 진짜 도미닉 경이네. 이건 못 참지."

장발의 팬더 수인은 도미닉 경을 퀭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 괜찮소?"

"세상에. 도미닉 경이 날 걱정해줬어!"

"좋겠다. 나도 쪽잠 자지 말걸."

도미닉 경은 그 눈을 바라보며 걱정어린 말을 건넸으나, 이 두 팬더 자매는 도미닉 경의 팬이었던지 오히려 기뻐하기만 했다.

"그나저나 방금 전에 끝났다는 사람은 누구지?"

감독이 그런 자매들을 제지하며 물었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과열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다간 도미닉 경은 모션 캡쳐도 못하고 집에 돌아가야 할지도 몰랐다.

물론, 과장을 좀 보태서 말이다.

"생각해 보니까 도미닉 경이랑 상관이 있는 쪽이네요?"

"아, 그러네."

팬더 자매는 그렇게 말하며 히죽히죽 웃었다.

그리고 이어진 말에서 나온 이름은, 도미닉 경이 잘 아는 이름이었다.

"코드 제로 백 씨거든요."

안드로이드 제로.

레미와 팬텀 박사의 안드로이드가 여기서 모션 캡쳐를 하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도미닉 경."

마침 안에서 정리가 끝났던 것인지, 스튜디오 내부에서 안드로이드 제로가 나왔다.

"오랜만이오, 제로."

도미닉 경은 제로에게 슬쩍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그렇소.모션 캡쳐를 했다고 하던데."

"그러는 도미닉 경도 모션 캡쳐를 하러 오신 겁니까? 우연이네요. 놀람 모듈 실행."

제로는 도미닉 경과 동선이 겹쳤음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표정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지만 말이다.

"모션 캡쳐를 했다는 말은, 혹시 당신도 히어로즈 오브 레전드에 출전하는 거요?"

"당신도라는 말을 분석 중. 도미닉 경도 히어로즈 오브 레전드에 출전할 확률 99.7%."

"맞소."

도미닉 경은 제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이렇게 만나다니, 재밌네요. 하.하.하."

제로는 도미닉 경의 말을 듣고는 웃음 모듈을 실행시켰다.

물론, 굉장히 어색한 기계적인 웃음만 튀어나왔다.

"히메 씨만 온다면, 언찬트 때의 삼인방이 나란히 나오는 셈이군요. 흥미롭습니다."

제로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안 건을 내놓았다.

"그거 괜찮네."

감독이 제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운류 히메씨던가. 그 사람에게 제안을 좀 넣어봐야겠어. 안 그래도 요즘 동양풍 인물이 부족하다고 난리라던데..."

감독은 그렇게 말하며 고민에 빠졌다.

도미닉 경과 제로는 그런 감독을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서로를 바라보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계속해서 이렇게 시간을 끄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박사님께서 그러시더군요.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박사님들이 기다리고 계시기도 하구요."

"아, 그렇군.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소, 제로."

"저도 그렇습니다, 도미닉 경."

그렇게 제로는 도미닉 경의 곁을 지나 아래로 내려갔다.

물론, 뛰어내리는 일 따위는 없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말이다.

도미닉 경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제로를 묵묵히 바라보더니, 이내 무언가 생각이 난 듯 팬더 수인 자매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모션 캡쳐에는 어느 정도 걸리오?"

"시간이요?"

"그렇소."

그 말에 팬더 수인 자매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도미닉 경의 의문에 답을 해주었다.

"일단 코드 제로 백 씨는 모션이 그다지 많지 않아서, 약 3시간 정도 걸렸죠."

"제로 씨가 잠을 자지 않는 로봇이라서 다행이었어요. 안 그랬으면 5시각은 걸릴 뻔했으니까."

"일반적인 사람들의 모션을 따는 건... 글쎄요. 약 6시간?"

"거의 그 정도 쯤 되지."

"하지만 도미닉 경은 조금 더 걸릴 거예요."

"아마 한 10시간에서 20시간 사이로 잡고 있어요."

"...? 어째서요?"

도미닉 경은 갑자기 괴리감이 느껴질 정도로 커진 숫자에 당황했다.

그러자 팬더 수인 자매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야, 저흰 도미닉 경의 팬이니까요."

"팬이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의 모션을 '완벽하게' 만들겠다는데, 문제가 생길 일이 있나요?"

"오래 걸리는 건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이 보통 한 상황에서 두세 가지 모션을 한다면, 도미닉 경은 열몇 가지 모션을 할 뿐이니까요."

"도미닉 경께서 쉬지 않고 하신다면 10시간. 쉬면서 하시면 20시간 정도 소요될 예정이에요"

"...잠은 안 주무시오?"

도미닉 경은 이미 피곤해 보이는 팬더 자매의 상태를 걱정하며 그렇게 말했다.

"잠이요? 잠은 죽어서 자면 되죠!"

"어차피 죽었다가 깨어나면 피로도도 리셋이니까요."

"최고의 일 처리 방식이죠! 문제는, 여기가 좀 높다는 점이에요. 죽었다가 돌아올 때 시간이 좀 걸리는 게 흠이라."

도미닉 경은 팬더 수인 자매의 말을 듣고 왜 모션 캡쳐실이 172,213층에 있는지를 깨달았다.

이곳에 있는 팬더 수인들은 아닌 척 내숭을 떠는 일 중독자들이었다.

그들을 쉬게 만들려면, 엘리베이터라도 오래 태우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도미닉 경은 그렇게 말하며 팬더 수인 자매를 바라보았다.

"자, 도미닉 경? 이리로 오세요."

"아, 언니? 잠깐 먼저 해주고 있어. 아까 쪽잠잤다며. 나 잠깐 뛰어내리고 올게."

"그래. 올라오면 바로 교대해. 나도 좀 쉬고 오게."

"오케이."

도미닉 경은 문득 감독을 바라보았다.

감독은 이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블랙 그룹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에서 정상인은 손에 꼽을 정도라는 걸 감독은 알고 있었으니까.

물론 그 정상의 범주에 감독은 자기 자신을 넣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자, 그럼 일단 걷는 모션부터 할까요? 가볍게 그냥 걸어보세요. 네. 아니면 지금의 감정을 살려서 어리둥절한 듯 행동하시는 것도 좋구요. 일단 많이 딸 수록 좋으니까요."

팬더 수인 중 언니 쪽은 도미닉 경에게 이런저런 요구하기 시작했고, 동생 쪽은 창문을 깨고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물론 다시 부활할 것을 알고 한 행동이겠지만...

172,213층에는, 광기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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