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4화 〉 [외전 23화]아웃 오브 가차랜드 : 마계
* * *
"맙소사."
클로에는 하늘을 바라보며 속으로 신을 찾았다.
과학의 발달로 인해 신앙은 점점 힘을 잃어갔지만, 오늘만큼은 신을 찬양했다.
"정말... 도미닉 경인가?"
하늘에 떠 있는 우주 전함은 그야말로 전능함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런 전능한 전함을 소환한 기사 역시 전능한 존재였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어떠하랴.
전지하지 않아도, 전능하면 그만이었다.
마족들을 쓸어 버리는 데 있어서는 말이다.
클로에는 저 멀리 깃발을 들고 고고히 서 있는 기사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는 시대착오적인 의상이라고 생각했으나, 이제는 달랐다.
그는 도미닉 경이었다.
그 한 마디만으로 시대착오적인 의상은 신성한 성자의 옷이 되었고, 그 한마디만으로 그는 시대착오적인 미치광이에서 성자가 되었다.
"맙소사."
클로에는 다시 한번 도미닉 경으로 추정되는 기사를 바라보았다.
기사는 그저 전장에 오만한 듯 당당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모든 마족들이 우주 전함의 화력에 쓸려나갈 때까지.
그 화력이 얼마나 강한지 마치 구석구석 쌓인 먼지를 물청소하는 기분이었으나, 클로에는 그마저도 불경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환상인지?"]
["우리도 같은 것을 보고 있다."]
무전에 있던 모두도 기사의 행동을 보고는 할 말을 잃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 기적과도 같은 일을 보고 기억하는 것뿐이었다.
기사는 묵묵히 모든 마족이 쓸려 나가길 기다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균열을 바라보더니, 깃발을 뽑아 들고 당당하게 전진해 그 균열 속으로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균열은 닫히고, 하늘에 떠 있던 우주 전함도 다시 서서히 고도를 높이더니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 구름 가득하던 하늘은 서서히 빛이 내리며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내었고, 남아 있던 모두는 그제야 이 모든 것이 전설대로 이루어졌음을 깨달았다.
너무나도 놀라운 상황을 목도한 나머지 이해는 했으나 납득이 늦었던 것이었다.
["봐, 봤어? 도미닉 경이 우릴 도우셨다!"]
["누구 녹화한 거 없어?"]
그 순간, 전장의 무전 통신에 불이 붙었다.
그제야 모두가 도미닉 경을 목도했음을 이해하고, 납득하고, 마침내 받아들인 것이다.
도미닉 경은 전설대로 위기의 순간 강림하여 페럴란트를 도우셨다.
전설대로 말이다.
["...나 오늘부터 교단에 나가려고."]
["기도를 좀 해야겠어. 이런 불신자의 기도도 받아주시려나?"]
그들의 행동은 전장에서는 지양해야 할 일이었으나, 현재 전장은 이미 도미닉 경으로 추정되는 기사가 모두 정리하고 사라진 상태였다.
그 말은, 이들이 이렇게 호들갑을 떨어도 전혀 위험할 일이 없다는 뜻이었다.
"도미닉 경..."
클로에는 전쟁이 끝나고 다시 대학생의 신분으로 돌아갔을 때, 반드시 도미닉 경에 대해서 논문을 쓰고 말리라는 생각했다.
누군가는 도미닉 경을 위한 노래를 짓겠다고 다짐했고, 누군가는 도미닉 경을 위한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겠다고 생각했으며, 누군가는 도미닉 경을 캐릭터화 시켜 전 세계적으로 유행시키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만큼 오늘 있었던 일은 여기 있었던 사람들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나저나, 도미닉 경은 어디로 가신 걸까?"]
무전기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균열 속으로 가셨잖아. 도대체 왜 균열에 들어가신 거지?"]
["멍청아. 그것도 모르냐?"]
누군가가 의문을 가진 이를 멍청하다고 매도했다.
["더 이상 우리가 고통받지 않도록, 마족들을 혼내러 가신 걸 거야."]
그 말에 무전기에서는 그럴싸하다는 듯 탄성들이 터져 나왔다.
["그는 도미닉 경이니까."]
그렇게, 페럴란트에는 도미닉 경의 전설이 또 하나 추가되었다.
하얀 까마귀는 그 세를 잃었으나, 도미닉 경은 여전히 그 전설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
"여긴 또 어디지?"
무엇을 숨기랴.
도미닉 경은 균열 내부로 들어왔다.
이는 퀘스트 라인을 따라 이동한 것이었다.
"...250지역은 꽤 길군."
도미닉 경은 사실 스토리 모드를 깨고 있었다.
도미닉 경이 이런저런 사건에 휘말려 깨지 못했던 스토리 모드.
도미닉 경은 그동안 꾸준히 스토리 모드를 깨오며 마침내 250지역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250지역은 도대체 어떤 컨셉인지 잘 모르겠군. 249지역은 분명 시공간과 관련되어 있었는데..."
도미닉 경은 마족들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컨셉이 마족이라고 생각했다.
도미닉 경은 설마 조금 전에 있었던 곳이 페럴란트일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도미닉 경은 스토리 모드를 하고 있었고, 스토리 모드가 다른 차원과 이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으니까.
그렇기에 도미닉 경은 페럴란트에 출몰한 마족을 일 거에 해치우고는 균열로 바로 이동했다.
"여긴... 끔찍한 곳이로군."
도미닉 경은 균열 내부에 들어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곳에는 수많은 마족들이 있었는데, 하나 같이 끔찍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얼마나 균열 내부가 더럽고 잔혹했던지, 도미닉 경은 간만에 성인 필터와 혐오 필터를 켤 정도였다.
도미닉 경처럼 강력한 정신력의 소유자도 눈을 찌푸리게 만드는 곳이었다는 뜻이다.
필터들이 켜지자, 이곳은 곧 아름다운 꿈의 동산이 되었다.
조금 전까지 꿈틀거리며 녹아내리던 역병어린 주둥이들은 청포도 사탕을 마구 먹는 먹보들이 되었고, 온갖 모독적인 말을 내뱉는 열 한 개의 입을 가진 괴조와 고통에 몸부림치는 나무살갗 도살자는 동요를 부르는 앵무새와 흥겨운 춤을 추는 선인장이 되어 있었다.
"좀 보기 좋군."
도미닉 경은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혐오 필터가 켜져 있어서인지, 매캐한 유황과 썩은 내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보아하니, 이곳을 정리해야 하는 건가?"
도미닉 경은 딱 봐도 넓어보이는 땅을 보며 고민했다.
균열의 내부의 지평선을 볼 때, 적어도 하루 이틀 만에 끝날 일은 아니었다.
다행스럽게도 도미닉 경의 걱정은 기우로 끝났다.
곧 시스템 메시지가 도미닉 경에게 이곳에 온 진정한 목적에 대해 알려 준 것이었다.
[당신은 균열 내부, 마계에 들어섰습니다.]
[마왕 레기온이 서식하는 곳이죠.]
"레기온?"
도미닉 경은 그 이름에 움찔했다.
도미닉 경은 레기온이라는 이름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과거 페럴란트를 침략했던 마족들의 우두머리를 말이다.
[당신의 목적은 마왕 레기온을 봉인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대로 나가셔도 250지역은 클리어입니다만, 봉인 시 추가적인 보상이 있습니다.]
[일종의 보너스 미션이죠.]
[수락하시겠습니까?]
도미닉 경은 가끔 사람다운 시스템 메시지 창을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미닉 경에게 있어서 마왕 레기온은 철전지 원수나 다름없었다.
페럴란트를 침공한 수괴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비록 가차랜드에서 가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고, 레기온이라는 이름도 비슷한 이름의 다른 개체겠지만 그런 사유들은 도미닉 경이 이 미션을 포기해야 할 이유가 되지 못했다.
도미닉 경은 이내 검과 방패를 점검했다.
물론 제대로 된 싸움하지 않았기에 장비는 멀쩡했으나, 그래도 마족의 피가 엉겨 붙었다거나 하는 부분들이 있어 잠깐의 정비 시각은 꼭 필요한 일이었다.
"좋아."
도미닉 경은 다시 검과 방패를 치켜들고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시스템이 알려주는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이 걸음의 끝에는 마왕 레기온이 있겠지.
이제 그에게 한 방 먹여줄 시간이다.
...
도미닉 경은 마왕 레기온과 마주했다.
마왕 레기온은 도미닉 경의 기억 속에 있던 레기온 그 자체였는데, 그 당시보다도 더 무시무시한 모습이었다.
["어리석은 필멸자여, 어찌하여 여기까지 당도했느냐?"]
마왕 레기온은 작디작은 도미닉 경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레기온은 절벽 아래에 두 발을 딛고 절벽 위에 있는 도미닉 경을 보고 있었는데, 절벽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차마 레기온의 키를 확인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절벽 아래는 유황 및 온갖 유독한 가스가 내뿜어지며 불타고 있었는데, 도미닉 경은 순간 그 모습을 보고 불타던 페럴란트를 떠올렸다.
["아주 흥미롭구나, 필멸자여. 무슨 연유로 이리 나를 찾아온 거지? 그 많은 시련들을 거치고?"]
"너를 봉인하러 왔다."
["나를? 하하하! 어리석은 것. 감히 필멸자 주제에 영원불멸한 군주, 나 레기온에게 도전하려고 하느냐?"]
레기온은 도미닉 경이 가소로웠다.
도미닉 경은 지금까지 레기온을 궁지로 몰았던 이들과는 다소 달랐다.
성검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오, 신성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특출난 성좌의 관심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
약간의 가호가 있기는 했지만, 포식자 레기온의 처지에서는 고만고만한 축복이었다.
겉으로만 보기엔 지나가던 병사A나 다름없는 모습.
물론 기사로서 병사와는 다소 무력의 차이가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레기온에게 통할 만큼 유의미한 차이는 없었다.
레기온은 절벽 아래에 있던 팔을 들어 올려 도미닉 경에게 손가락질 했다.
["어리석디 어리석은 녀석! 감히 이 마왕 레기온에게 대적하려고 하다니! 네 영혼마저 한입에 삼켜 영원히 고통받게 하리 응?"]
텅.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왕 레기온은 갑자기 손가락 끝에서 얼얼한 감각을 느꼈다.
["이게 무슨윽!"]
텅.
다시 한번 소리가 들렸다.
마왕 레기온은 손가락에 또 한 번 느껴진 감각이 도대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려고 했으나, 고개는 돌아가지 않았다.
["필멸자여! 도대체 무슨 사이한 술법을윽!"]
팅. 틱.
이번에는 분명히 빗맞은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분명하게 손톱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마왕 레기온은 손톱 끝에서 느껴지는 얼얼함에 당황했으나, 여전히 몸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레기온은 이 모든 것이 눈앞에 있는 필멸자가 행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만! 네가 감히 누구에게 대적하는 줄 윽! 그만! 나는 레기온이다! 감히 내 말을 끊 윽! 그만! 그만! 내가 말하고 있윽! 그마안!"]
도미닉 경은 집요하게 마왕 레기온의 손가락을 노렸다.
그것은, 마치 모기가 손끝을 집요하게 연속적으로 무는 것과도 같았다.
확실한 것은, 이 모습은 절대 용사와 마왕의 구도가 아니었고, 또한 위대하고 서사적인 싸움도 아니었다.
["윽! 그만! 내가 너에게 보물을 주겠윽! 그마아아아아아안!"]
그저, 일방적인 괴롭힘일 뿐이었다.
그것도 도미닉 경의 사심이 듬뿍 담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