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5화 〉 [외전 24화]아웃 오브 가차랜드 : ???
* * *
마왕 레기온은 도미닉 경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레기온은 가차랜드 시스템의 가호가 없었기에 상태 이상에 대한 내성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레기온은 도미닉 경의 연속적인 공격에 거의 다진 고기처럼 보일 정도가 되었다.
["그, 그만..."]
레기온은 참다못해 땅에 흐르는 자기 피로 자신을 봉인시킬 봉인 술식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봉인되면 적어도 한 세기는 봉인된 채 있게 되겠지만, 차라리 지금은 그게 낫다고 여겼다.
그렇게 레기온은 자기 힘으로 봉인 절차에 들어갔다.
레기온이 봉인되자, 마계는 더욱 끔찍한 곳으로 변했다.
마족들은 마왕이 만들어낸 권속과도 같아서, 마왕의 힘이 없다면 자기 형체조차 유지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물론 일부 고위 마족들은 혼자서도 이 암흑기를 버텨 낼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마왕이 있던 때처럼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도미닉 경은 그렇게 마족들의 침략을 또 한 번 막아 내고, 마왕을 처리했으며, 마족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데 성공했다.
"...음?"
그러나 정작 도미닉 경은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도미닉 경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250지역을 깨는 것이었고, 마왕을 잡았음에도 250지역이 깨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상당히 스테이지 구성이 긴 편인가 보군..."
도미닉 경은 전쟁터, 마계 다음은 어떤 구역일지 궁금해했다.
"어쩌면, 250지역은 3지역처럼 모든 스테이지가 하나로 이어지는 것일까?"
도미닉 경은 나름 그럴싸한 가정을 내세웠다.
도미닉 경은 전쟁터가 1스테이지, 마계가 2스테이지라고 가정해 보았다.
보통 한 지역의 스테이지 수는 적게는 3개에서 많게는 200 여 개나 있었으니, 도미닉 경은 최소 1개의 스테이지 이상을 더 깨야만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도미나 경이 걱정하겠구만."
도미닉 경은 이제 곧 성인이 될 도미나 경을 떠올렸다.
도미닉 경의 증손녀인 도미나 경은 도미니아 경의 딸이었는데, 얼마 후에 생일이 지나면 성인이 되는 아이였다.
"성인식 때 한 번 들린다고 했는데, 시간을 맞출수나 있을까?"
도미닉 경은 증손녀를 생각하며 안절부절못했다.
혹시라도 증손녀가 놀러왔다가 자신을 보지 못하고 그냥 돌아갈까 봐 불안해진 것이었다.
세상 모든 상태 이상에 거의 면역인 도미닉 경이었으나, 자손에 대해서 만큼은 상태 이상급으로 걱정이 많은 도미닉 경이었다.
"아무래도 더 빠르게 이곳을 깨야겠어."
도미닉 경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퀘스트 라인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고, 이 라인의 끝자락에 도달하고 나서야 250지역을 완전히 클리어할 수 있을 테니까.
...
"여긴... 무대의 뒤편인가? 아니면 공장?"
도미닉 경은 마계에 생긴 완전 부자연스러운 틈새를 통해 새로운 차원에 도달했다.
그곳은 유리로 된 긴 복도였는데, 유리 너머에는 마치 뱀처럼 얽힌 컨베이어 벨트들과 운송용 파이프가 가득 존재했다.
그곳에서는 정말 온갖 물건들이 옮겨지고 있었는데, 텔레비전, 컴퓨터, 샤워 부스, 발레 슈즈, 강아지 간식, 고양이 배변 모래, 곰 인형과 비치 발리볼까지 그 목록이 다양했고, 또 두서없었다.
"도대체 이곳은...?"
도미닉 경은 그동안 수많은 곳들을 다녀왔지만, 이 정도로 기괴한 곳은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아주 옛날, 도미닉 경이 누명을 썼을 때 시간을 돌리는 검을 쓰고 나서 갔던 거대한 서버실 정도만이 지금, 이 장소와 견줄 수 있을 것이었다.
"...선은 계속 이어지는군."
도미닉 경은 유리로 된 복도 바닥에 LED처럼 반짝거리는 선을 바라보았다.
그 선은 복도의 끝으로 도미닉 경을 인도하고 있었는데, 도미닉 경은 잠시 그 선을 바라보더니, 이내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결국 남은 것은 선을 따라가는 것뿐.
도미닉 경은 혹시라도 모를 사태를 대비해 몸을 긴장시키며 선을 따라 걸어갔다.
마족들이 가득한 전장. 마족들이 가득한 마계를 지났으니 주의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도미닉 경이 복도의 끝자락에 도달할 때까지 도미닉 경에겐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상하군."
도미닉 경은 너무나도 고요하고 평온한 상황에 오히려 당황했다.
물론 공장이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긴 했으나, 전장이나 마계의 소리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
도미닉 경은 다시 한번 퀘스트 라인을 바라보았다.
선은 이 복도의 끝에 있는 저 문을 통해 이어지고 있었고, 도미닉 경을 향해 이 문을 열라는 듯 손잡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도미닉 경은 여기까지 왔는데 그래도 끝은 봐야겠다는 생각에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
"어서 오게."
"!"
도미닉 경은 문을 열던 자세 그대로 어정쩡하게 한 자리에 서 있었다.
도미닉 경은 갑자기 바뀐 풍경에 다소 놀랐으나,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도미닉 경이 평정심을 찾은 뒤 가장 먼저 한 것은 주변을 둘러보는 일이었다.
이 장소는 수천 대의 모니터로 구성된 장소였는데, 가운데엔 의자가 하나 있었고, 그곳에는 연령을 알 수 없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도미닉 경은 그 남자를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지만, 정확하게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곧 그 남자가 이 가차랜드를 만든 사람, 즉 아직 태어나지 않은 회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 했지?"
"아니지. 중간에 한 번 봤잖아?"
"그건 가짜였어. 정말 우리와 만난 것은 아니었으니까."
도미닉 경은 눈앞에 앉아 있는 남자가 어린아이와 청년, 그리고 노인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회장의 특징이었다.
"앉아."
아직 태어나지 않은 회장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거기에는 도미닉 경이 가장 좋아하는 소파인 도미닉 경 저택 거실 소파가 나타났다.
도미닉 경은 그 소파를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도미노 경이 소파 위에서 놀다가 음식을 쏟았던 얼룩, 도미니아 경이 어릴 때 찢어버려서 급하게 덧댄 자국까지 완전히 구현되어 있었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이내 상대가 가차랜드를 만든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가차랜드에서만큼은 세상의 창조주였고, 전지전능한 신이었으니까.
"250지역을 깨는데 왜 갑자기 내가 나오는지 궁금하겠지. 안 그래?"
"...그렇소."
아직 태어나지 않은 회장은 도미닉 경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먼저 선수를 쳐 말을 꺼냈다.
이에 도미닉 경이 할 수 있는 일은 소파에 앉아 고개를 끄덕이는 일 뿐이었다.
"별 건 아니야. 250지역은... 그래. 일종의 졸업 구간이니까."
"졸업?"
"은퇴라고 불러도 좋지만, 그건 조금 부정적인 의미처럼 들리잖아?"
청년 모습의 회장이 도미닉 경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250지역을 도전하는 자는 간만이로군."
노인 모습의 회장이 껄껄 웃었다.
"하늘이 도와야 올 수 있는 곳이잖아?"
어린 모습의 회장이 생긋 미소 지었다.
"도미닉 경의 경우는 그저 무식하게 모든 걸 뚫고 도달한 모양이지만..."
"애초에 그렇게 깰 수도 있게끔 만들었으니 괜찮네."
"그래도 조금은 제대로 된 전략을 보고 싶긴 했어."
각각의 나이대의 회장은 서로의 말에 대답하며 도미닉 경을 바라보았다.
"그래... 일단 여기까지 온 것은 축하해, 도미닉 경."
어린 회장이 도미닉 경에게 박수를 쳤다.
"이제 도미닉 경은 두 가지의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를 수 있어. 아니, 세 가지인가?"
청년 모습의 회장이 도미닉 경에게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이는 여기까지 온 보상이자, 250지역을 클리어할 마지막 조각이다."
노인 모습의 회장이 도미닉 경에게 미소 지었다.
"하나. 가차랜드에서의 삶을 졸업하고, 성좌로서 새롭게 시작한다."
"둘. 가차랜드의 삶을 유지하되, 모험을 은퇴하고 후학을 양성하며 살아간다."
"...!"
도미닉 경은 세 가지 선택지를 보며 눈을 부릅떴다.
"첫 번째를 선택하면, 넌 가차랜드에서 영원불멸히 살아갈 거야. 단, 간섭을 위해선 큰 힘이 필요하겠지."
"두 번째를 선택하면, 여전히 넌 가차랜드에서의 삶을 살게 되겠지. 다만, 더 이상의 가치를 얻는 건 어려울 거야. 그 말은... 수명이 정해진다는 거겠지."
도미닉 경은 회장의 말에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게 다 무슨 소리란 말인가?
도미닉 경은 그저 250지역을 깨려고 온 것뿐인데, 어째서 이런 선택지를 골라야만 하는가?
도미닉 경은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며 퇴각하기 버튼을 찾았다.
"소용없어. 여기까지 온 이상, 선택은 운명이요, 필연이니까."
"..."
도미닉 경은 사라져 버린 퇴각하기 버튼의 빈칸을 보며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요?"
도미닉 경이 물었다.
"도대체 왜 내게 이런 선택지를 주는 거요?"
"...그건 도미닉 경이 250지역을 클리어해서야."
"..."
"250지역을 클리어했다는 건, 도미닉 경이 과거의 미련을 떨치고 승천의 조건을 갖췄다는 뜻이 돼. 이건 초월과는 다른 거야."
"지금까지 오면서,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나?"
"자네가 지나온 곳은 미래의 페럴란트요, 미래의 마계였네. 그리고 그건, 가차랜드의 영역이 아니었고."
"!"
도미닉 경은 그제야 자신이 거쳐 온 지역이 어떤 곳인지 알게 되었다.
"페럴란트와... 마계였다고?"
"그래."
"도미닉 경은 페럴란트를 또 한 번 구했어. 과거와 같이."
"그러나 도미닉 경은 마계의 마왕마저 무릎 꿇렸지. 과거와는 달리."
회장은 그렇게 말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도미닉 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도미닉 경은, 진정한 성좌로서 승천을 할 수 있게끔 모든 준비를 마친 거야. 과거의 미련을 지움으로서."
"미련..."
도미닉 경은 회장의 말을 듣고는 고민에 빠졌다.
"그래. 미련."
회장은 도미닉 경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어떠한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도미닉 경."
"선택할 시간일세."
회장이 도미닉 경을 재촉했다.
"성좌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겠는가?"
"아니면, 필멸자로서 죽음을 기다리는 삶을 살겠나?"
도미닉 경은 이 황당한 선택지에 고개를 들어 회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도미닉 경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과는 달리 선택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회장은, 도미닉 경의 입에서 나올 말을 그저 하염없이 기다릴 뿐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