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1화 〉 [450화]가면 무도회 후일담
* * *
"...그런 걸 가져서 뭐 하게?"
미네르바는 알록달록한 유리구슬이 가득 든 유리병을 경품으로 받은 미래의 도미니아 경에게 물었다.
두 사람은 근처의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실, 이거 어렸을 때 가지고 싶었거든."
"어릴 때 언제?"
"글쎄.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어릴 때."
도미니아 경은 그렇게 말하며 경품으로 받은 유리병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보통이라면 깨질지도 모르겠지만, 직원분께서 완충제를 아끼지 않고 써 주신 덕분에 아무리 흔들리거나 충격을 받아도 깨지지 않을 것 같았다.
"사실, 정확하게는 기억이 안 나지만..."
도미니아 경이 과거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랑 축제를 간 적이 있었거든. 아마 이 정도로 화려한 축제였던 것 같아. 할아버지가 맛있는 것도 마구 사주고, 예쁜 것도 마구 보여주고 그랬지."
도미니아 경의 눈이 아련해졌다.
아주 아름다웠던 과거를 회상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알록달록한 유리구슬들로 가득한 유리병이 눈에 밟히더라고. 어린 마음에도 가지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찰 만큼 아름다웠던 것 같아."
도미니아 경은 다시 가방에서 유리병을 꺼냈다.
알록달록한 유리구슬이 가득 들어 있는 유리 병은, 축제의 밝은 조명들의 빛을 반사시키며 은은하지만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땐 왜 이런 걸 가지고 싶어 했던 걸까?"
"뭐, 어릴 때니까."
미네르바가 도미니아 경에게 대답했다.
"그나저나 어릴 때 가지고 싶었다는 말은, 결국 가지지 못한 거야?"
"응."
도미니아 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할아버지가 이걸 구하시려고 고생하시는 도중에, 내가 자버리고 말았거든. 그리고 이튿날 바로 깜빡 잊어버리고 말았지 뭐야."
도미니아 경은 그렇게 말한 후 피식 웃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이 유리구슬이 가득한 유리병을 구하셨는지, 아니면 구하지 못하셨는지도 모르겠어. 혹시 모르지. 할아버지 집 창고에 이거랑 똑같은 것이 하나 있을지도."
도미니아 경은 다시 한번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이번 한숨은 답답함이나 부정적인 형태의 한숨은 아니었다.
그저 대화의 화제를 바꾸기 위한 분위기 환기용 한숨이었다.
"그나저나 삼촌이랑 메리는 어디 갔어?"
"너희 삼촌은 메리 달래러 갔어."
"달래?"
"메리가 가장 먼저 죽었잖아. 그게 너무 억울해서 울고 있었나 봐."
"아하."
도미니아 경은 미네르바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메리는 은근히 승부욕이 강한 녀석이었으니, 처음으로 탈락했다는 충격에 울 법도 했다.
"이럴 때 보면 아직 애라니까."
도미니아 경은 그렇게 말하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뭐야, 왜 일어나?"
"메리 만나러 가게."
도미니아 경은 미네르바의 말에 그렇게 답했다.
"왜?"
미네르바는 괜히 울고 있을 메리를 만나러 가려는 도미니아 경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도미니아 경은 그런 미네르바의 궁금증을 풀어 주려는 듯, 사악하게 씨익 웃으며 미네르바에게 말했다.
"1등 했으니, 꼴찌 놀리러 가야지."
미네르바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눈으로 도미니아 경을 쳐다보았다.
도미니아 경은 그런 미네르바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메리가 있을 곳으로 폴짝폴짝 뛰며 걸음을 옮겼다.
"...아직 애라니까."
미네르바는 그런 도미니카 경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며 따라갔다.
싸움이 나기 전에 말릴 사람이 하나라도 더 필요할 것 같았으니까.
...
도미닉 경은 집에 도착해서 도미니아 경과 유리병을 내려놓은 다음에야 전화기에 불이 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수백의 부재중 통화와 수천의 읽지 않은 메시지.
몇몇 메시지는 광고성 메시지나 스팸성 메시지였지만, 대부분은 도미니카 경과 앨리스 백작 영애에게서 온 것이었다.
도미닉 경은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다시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
["야! 너 왜 전화를 안 받아?"]
도미닉 경은 순간 수화기 너머에서 들린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귀를 틀어막았다.
앨리스 백작 영애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오, 주군? 무슨 일로 이렇게 전화를"
["무슨 일? 무슨 일? 지금 어디야?"]
"...집이오."
["뭐야. 난 축제라면서 일부러 밖에 끌고 나갔으면서, 넌 왜 안에 있어? 응? 왜 안에 있냐고오!"]
도미닉 경은 문득 앨리스 백작 영애의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혹시 옆에 도미니카 경이 있소?"
["있다! 왜?"]
"잠시 바꿔줄 수 있겠소?"
["아, 그래. 내 목소리가 듣기 싫다 이거지? 하! 자! 바꿔줄게! 도미니카 경! 받아!"]
도미닉 경은 잠시 후, 도미니카 경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여긴 도미니카 경, 오버."]
"도대체 무슨 일이오?"
["무슨 일은. 술 마신 거야."]
"술을...?"
도미닉 경은 도대체 술을 얼마나 마셨길래 저렇게 예민해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차마 얼마나 마셨는지 물어보기가 껄끄러웠다.
그런 도미닉 경의 마음을 아는 듯, 도미니카 경이 도미닉 경의 의문을 풀어 주었다.
["잠깐만. 저기, 여기 얼마나 마셨나요? 네? 10갤런이요? 세상에."]
"얼마나 마신 거요?"
["10갤런이래. 잠깐만, 10갤런이면... 약 38리터네. 일반인이면 마시면서 싸도 죽을 정도겠어. "]
도미니카 경은 그 짧은 사이에 검색을 통해 단위를 변환시켜 도미닉 경에게 알려주었다.
도미닉 경은 도미니카 경의 말에 눈만 끔벅거렸다.
"확실히 그 정도 마시면 저렇게 인사불성이 될 수도 있겠구려."
["쓰러지지 않은 게 대단한 거 아닐까?"]
그때, 도미닉 경은 수화기 너머에서 누군가가 아직 멀쩡하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을 들었다.
아마 앨리스 백작 영애이리라.
"술은 왜 마시게 된 거요?"
도미닉 경은 앨리스 백작 영애가 저렇게나 술을 마신 것보다, 왜 술을 마시게 되었는지가 더 궁금해졌다.
["처음은 그냥 시음 정도였어."]
도미니카 경은 도미닉 경의 말에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
방금 전, 도미니카 경과 앨리스 백작 영애는 미니게임을 끝내고 거리로 나왔다.
"아쉽게 공동 3등이네."
앨리스 백작 영애가 도미니카 경 대신 아까워했다.
"그 애송이 녀석, 운이 좋군."
앨리스 백작 영애는 관전을 통해 도미니카 경이 싸우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도미니카 경과 대치하고 있던 흰 머리의 여성도 볼 수 있었다.
"그 녀석, 어째서인지 낯이 익어보였는데 말이야."
"글쎄. 확실히 그런 느낌이긴 했지."
도미니카 경과 앨리스 백작 영애는 왠지 모르게 익숙했던 하얀 머리의 여성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와 비슷한지 생각해보려고 했지만, 둘은 도저히 하얀 머리의 여성과 비슷한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아, 모르겠다. 아무튼 재밌게 즐겼으니 됐어."
앨리스 백작 영애가 기지개를 켜며 그렇게 말했다.
"자! 저희 와인을 시음해 보고 가세요! 축제 기간 동안 시음이 무료입니다, 무료!"
"음?"
그때, 도미니카 경과 앨리스 백작 영애는 어디선가 호객 행위를 하는 소리를 들었다.
"방금 전에 와인 시음이라고 하지 않았어?"
앨리스 백작 영애가 도미니카 경에게 되물었다.
도미니카 경이 그렇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앨리스 백작 영애가 도미니카 경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시음 좀 하고 갈까?"
앨리스 백작 영애는 그렇게 말하며 초롱초롱한 눈으로 도미니카 경을 바라보았다.
도미니카 경은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앨리스 백작 영애의 눈을 보고는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앨리스 백작 영애가 저런 눈을 하고 있을 때엔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같이 살고 있기에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조금만."
도미니카 경의 말에 앨리스 백작 영애의 표정이 환해졌다.
앨리스 백작 영애는 시음을 하는 곳에서 한 잔을 얻어 마셨다.
"맛있네. 한 잔 더 마시고 싶어."
"얼마든지 좋습니다! 마음껏 드시지요!"
그렇게 말한 직원이 앨리스 백작 영애에게 또 한 잔을 주었다.
"세상에. 이렇게나 술술 들어가다니."
앨리스 백작 영애는 계속해서 와인을 받아 마셨고, 직원은 앨리스 백작 영애가 잘 마시니 신이 나서 계속해서 와인을 제공했다.
어차피 와인은 많았고, 시음용 와인이 남아버리면 식초처럼 시큼해져 상품가치가 떨어지니 버려야 했다.
직원의 처지에서는 이렇게라도 처리하는 것이 훨씬 나았던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많은 와인을 마셨을까?
아마 작은 오크 통 하나 정도는 마셨던 것 같다.
그 정도로 마시자, 앨리스 백작 영애는 갑자기 훌쩍거리거나, 히히 웃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취한 것 같았다.
그러고는, 갑자기 전화기를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왜 안 받지..."
그러고는, 도미닉 경이 받을 때까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받지 않는다는 사실에 화가 났는지 문자도 보내면서 말이다.
도미니카 경은 어련히 도미닉 경이 일찍 받겠거니 하며 잠시 내버려 뒀었다.
하지만 도미닉 경은 한참 동안이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에 너무나도 화가 난 앨리스 백작 영애는 추가로 술을 시켰고, 술을 죽죽 마셔가며 누가 이기나 보자며 도미닉 경에게 계속해서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도미닉 경이 전화를 받은 그 순간이 바로 지금이었다.
...
["나쁜 놈... 나아쁜 놈... 전화 정도는 좀 받아줘도 되잖아... 그동안 보지 못했으니까, 이럴 때 목소리라도 좀 더 들려줘도 되잖아..."]
"..."
수화기 너머에서 앨리스 백작 영애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우지끈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요?"
도미닉 경이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별 건 아니야. 그냥 만취해서 쓰러진 것뿐이야."]
도미니카 경이 앨리스의 상태를 보며 혀를 쯧하고 찼다.
["오늘 축제를 더 즐기기는 어렵겠네. 그냥 집에 가야겠어."]
"뭐 준비라도 해야 할 것 있소?"
["없어. 아. 스튜라도 좀 만들어 줄래? 아무래도 일어나면 숙취가 좀 심할 것 같아서 말이야. 나 말고 앨리스가."]
"알겠소."
도미닉 경은 도미니카 경의 말을 듣고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일 바로 먹을 수 있도록 스튜를 끓이기 시작했다.
"그, 내가 어제 기억이 없거든? 뭐 특별한 일이라던가 하지 않았지?"
이튿날 아침, 앨리스 백작 영애는 술 기운 때문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스튜를 먹으며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에게 어제 일을 물었다.
그리고 쓸데없이 정직한 도미닉 경은, 앨리스 백작 영애에게 어제 있었던 일을 모두 말하고 말았다.
그날, 앨리스가 다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뻥뻥 찼다는 사실은,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