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4화 〉 [453화]5성 모임
* * *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보라색 나비 가면을 쓴 보라색의 여성.
도미닉 경은 무의식적으로 그녀에게 반가움을 느꼈다.
그녀가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정말 무의식적으로 말이다.
"당신은 누구요?"
도미닉 경이 여성에게 물었다.
"그리고 어째서 당신에게서 익숙한 느낌이 드는 것이오?"
"글쎄요."
여성은 도미닉 경의 말에 잠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정체를 밝히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듯했다.
"뭐, 힌트 정도는 줘도 상관없으려나."
그렇게 말한 보라색 드레스의 여성은, 이내 주머니에서 테니스 공 두 개를 꺼냈다.
"...공?"
도미닉 경은 힌트라면서 테니스 공을 꺼낸 여성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여성은 도미닉 경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신을 집중한 뒤, 테니스 공을 천장을 향해 던졌다.
도미닉 경의 시선이 테니스 공을 따라 하늘로 솟구쳤다가, 또다시 테니스 공을 따라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도미닉 경은, 뿔의 끝자락에 테니스 공이 꿰어지는 묘기를 볼 수 있었다.
"뿔?"
도미닉 경은 다시 보라색 드레스의 여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평범한 듯 보였던 여성의 외관에 변화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땅에 닿을 듯 길었고,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거의 30cm 정도는 되어 보일 정도로 긴 뿔 두 개가 나 있었다.
도미닉 경은 그 분위기를 보며 어째서인지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었다.
"뚜 르 방?"
"바로 알아차리시네요."
마왕 뚜 르 방은 다시 뿔과 머리카락을 숨기며 도미닉 경을 향해 활짝 웃었다.
뿔이 사라지며 아래로 낙하하기 시작한 테니스 공이 그녀의 머리에 떨어질 뻔했으나, 뚜 르 방은 익숙한 듯 염력을 일으켜 테니스 공을 회수했다.
도미닉 경은 눈앞에 있는 이가 마왕 뚜 르 방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크나큰 충격에 빠졌다.
도미닉 경이 아는 마왕 뚜 르 방은 도미닉 경의 무릎에나 겨우 닿을 정도로 작은, 2등신의 뽀작뽀작한 마왕이었지, 이처럼 현실적으로 팔다리가 쭉쭉 긴 마왕이 아니었던 것이다.
말이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그만큼 도미닉 경이 받은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 모습은 어떻게 된 거요? 평소의 모습은 어디 가고?"
"뭐, 이게 제 본 모습이니까요."
마왕 뚜 르 방은 도미닉 경에게 이 모습이야말로 자기 가장 완벽한 모습이라고 덧붙였다.
"최종 폼 같은 거죠."
"음."
도미닉 경은 마왕 뚜 르 방의 설명에도 꽤 석연찮은 표정을 지었지만, 가차랜드의 특성상 페이즈마다 모습이 변하는 건 충분히 있을 수 있기에 그러려니 했다.
"그나저나 뚜 르 방 당신이 여기에 있다는 말은..."
"네. 저도 5성 이상인 셈이죠."
"하지만 초상화 중에는 없었소."
"당연하죠. 제가 5성 이상이라고 했지, 5성이라고는 하지 않았잖아요."
"...!"
도미닉 경은 뚜 르 방의 말에 뚜 르 방이 적어도 초월급의 등급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허."
"그렇게 놀랄 필요는 없어요. 애초에 성급이 조금 이상하게 매겨진 상태여서 말이에요."
뚜 르 방은 자기 처지에 대해서 설명했다.
"기본적으로 가차랜드에 왔을 때부터 초월급이었지만, 너무 밸런스가 안 맞다는 이유로 힘을 좀 봉인당했거든요. 그래서 평상시에는 2성 정도의 힘과... 지능을 가지고 있죠."
뚜 르 방은 그렇게 말하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도미닉 경은 그런 뚜 르 방을 바라보았다.
뚜 르 방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상당히... 끔찍한 삶을 보내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보실 필요는 없어요. 사실, 예전의 삶보다는 2등신의 삶이 더 행복하니까요."
게다가 기억은 있어요. 오늘 제가 도미닉 경을 알아본 것처럼.
뚜 르 방은 도미닉 경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무엇보다, 가끔 이런 모임이 있을 때나 시스템의 허락이 있을 땐 힘과 지능... 그러니까 가차랜드 식으로 말하자면 스탯의 봉인이 풀리니까요. 바람 쐰다는 느낌으로 살면, 그다지 힘들 것도 없어요."
뚜 르 방은 도미닉 경을 향해 예의 바르게 말했다.
도미닉 경은 뚜 르 방이 마왕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음에도 매우 예의가 바른 것에 조금 놀랐다.
그런 도미닉 경의 표정을 보고 속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일까?
뚜 르 방은 도미닉 경에게 피식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건 어쩔 수 없어요. 아카데미 과정 중에는 예절과 도덕에 관한 과목도 있으니까 말이에요. 힘이 봉인 되었을 때 배운 것들이, 봉인이 풀려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거죠."
말 그대로 '교육당한' 셈이네요. 라고 뚜 르 방은 말했다.
"그렇구려."
도미닉 경은 뚜 르 방의 말에 의문이 풀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처음부터 초월급이었다는 말은, 5성 모임에도 자주 나온다는 소리요?"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아무래도 바람을 쐬러 나온다는 느낌으로 나오다 보니."
도미닉 경은 뚜 르 방의 말을 듣고는 마침 잘되었다는 듯 말했다.
"그렇다면 내게 5성 모임에 대한 것들을 알려줄 수 있겠소?"
도미닉 경이 뚜 르 방에게 부탁했다.
"나는 이런 곳이 처음이니, 조금이라도 정보를 모았으면 해서 말이오."
"...그렇군요."
뚜 르 방은 확실히 도미닉 경이 이 모임에는 처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해요."
그리고 도미닉 경에게 한 가지 제안을 건넸다.
"저랑 같이 다녀요."
"흠."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백 번 설명하는 것보다는 한 번 보고 설명을 듣는 것이 낫죠. 그러니까, 같이 다니면서 설명을 들으면 더 좋지 않겠어요?"
도미닉 경은 뚜 르 방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
가차랜드의 모든 것들은 설명으로 듣는 것보다 한 번 겪어보거나 확인하는 게 더 이해하기 편했으니까.
결국, 도미닉 경은 뚜 르 방의 제안을 수락했다.
"좋소."
"좋아요. 그럼 정보를 주는 대가를 좀 받아야겠네요."
"음?"
도미닉 경은 뚜 르 방의 말에 약간 당황했다.
"대가가 있소?"
도미닉 경의 목소리가 '나 당황했소.'라고 말하는 듯 살짝 떨렸다.
마왕 뚜 르 방은 그런 도미닉 경의 감정 상태를 알아차리고는 피식 웃었다.
"별 건 아니에요."
그렇게 말한 뚜 르 방은, 도미닉 경에게 한 가지 대가를 요구했다.
...
5성 모임이 열리고 있는 저택의 내부.
한 명의 남자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발걸음도 경쾌하게 테라스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도미닉 경에게 사위라고 불렀던 남자였는데, 아무래도 도미닉 경과의 대화를 위해 미리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서 차라도 한 잔 마시며 기다리면 되겠군."
"누굴 말이지?"
테라스에 도착한 남자는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황급히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거기엔 붉은 갑주를 입고 붉은 가면을 쓴 무사가 서 있었다.
"운류 무사시...!"
"누굴 기다리길래 그렇게 즐거운 듯 폴짝폴짝 뛰는 건가?"
도미닉 경을 사위라고 불렀던 남자는 이 상황이 당혹스러운 듯 식은 담을 흘리기 시작했다.
"자네가 왜 여기에 있지?"
남자가 운류 무사시를 향해 물었다.
"자네는 분명 오늘 오지 못한다고 했잖나. 여기에도 분명."
"노안이라도 온 건가?"
운류 무사시는 날카롭게 남자를 압박했다.
"그 메시지를 보낸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아내일 텐데 말이지."
"...!"
남자는 운류 무사시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휴대폰 메시지를 확인했다.
정말 운류 이치코가 보낸 문자였다.
[ 불참자는 이 아래로 적어 주세요. 대마법사 율리우스, 운류 가문의 운류...]
하필이면 운류 라는 성 앞에서 문자가 기가 막히게 끊긴 나머지 헷갈려서 일어난 일이었다.
"...어디까지 봤지?"
남자는 떨리는 호흡을 정리하고 운류 무사시에게 물었다.
"글쎄."
운류 무사시가 어깨를 으쓱했다.
"자네가 우리 도미닉 경에게 '사위'라고 하는 것까지 부터인가. 아마 그쯤일 걸세."
"...다 봤다는 소리구만."
남자는 운류 무사시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인 즉, 남자는 더 이상 운류 무사시를 속이기가 어렵다는 뜻이기도 했다.
결국, 남자는 운류 무사시가 하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렇게 온 건 무슨 이유가 있어서겠지?"
남자가 운류 무사시에게 말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운류 무사시가 작게 중얼거렸다.
무사시는 잠깐의 고민을 마치고 마침내 자기 목적을 말했다.
"도미닉 경에 대해서 찝쩍거리는 의도가 궁금해져서 말이야."
그렇다 말한 무사시는, 이미 소파에 쓰러지듯 주저앉은 남자의 반대편 소파에 앉았다.
"자, 그럼 말해 보게."
운류 무사시가 남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우리 사위에게 찝쩍거린 이유가 무엇인가?"
"하."
남자는 운류 무사시의 말에 살짝 비웃었다.
"아직 정식으로 사귀지도 않은 것 같은데, 너무 과하게 앞서 생각하는 것 아닌가?"
"...뭐?"
운류 무사시는 남자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이미 준비는 끝났어. 남은 건 내 딸의 용기 뿐이지."
"그러니까, 아직 우물쭈물한다고 도미닉 경과 친구 이상의 관계를 맺은 적은 없을 것 아닌가."
"..."
"확정되지 않은 것은, 언제나 결과가 바뀔 수 있지. 이번에도 그러네."
남자는 호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크게 웃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그런 오래묵은 윤리와 케케묵은 관습에 얽매이는 자가 아니지. 자네도 알지 않나."
그 말과 동시에, 남자의 분위기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두개골의 뾰족한 부분이 그의 살을 찢고 튀어나와 붉게 절여진 뿔들을 만들었다.
그의 몸에 숭숭 빳빳하고 거친 털이 잔뜩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덩치는 점점 더 커져 천장에 닿을 정도로 커졌다.
변신한 남자의 모습은 차마 운류 무사시가 한눈에 다 담기가 어려울 정도!
결국 운류 무사시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고야 말았다.
적어도 정체는 확인해야 했으니까.
"...덱스터 르 방!"
"그래, 친구."
덱스터 르 방이라고 불린 남자가 대답했다.
아니, 이젠 남자라고 부르기 어려운 괴물이 대답했다.
"자네의 친구이자 전 마왕, 덱스터 르 방일세."
아니, 괴물이 아니라 마왕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