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3화 〉 [외전 22화]아웃 오브 가차랜드 : 페럴란트
* * *
페럴란트는 척박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땅이 척박한 것과는 달리 사람들은 친절하고, 강인했다.
이는 마족들과의 대전쟁으로 증명된 사실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많은 신화와 전설이 그저 기록으로만 남게 되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페럴란트의 황무지에서 풍부한 지하자원이 발견되고, 그 자원을 기준으로 척박한 땅들에 공장이 세워져 더 이상 가난하지 않게 되었음에도 마찬가지였다.
과학의 발전으로 더 이상 페럴란트의 황폐화가 진행되지 않게 되고, 환경을 위해 녹지화가 진행되고 있음에도 마찬가지였다.
페럴란트의 사람들은 그 어떤 때라도 친절하고 강인했다.
그리고... 그건,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한번 마족들이 침략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큭!"
["클로에!"]
거대한 이족보행 병기가 더욱 거대한 마족의 몸통 박치기로 인해 땅에 누웠다.
그 옆에 존재하던 거대한 전차에서 무전이 날아왔으나, 이 이족보행 병기를 조종하는 클로에라는 여성은 차마 그 무전에 대답할 수 없었다.
몸통 박치기로 인해 그녀가 탄 포드가 찌그러져 그녀의 흉부를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흉부가 강하게 압박되자, 클로에는 숨을 쉬기가 버거웠다.
숨을 쉬기가 힘들어지자 점점 시야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족의 후속타가 없었다는 점일까.
클로에의 기체를 공격했던 마족은, 수많은 포탄 세례를 받고는 마계로 추방당해 버렸으니까.
["클로에! 괜찮아?"]
다시 한번 클로에에게 무전이 왔다.
"괜찮아."
클로에는 말하는 것조차 버거웠으나, 애써 괜찮은 척 말을 꺼냈다.
["...숨 쉬기가 힘들어 보이는데."]
"내가, 괜찮다고, 했잖아."
클로에는 그렇게 말하며 지금까지 이 이족보행 병기를 조종했던 감각으로 기체를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기판을 보면서 움직였다면 더 좋으련만, 찌그러진 포드로 인해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마족들은?"
["아직 몰려오고 있어."]
"...제길."
클로에는 조금 전의 마족이 죽었을 때, 마족의 군단이 퇴각할 것으로 생각했다.
누가 보더라도 가장 큰 마족이 이 무리를 이끄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렇기에 무리해서라도 대형 마족을 저지하고 처리하는 데 성공한 클로에였으나, 아쉽게도 그 마족은 우두머리가 아닌 모양이었다.
"...이거 잘못하면, 오늘이 내 제삿날이겠네."
["뭐?"]
"아냐. 그냥, 여기서 죽으면 관은 따로 필요 없겠구나 싶어서."
클로에는 그렇게 말하며 흐릿한 외부 관측 화면을 바로잡았다.
그제야 클로에는 여전히 새까맣게 몰려오는 마족 무리들을 볼 수 있었다.
"...맙소사."
클로에는 조금 전까지 싸우다가 죽겠노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했지만, 저 마족 무리들 앞에서 더 이상 그런 생각할 수 없었다.
그만큼 마족 무리는 많았고, 아군은 불리했다.
페럴란트 군의 전략은 아주 간단했다.
클로에가 탄 것과 같은 이족보행 병기들이 앞에서 마족들을 막아 내면, 후방 화력 부대가 뭉쳐 있는 마족들을 추방시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이러한 전략이 잘 먹혔고, 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족보행 병기의 수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초창기에는 무려 300여 기에 달하는 이족보행 병기가 있었으나, 마족들의 공세를 막아 내면서 이제 고작 20기 정도만 남게 된 상황.
그마저도 절반 이상은 수리를 위해 격납고에 들어가 있었고,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남은 인원들은 넓은 전선에 흩어져 어떻게든 페럴란트 방어선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제국은? 제국의 지원은?"
["기갑 부대가 이곳으로 오고 있어. 하지만 큰 기대는 안 하는 게 좋아. 알다시피 페럴란트에 비해서 제국은..."]
마족에 대한 경험이 턱없이 부족하다. 라는 말을 삼키는 무전 상대.
"언제쯤 도착한대?"
클로에는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보겠노라고 다짐했다.
["...이틀 뒤."]
"뭐? 왜 그렇게 늦어? 기갑 부대라며!"
["제국은 마족에 대한 이해가 턱없이 부족하니까."]
결국 무전 상대가 클로에의 말에 한숨을 내뱉었다.
그것은 클로에에 대한 한숨이 아니었다.
지금, 이 답답한 상황에 대한 한숨이었다.
"...그렇다는 말은..."
["어쩌면, 여기서 뼈를 묻어야 할 수도 있어."]
"..."
클로에는 더 이상 흉부가 욱신거리지 않았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픔마저 잊어 버린 것이었다.
클로에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무전기 너머의 상대는 클로에의 표정만큼이나 창백한 침묵을 듣고는 클로에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클로에의 멘탈이 나간 모양이었다.
지금까지의 파일럿 중에선 그나마 멘탈이 강한 아이였지만, 강한 것은 충격을 받았을 때 휘지 않고 깨지는 법이었다.
무전기 너머의 상대는 어떻게든 클로에의 멘탈을 수습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괜찮아. 여차하면 뒤로 빠져. 너와 네 기체는 페럴란트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하니까, 후퇴해도 별말은 안나올 거야. 오히려 살아돌아오길 바라고 있을 걸?"]
"..."
그러나 여전히 클로에의 멘탈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무전기 너머의 상대는 그런 클로에의 멘탈을 위해 다시 한번 격려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전기 너머의 상대보다, 아군의 무전이 먼저였다.
["뭐, 뭐지? 알파, 알파, 여기는 베타. 전방에 신원을 알 수 없는 인원이 관측된다!"]
["뭐?"]
알파라고 불린 이는 베타라고 불린 이의 무전을 듣고는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마족들이 들끓는 곳에, 신원을 알 수 없는 인원이라고?
["베타, 베타, 여기는 알파. 혹시 마족은 아닌지?"]
["마족은 아니라고 알림."]
["용모에 대해서 설명 바람."]
["그게..."]
베타는 알파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듯 머뭇거리더니, 이내 무전기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시, 시대 착오적인 기사가 있다고 알림!"]
["시대 착오적인 기사?"]
알파는 베타의 말을 듣고 더욱 어이가 없었다.
이 전장에 신원 모를 이가 있다는 것도 의심스러운데, 그게 기사라고?
["도미닉 경이 도우러 온 거야 뭐야."]
알파라고 불린 이가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알파의 말대로, 페럴란트에는 한 가지 전설이 있었다.
그건 바로, 도미닉 경에 대한 전설이었다.
과거 마족들이 쳐들어왔을 때 마족들을 막아 내고 죽은 도미닉 경은 사후 성인이 되어 페럴란트를 굽어보고 있으며, 페럴란트의 위기가 올 때 다시 나타나 페럴란트를 구원해준다는 전설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하얀 까마귀 교단에서 도미닉 경을 추앙하기 위해 만든 헛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뜻밖에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적지 않았다.
그리고 보통 그런 이들은 이렇게 마족들과 최전방에서 싸우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도미닉 경이었으면 좋겠네."
클로에가 도미닉 경이라는 말에 정신을 차린 듯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 맞아. 너 징집되기 전엔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다고 했던가? 역사?"]
"응."
클로에는 그렇게 말하며 기체를 움직였다.
"그나저나 만일, 그 사람이 도미닉 경이라면, 이 전쟁은 이긴 것이나 다름없겠네."
클로에는 피식 웃었다.
그 순간 찌그러진 포드에 눌려 있던 흉부가 아파왔지만, 클로에는 개의치 않았다.
"정말 도미닉 경이었으면 좋겠어."
["...상세한 외형을 확인했다. 기사의 모습은 머리에 삼색 깃털을 꽂고, 검과 방패를 들었으며... 한쪽 눈에 안대를 하고 있... 자, 잠깐!"]
그때, 무전망에서 다시 한번 기사의 모습을 알리는 무전이 들렸다.
그리고 이내, 베타라고 불린 이의 다급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 맙소사! 기사가 검으로 마족을 벴다!"]
["마족을 벴다고?"]
"뭐?"
알파라고 불린 이와 클로에는 구시대적인 검으로 마족을 벴다는 말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그들에게 있어서 마족은 과학 기술의 정수가 담긴 무기의 화력이 아니면 추방시킬 수 없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족의 종류는?"]
["놀라지 마라. 대형 마족이다!"]
베타라고 불린 이의 무전이 끝나자, 무전에는 치지직거리는 잡음만이 들렸다.
그 침묵을 깬 것은, 알파라고 불린 이였다.
["...정말 도미닉 경이 돌아온 건가?"]
알파의 목소리는, 매우 떨리고 있었다.
...
페럴란트 군과 마족들이 싸우고 있는 전장 한가운데, 시대착오적인 기사가 나타나 검을 휘둘렀다.
"...갑자기 마족이 나타나서 놀랐더니."
기사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검의 경로에 있던 다섯 마족의 목이 날아갔다.
그 다섯 마족은 비명이나 괴성도 지르지 못한 채 마계로 추방되었다.
"수에 비해서 상당히 허당이군."
기사는 방패를 휘둘러 커다란 마족의 배를 밀어 쳤다.
그러자 마족의 배에 오목하게 파문이 일더니, 이내 등이 터져 나가며 역시나 마계로 추방되었다.
"예전에 비하면, 너무나도 나약한 놈들이야. 진명을 알 필요도 없겠군."
기사는 그렇게 말하며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었다.
안대 내부에도 피가 스며들었기에 그는 안대를 들어 올리고 끔찍한 상처 사이에 스며든 피를 지워냈다.
그러는 와중에 마족들이 공격할 수도 있었지만, 차마 마족들은 그러지 못했다.
기사의 압도적인 무력에 놀라 차마 움직이지 못 하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수가 굉장히 많군."
기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래도 검과 방패로 모든 것을 해결하기엔 그 수가 너무 많았다.
"어쩔 수 없지."
기사가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전장에 깃발이 하나 떨어졌다.
그 깃발은 어디서 떨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기사와 적당한 거리를 벌리지 못한 마족 하나의 몸을 그대로 꿰뚫고는 땅에 박혔다.
그 깃발에는, 옛 페럴란트의 문장인 갈색 바탕에 흰 까마귀와 주목이 그려져 있었다.
깃발이 바람에 한 번 펄럭였다.
그와 동시에, 갑자기 나타난 선전용 스피커들이 사이렌 소리를 울렸다.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먹구름이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그 먹구름들이 회오리치는 사이에서...
거대한 우주 전함이 내려왔다.
마치 불타는 유성처럼 마찰력에 의한 불꽃을 튀기던 우주 전함은, 천천히 전장 위를 움직이며 그 위용을 모든 이들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한 번에 쓸어버려야겠어."
기사가 그렇게 말하며 방패를 양손으로 잡고 땅을 쿵 찍었다.
그러자, 기사의 머리 위에 있던 우주 전함에 달린 수백의 포대가 일제히 사격을 시작했다.
찢어진 차원으 틈새에서 마족들이 계속 보충되었으나, 우주 전함의 화력으로 추방되는 수가 더 많았다.
이내 마족들의 수가 적당히 줄어들자, 우주 전함은 전방에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모으기 시작했다.
마족들은 직감했다.
'아, 이거 망했네.' 라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