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8화 〉 [497화]끝을 향하여
* * *
알 수 없는 남자와의 전투는 지금까지의 전투와는 꽤 달랐다.
방금 전까지 아무것도 없는 공동은 이내 사람의 키보다 훌쩍 큰 잡동사니들로 가득 찼다.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오히려 지금 상황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알 수 없는 남자가 탄 전쟁 기계는 사방에 온갖 투사체를 발사하고 있었고, 그런 투사체를 막는 용도로 쓰기에 이 잡동사니들은 꽤 훌륭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곳곳에 있는 잡동사니들은 아슬아슬한 상태로 있어 도미닉 경이나 도미니카 경이 툭 치면 곧바로 저 전쟁 기계에 피해를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누, 누가 저 좀 도와주세요!"
"큭!"
도미닉 경은 아슬아슬하고 녹슨 쇠사슬을 끊어 저 전쟁 기계에게 잡동사니의 맛을 보여 줄 생각이었었다.
갑자기 어디선가 민간인이 양팔을 들고 튀어나와 도미닉 경의 시야를 가리기 전까지는.
도미닉 경은 있는 힘껏 검을 휘두르려다가 다시금 검을 회수했다.
"가, 감사합니다!"
민간인은 도미닉 경 앞에서 연신 고개를 숙였다.
얼마나 심하게 고개를 숙이던지, 도미닉 경의 진로를 막고는 좋은 기회를 그대로 날려 버릴 정도였다.
도미닉 경은 민간인을 노려보았다.
민간인은 도미닉 경의 눈빛에 흠칫 놀라더니, 이내 다른 잡동사니 뒤로 숨어 버렸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 도미닉 경 뿐만이 아니었다.
도미니카 경도 계속해서 민간인들의 방해를 받고 있었다.
"사, 살려주세요!"
갑자기 나타나 발목을 잡는다거나.
"감사합니다!"
공격 경로에 서서 방해된다거나.
"추, 출구는 어디죠?"
날아오는 발사체를 피해야 하는 상황에서 옷깃을 잡고 놓아주질 않는다거나.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갑자기 나타난 민간인들에게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하하! 재밌군, 재밌어! 과연 우리 도미닉 경은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
물론, 이는 도미닉 경과 비슷하게 생긴 수상한 남자가 행한 일이었다.
...
수상한 남자는 전쟁 기계 안에서 에디터를 만지작거렸다.
그럴 때마다 전장에는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의 발목을 잡는 민간인들이 생성되었다.
"역시, 더미 데이터를 가지고 노는 건 즐겁다니까."
그렇다.
지금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이 상대하는 민간인들은 가차랜드의 더미 데이터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차랜드 초창기에 사람이 너무 없었을 때, 그나마 사람 사는 티라도 내려고 했던 흔적들이었다.
이후 가차랜드에서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이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나, 수상한 남자는 그들을 불러내어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을 방해하는 함정으로 써먹고 있는 것이었다.
이 공동에 온갖 잡동사니들을 쌓아 올린 것도 바로 그런 것 때문이었다.
보이지 않는 구석에서 민간인들이 튀어나와 방해해야 더 크게 짜증 나게 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저것들은 조금 거슬린단 말이지..."
남자는 잡동사니 위에 쌓인 잡동사니들을 바라보았다.
그것들은 전쟁 기계에 큰 피해를 줄 수 있을 만큼 무겁고, 큰 것들이었다.
"무겁고 큰 것은 아래로, 작고 가벼운 것들을 위로라는 원칙도 모르나?"
남자는 청소를 할 때 필요한 리빙 포인트를 떠올리며 투덜거렸다.
가끔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이 민간인들의 방해를 뚫고 다가와 그 물건들을 전쟁 기계 위로 떨어뜨릴 때마다 짜증이 올라오는 것은 덤이었다.
"아, 젠장!"
방금 전도 그랬다.
도미닉 경은 또 한 번 민간인들의 방해를 뚫고 전쟁 기계의 정수리에 10T 라고 적힌 케틀벨을 떨어뜨리는 데 성공했다.
남자는 잠깐 먹통이 된 관제 시스템을 고치며 짜증을 부렸다.
전쟁 기계는 잠깐 움직임이 없었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그러나 그런 상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남자는 에디터라는 신기를 통해 바로 전쟁 기계의 상태를 방금 전으로 돌렸다.
체력도, 보호막도, 상태 이상도 모두 원래대로 돌아갔다.
남자는 이 강력한 힘에 취해 환하게 웃었다.
아주 기분 나쁠 정도로 환하게.
"그나저나..."
남자는 힐끗 전쟁 기계와 결합한 사당을 바라보았다.
"이제 곧 봉인이 풀릴 때가 되었는데."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무시무시하게 웃었다.
그의 동공은 심각할 정도로 작아져 사백안처럼 보였으며, 그의 입은 찢어질 듯 광대뼈에 걸쳤다.
보기만 해도 섬뜩함을 느낄 정도로 끔찍한 웃음.
그건 마치, 악마의 웃음을 보는 것 같았다.
"삼 대에 걸친 피를 바쳤으니, 봉인이 풀리는 것은 기정사실이고..."
그랬다.
이 수상한 남자는 봉인을 푸는 방법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곳에 봉인된 오오뉴도를 푸는 방법은, 삼 대에 걸친 여성의 피를 흘리는 것이었다.
도미니아 경으로 하나.
도미니아 경의 어머니인 앨리시아로 하나.
그리고...마지막으로 운류 히메까지.
물론 엄밀하게 말하자면 제대로 된 삼 대는 아니었다.
앨리시아는 며느리일 뿐, 운류 가문의 피가 섞이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나 앨리시아 대의 여성이라고는 앨리시아가 전부였기에, 봉인을 풀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아마 봉인이 조금 유연성 있는 편이라면, 이 정도는 너그럽게 봐주고 넘어가리라.
"음?"
그때, 수상쩍은 남자는 문득 뒷목이 싸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무언가 일이 잘못될 때 나오는 감각이었다.
"뭔가가 잘못되어가고 있다...?"
남자는 당황하며 무엇이 잘못되어가는지 하나씩 체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노력은 부질없었다.
[경고! 경고! 경고!]
[에너지 발생 시설이 파괴되었습니다!]
[10초 뒤 자폭합니다!]
"뭐, 뭐?"
남자는 갑자기 눈앞에 떠오른 경고창에 너무 놀라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고 말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그렇게 멍한 상태에 있던 남자는, 이 거대한 전쟁 기계가 자폭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는 분명 중간에 에디터를 써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갈 시간이 있었지만,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시기를 놓쳐 버린 것이다.
"말도 안 ㄷ"
도미닉 경과 비슷하게 생긴 남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절규를 내뱉으며 폭발에 휘말렸다.
...
몇 분 전, 히메와 앨리시아는 사당의 복도를 걷고 있었다.
"저기, 히메 씨? 어째서 가면 갈수록 사이버네틱스러워지는 것 같..."
"그, 그러게요! 이상하네...?"
히메는 당황한 듯 멋쩍게 웃었다.
"여, 여기가 맞는데...?"
히메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얼마 전에 배웠던 닌자의 비술 중 하나인 탈출 경로 찾기를 행한결과, 감이 이쪽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히메가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기는 했지만, 히메도 지금 상황이 의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지금 가는 길은, 어째서인지 사당의 더 깊은 곳으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조금만 더 가보죠."
히메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는 앨리시아에게 변명하듯 그렇게 말했다.
앨리시아도 딱히 지금 상황을 해결할 방도는 없었기에, 그저 도미니아 경을 꼭 안은 채 히메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조금 더 걸어간 히메와 앨리시아는, 이내 수상쩍은 방 하나를 발견했다.
"어라? 여긴 데...?"
히메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히메는 감이 이끄는 대로 도착한 방에 적힌 문구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플라즈마 동력실]이라고 적혀 있었다.
"으음...? 어째서 여기가 출구가 되는 거지?"
히메는 혹시나 해 슬쩍 문을 열어 보았으나, 거기엔 뭔가 멋져 보이는 첨단 기기들과 억제장, 그리고 억제장으로 압축된 플라즈마 구체만 있을 뿐이었다.
"잠시만요."
히메는 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앨리시아를 잠시 두고 방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리고 히메는 마침내 이곳에 비상 탈출용 통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비상 통로를 찾아낸 히메는 다시 앨리시아에게 돌아가 비상 통로가 있다고 말했다.
"저기 비상용 통로가 있어요. 거길 통하면 바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가요?"
앨리시아는 히메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금까지 조금 의심하기는 했으나, 히메는 앨리시아의 시어머니였다.
그만큼 히메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앨리시아는 히메를 믿어보기로 했다.
"좋아요. 가보죠."
"우웅..."
"!"
그때였다.
앨리시아는 품속에 있던 도미니아 경이 깨어나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마?"
도미니아 경은 그 작은 몸으로 크게 기지개를 켠 뒤, 아직 졸린 듯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도미니아 경은 앨리시아를 발견했다.
"어마."
도미니아 경은 이 상황이 꿈이라고 생각하는지, 이내 앨리시아의 품속에 파고들어 어리광을 부렸다.
앨리시아는 그 모습을 보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어째서인지 앨리시아는, 도미니아 경에 대한 복잡한 감정이 북받쳐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그럴 시간이 없어요. 일단 빨리 여길 빠져나가죠."
"자, 잠시만요!"
히메는 감정적이게 된 앨리시아의 손을 잡고 잡아당겼다.
앨리시아는 도미니아 경과 같이 하는 이 시간이 영원하길 바랬으나, 히메의 행동으로 인해 순식간에 그 생각이 날아가 버렸다.
"아우?"
도미니아 경은 갑자기 달리기 시작하는 두 사람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꿈이 아닌가? 라는 것처럼 말이다.
"아부우우."
하지만 아직 도미니아 경은 잠에서 완전히 깨어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수상한 남자가 도미니아 경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독한 약을 쓴 것임이 틀림없었다.
도미니아 경은 다시금 기지개를 폈다.
졸린 몸을 깨우려는 도미니아 경 자기 발악이었다.
그러나 그 기지개는 참으로 우연찮게, 나비효과를 일으키고 말았다.
바로, 근처에 있던 자폭 버튼을 누르고 만 것이다.
물론 이 버튼은 자폭 버튼인 만큼 투명한 캡으로 보호되고 있었지만,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이 계속해서 기계에 충격을 주는 바람에 캡이 벗겨진 상태였다.
아무래도, 일종의 방산비리가 있는 것 같았다.
어쨌든 이 버튼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이 기계가 탈취되었을 때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침입자들의 손에 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침입자들은, 비상 통로를 통해 기계 바깥으로 뛰쳐 내린 이후였다.
이것이 바로, 이 거대한 전쟁 기계가 폭발해 박살 나버린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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