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0화 〉 [499화]끝을 향하여
* * *
도미닉 경은 발로 에디터 버튼을 짓밟으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설마 진짜로 내가 당신 편에 설 줄 알았나?"
"..."
남자는 고통 속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손목은 기괴한 각도로 꺾였으며, 하나여야할 관절이 두 개나 더 추가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방패의 모서리 모양으로 손목이 박살 난 상태라는 뜻이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거지?"
도미닉 경은 남자에게 검을 겨누었다.
남자는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도미닉 경을 노려보았다.
폭발로 인해 비산했던 흙먼지가 그의 화상자국에 내려앉기 시작하면서 그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너라면 날 이해해 줄 줄 알았는데."
"정신병자의 말을 이해해 줄 사람은 없지."
도미닉 경이 신랄하게 남자를 비판했다.
"고작 그런 비열한 열등감 때문에 한 세상을 파괴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자라면, 더더욱 말이다."
"하."
남자가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고는, 먹먹한 듯 작게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고작 데이터 쪼가리들 주제에, 진짜 생명이 있는 것처럼 굴기나 하고...!"
"글쎄."
남자의 중얼거림은 너무나도 크게 울려서, 도미닉 경도 충분히 그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그 말에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남자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당신과 같이 뒤틀린 자 보다는, 당신이 말하는 소위 데이터 쪼가리가 더 인간다울 것 같군."
남자는 도미닉 경의 말에 말문이 턱 막혔다.
도미닉 경의 말에 반론을 제기하고 싶었으나, 어째서인지 입이 제대로 벌려지지 않았다.
그 자신도, 본능적으로 도미닉 경의 말이 맞다는 사실을 인정해 버린 것이다.
보통 여기에서라면 순순히 모든 것을 포기하겠지만, 남자는 달랐다.
남자는 무언가 말을 할듯 말 듯 입을 벌리다가 닫다가를 반복하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도미닉 경에게 말했다.
"좋아. 인정하지. 내가 미치광이일지도 모르고, 내가 열등감에 찌들어 남의 것을 파괴하려는 싸이코일지도 몰라. 그리고 데이터 쪼가리보다 못한 인격체이자, 그런 데이터 쪼가리에도 열등감을 느끼는 돌아이일지도 모르지."
도미닉 경은 말없이 남자가 하는 말을 계속 들어 주었다.
"하지만 말이야.그래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어."
남자는 그런 도미닉 경에게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가차랜드는,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야."
그 말과 동시에, 남자는 지금까지 잊혀졌던 사당을 바라보았다.
도미닉 경은 남자의 시선을 따라 사당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너무 안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당은, 여전히 사악한 기운을 내뿜으며 봉인해제하고 있었다.
그것도, 거의 끝나가는 상황이었다.
"끝이야! 하하! 가차랜드를 멸망시킬 봉인을 풀었으니, 이제 가차랜드는 멸망하고 말 거라고!"
남자는 벌써 승리를 자신했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에는 이유가 있었다.
남자는 가차랜드에 침입하기 전, 가차랜드 설정 집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가차랜드에 있는 수많은 멸망 플래그중 바로 이 오오뉴도의 봉인을 선택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이 오오뉴도가, 설정상 가장 강력했기 때문이었다.
설정상 오오뉴도는 초월 등급의 인원 수백 명이 달려들어야 겨우 봉인을 시킬 수 있는 개체.
초월 업데이트가 얼마 되지 않은데다가, 5성조차 수백 명이 되지 않는 현재의 가차랜드에서, 오오뉴도는 가장 강력한 멸망 수단이었다.
"오오뉴도의 강력함은 설정상 최고."
남자는 도미닉 경을 비웃으며 말했다.
도미닉 경은 그 사실을 피부로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봉인으로 흘러 들어가는 사악한 기운이, 도미닉 경의 피부를 저릿저릿하게 찌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항력이 강한 도미닉 경이었음에도, 이 기운은 차마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맙소사..."
도미닉 경은 이제 곧 봉인이 풀려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붉은 금줄과 부적들은 이제 더 이상 사악한 기운들을 막아 내지 못했다.
악의로 가득 찬 기운들은 신성한 금줄과 부적들을 종잇장 찢듯 찢어 버렸고, 사당의 기둥은 사악함에 절여져 삭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의 모든 악의로 가득 찬 검은 구슬이 나타나, 하늘을 향해 검고 불길한 에너지 기둥을 쏘아 올렸다.
그 기둥이 얼마나 무시무시하던지, 공동의 천장에는 무려 축구장만한 구멍이 뚫릴 정도였다.
"하, 하하하! 보라! 마침내 가차랜드의 멸망이 찾아왔다!"
남자는 미친 듯이 웃었다.
"도미닉 경. 이런이런, 안 되었군. 내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지금쯤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을 텐데."
남자는 마치 마약이라도 한 듯 미친 듯이 웃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내 손을 잡아. 그리고 같이 이 가차랜드를 파괴하는 거다!"
남자는 광견병에 걸린 사람에게 마약을 주입한 것처럼 미친 듯이 웃었다.
이미 승리했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이거 완전히 망한 것 같군."
도미닉 경은 남자의 말을 무시한 채, 도미니카 경과 히메, 앨리시아, 그리고 도미니아 경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늦어 버린 것 같소."
도미닉 경이 침울하게 나머지 사람들에게 말했다.
"미안하오."
도미닉 경이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 상대가 치사하게 나온 거잖아?"
도미니카 경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는 이미 평행세계의 멸망을 한 번 경험한 적이 있었기에, 멸망에 있어서는 꽤 담담한 느낌이었다.
"글쎄요..."
그에 반해, 앨리시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미래의 지식으로는, 지금 당장 멸망하지는 않는다고 나와 있었으니까.
"미래의 저희가 있다는 뜻은, 여기서 우리가 멸망할 때가 아니라는 뜻이죠."
앨리시아의 말에 도미닉 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앨리시아의 말에 동의를 한 것은 아니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한 끄덕임이었다.
도미닉 경은 마지막으로 히메를 바라보았다.
"...히메 공."
"도미닉 경."
히메는 곧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렇게 생각하자, 히메는 지금까지처럼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있어선 안 된다는 생각했다.
히메는 또다시 마음을 굳혔다.
어차피 멸망할 거, 하고 싶은 말이라도 하고 죽자는 심정이었다.
"도미닉 경! 저랑... 저랑 사귀어 주세요!"
그 순간, 도미닉 경과 히메 사이에 정적이 찾아왔다.
히메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도미닉 경의 대답을 기다렸다.
도미닉 경이 거절하면 어쩌지?
뭐 어째. 어차피 세상은 멸망하잖아. 속이라도 시원해지지 않을까?
그, 그런가?
히메는 그렇게 생각하며 도미닉 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도미닉 경의 시선과 딱 마주하고 말았다.
도미닉 경의 시선은 굉장히 복잡하고 미묘했다.
무언가 감정이 소용돌이 치는 모양이었다.
히메는 도미닉 경의 눈빛으로는 전혀 그의 감정을 읽어낼 수 없었기에, 초초함은 더 깊어져만 갔다.
"순서가 틀렸소."
"네, 네?"
이윽고 도미닉 경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도미닉 경의 입에서 나온 말은 히메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일단 곧 소환될 재앙부터 생각하시오."
"...네."
히메는 도미닉 경의 말에 시무룩해졌다.
아무래도, 완강한 거절의 표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한 이후에, 내가 고백하겠소. 기사라는 자가 레이디가 먼저 고백하도록 둘 수는 없는 일 아니겠소?"
그렇게 말한 도미닉 경은, 다시금 검과 방패를 쥐고 악의적인 에너지 덩어리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히메는 도미닉 경의 말을 순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할 뿐이었으나, 이내 도미니카 경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축하해. 마침내 도미닉 경과 이어지겠네."
도미니카 경은 도미닉 경처럼 방패를 들어 올리며 도미닉 경의 뒤를 따랐다.
"축하해요, 어머님."
앨리시아도 히메에게 축하의 메시지를 건넸다.
"에?"
히메는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
순간적으로, 고백 리얼리티 쇼크를 일으킬 만큼.
...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나란히 악의적인 구체 앞에 섰다.
앨리시아는 도미니아 경을 지키기 위해 후방으로 빠진 상태였다.
"이거참, 곤란한 일이오."
"그러게 말이야."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피부가 저릿저릿하고 팔다리가 덜덜 떨릴 정도로 강한 에너지 앞에서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그건, 마침내 역사적... 아니, 신화적인 전투와 마주한 전사의 모습이었다.
"호."
그 모습을 본 남자가 비웃었다.
"이미 전력은 압도적이야.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건가?"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남자의 말을 들었으나, 일부러 반응해주지 않았다.
남자의 반응을 신경 쓰기보다, 곧 나타날 오오뉴도라는 존재에게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그러한 도미닉 경들의 모습을 보고 자신을 무시한다고 여겼는지,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내가 눈이 잘못되었던 것 같군. 도미닉 경은 내 롤 모델로 삼을 만한 남자가 아니야."
남자는 이내 힐끗 시계를 보았다.
그러고는, 검을 소환해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자! 마침내 여기 나타나노라! 이 가차랜드를 파괴할, 거스를 수도, 저항할 수도 없는 전설적인 존재가!"
그와 동시에, 하늘로 솟구치던 에너지가 끊겼다.
그리고 사악한 에너지 구체가 맥동하기 시작했다.
"나와라, 오오뉴도!"
남자가 검으로 사악한 구체를 가리켰다.
사악한 구체는 곧 점점 커지더니, 거대한 거인의 형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빛을 흡수하는 검은 피부의 거인은 그 덩치를 점점 키워나가더니, 이내 하늘 끝에 닿을 정도로 덩치가 커졌다.
"맙소사."
"무시무시한 크기로군..."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오오뉴도의 무시무시한 크기를 질린 듯 바라보았다.
자세한 스탯은 모르겠지만, 크기만 해도 가차랜드를 멸망시킬 존재라는 건 허언이 아닌 것 같았다.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검과 방패를 들어 올리며 전의를 다졌다.
...그러나 곧 그 전의는 허탈감으로 바뀌었다.
오오뉴도는 그 크기를 모두 키우고는 있는 힘껏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아무리 외쳐도 오오뉴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황당한 것은, 이 일련의 행동을 한 오오뉴도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뭐지?"
"갑자기 사라졌... 다니?"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내고는 갑자기 사라져 버린 오오뉴도의 존재에 대해 당황했다.
그리고 당황한 것은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 뿐만이 아니었다.
의문의 남자도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남자는 갑자기 사라져 버린 오오뉴도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맥거핀이죠."
"!"
그때였다.
의문의 남자 뒤에서 한 남자가 나타난 것은.
바로 집사 닌자였다.
"맥거핀... 이라고?"
"그렇습니다."
집사 닌자는 의문의 남자에게 다가가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오오뉴도는 설정상 가차랜드를 멸망시킬 존재가 맞습니다."
"그래! 그래서 내가 오오뉴도의 봉인을"
"'설정상' 말이죠."
"...!"
남자는 집사 닌자의 말에 얼굴을 와락 구겼다.
그제야 집사 닌자가 하는 말의 뜻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말은... 여기 있는 봉인은..."
"네."
집사 닌자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건, 그저 봉인의 구색을 갖춘 오브젝트 1일 뿐이었던 겁니다."
"그, 그런..."
남자는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으시겠죠."
집사 닌자는 이제 남자의 지척에 다다랐다.
손을 뻗으면, 곧바로 남자를 제압할 수 있을 만큼의 거리.
집사 닌자는 거기서 두 걸음을 더 걸어갔다.
"저희가 당신을 이해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컥!"
그와 동시에 집사 닌자가 남자의 뒷목을 후려쳤다.
남자는 그대로 기절했는지, 휠체어 위에 추욱 늘어졌다.
"..."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그 모습을 황당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실제로도, 황당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모든 사건은, 이 한순간에 해결되었다는 것 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