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7화 〉 [436화]심사
* * *
"놀랍군요."
도미닉 경을 내려다보는 여섯 존재 중 하나가 말했다.
그는 동그란 원으로 된 존재였는데, 그 원들은 뱅글뱅글 돌아가며 마치 눈처럼 도미닉 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흥미로워."
또 다른 존재가 도미닉 경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펜과 종이와 글씨로 이루어진 것이었는데, 그 종이의 높이가 웬만한 건물보다 높았고, 글씨는 웬만한 개미보다 작고 빼곡했으며, 펜은 평범했다.
"어떻게 해결하긴 했네."
정확하게 정해진 모습이 없이 번져가는 색깔로 이루어진 존재가 말했다.
그 색깔은 마치 우주와도 같아 보는 이로 하여금 알 수 없는 경외감에 쌓이게 만들었다.
"누구 때문에 다 망칠 뻔했는데 말이야."
"해결했으면 되었지. 예아."
번져나가는 색깔 위로 눈으로 보이는 음악이 지나쳤다.
악보가 보인다는 뜻은 아니었다.
눈으로 읽는 순간, 귀가 음악을 들은 것처럼 반응한다는 소리였다.
"오랜만이네."
도미닉 경은 낡은 셔츠에 엉망인 모습의 거인 여성을 바라보았다.
도미닉 경은 문득 그녀를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었다.
약간 살이 찌기는 했지만, 그녀는 이전에 과거를 바꾸었을 적, 서버실에서 만난 적이 있는 관리자 코더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과거를 바꾸는 검으로 서버실에 들어간 적이 있었던 바로 그때 만났던 코더였다.
"맙소사."
도미닉 경은 그녀의 존재를 알아보고는 깜짝 놀랐다.
도대체 왜 그녀가 여기에, 그것도 저 초월자들처럼 보이는 이들 사이에 있다는 말인가?
도미닉 경이 얼마나 그 사실에 놀랐는지, 말문이 트인 것도 깨닫지 못할 정도였다.
"어서 오세요, 도미닉 경. 시험들을 통과한 것을 축하드립니다."
도미닉 경은 이곳에 존재하는 여섯 존재 중 마지막 존재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거대한 하얀 상자처럼 보였는데, 가운데에는 거대한 붉은 보석처럼 보이는 것이 박혀 있었다.
"중앙 시스템으로서 가끔 보긴 했습니다만, 이런 모습으로는 처음이군요."
"중앙 시스템!"
도미닉 경은 깜짝 놀라 다시 한번 중앙 시스템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뭔가 가차랜드를 관리하는 자의 품격 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중앙 시스템이라니, 도대체 무슨..."
"저희는 배심원입니다. 도미닉 경의 5성 심사를 위해 차출된 인원이지요."
도미닉 경은 그제야 왜 5성 인원이 그토록 적었는지 알 것 같았다.
이런 초월자들의 회동이라면, 그리 쉽게 움직일 수는 없었겠지.
심사의 심사를 거친 이후에야 이들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만큼 눈앞에 보이는 이들 하나하나의 모습은 성좌보다도 더 뛰어났고, 가차랜드에 존재하는 그 어떤 놀라움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해 보였다.
"이제 도미닉 경은 나머지 시험을 모두 통과하고, 이제 마지막 시험을 남기고 있습니다."
"마지막 시험?"
"그렇습니다."
중앙 시스템은 그 특유의 서늘한 붉은 눈으로 도미닉 경을 내려다보았다.
"그리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지금까지의 시험을 통해 저희가 도미닉 경을 합격시킬지 말지를 결정하는 일이니까요."
"음?"
"시험은 당신의 기본을 보는 것이었습니다만, 이제 면접을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도미닉 경은 중앙 시스템의 말에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봐도 좋소."
"좋습니다. 그 전에 잠시..."
중앙 시스템은 도미닉 경의 말을 듣고는, 잠시 도미닉 경과 자기들 사이를 거대한 벽으로 가려놓았다.
"잠시 거기서 좀 기다려주시길 바랍니다."
중앙 시스템은 그렇게 말한 뒤, 잠깐 말이 없었다.
도미닉 경은 중앙 시스템의 말에 잠깐 기다리기로 하며 근처에 중앙 시스템이 만들어 준 푹신한 의자에 앉았다.
...
잠시 후, 도미닉 경과 배심원들 사이를 가르고 있던 벽이 사라졌다.
도미닉 경은 다시금 고개를 들어 배심원들을 바라보았다.
"...? 하나가 사라진 기분이 드는구려."
"기분 탓은 아닙니다."
중앙 시스템이 도미닉 경에게 말했다.
"원래 배심원은 홀수로 구성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한 명을 뺀 것뿐입니다."
도미닉 경은 주변을 둘러보며 눈에 보이는 음악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 면접을 볼 준비가 다 끝났다는 거요?"
"그렇습니다."
중앙 시스템이 그렇게 말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형식적인 거지만 말입니다."
동그라미로 가득한 존재가 말했다.
"자, 그럼 저희 운영 팀부터 할까요?"
"심사자 앞에서는 말을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아, 네."
그렇게 말한 동그라미가 가득한 존재가 앞으로 나섰다.
그에게는 한 발자국이었을지 모르지만, 도미닉 경에게 있어서는 마치 거대한 절벽이 도미닉 경을 짓누르려 달려오는 것처럼 보였다.
"제가 당신에게 할 것은 별것 아닙니다."
그렇게 말한 동그라미로 가득한 존재는 도미닉 경에게 엄숙한 얼굴로 물었다.
"여기 당신의 인적 사항을 적어 주시길 바랍니다."
"...?"
도미닉 경은 동그라미로 가득한 존재에게서 한 종이를 받았다.
그곳에는 도미닉 경의 이름과 나이, 성별, 키와 몸무게, 주민등록번호를 적어야 하는 칸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필수적으로 적어야 하는 칸은 이름과 주소, 그리고 전화번호였다.
"...이게 다 뭐요?"
"아, 5성 등록을 위한 개인 확인 작업입니다. 저희가 가진 정보와 맞는지 확인해야 하니까요."
전에 대리로 5성 등록을 하려고 했던 괘씸한 녀석이 있어서 말입니다. 라고 동그라미로 된 존재가 말했다.
"물론, 이번 심사가 끝나면 이 정보는 폐기되니 안심하시길 바랍니다."
도미닉 경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정보를 빼곡히 채워나갔다.
도미닉 경이 건넨 정보를 받아 든 동그라미로 가득한 존재는 이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음 사람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이번엔 빽빽한 글씨로 채워진 거대한 종이가 나섰다.
그 종이는 도미닉 경에게 펜과 종이를 건네주며 말했다.
"넌 로봇인가?"
"...?"
도미닉 경은 아니오에 체크를 했다.
"개량된 안드로이드를 통해 대신 5성을 받으려는 얌체가 있어서 말이지. 이건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고."
도미닉 경은 거대한 종이의 말을 미심쩍게 들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심사의 공신성을 위해 엄격하게 심사하겠다는데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로봇이 아니라고 체크된 종이를 들고 자리로 돌아간 거대한 종이 다음으로, 번져나가는 색깔이 앞으로 나섰다.
도미닉 경은 여기서 잠시 멀미가 나는 것 같았다.
마치 우주에 뛰어든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번져나가는 색깔이 한 말은, 우주처럼 광활하거나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횡단보도가 있는 것만 골라."
"...이것과 이것, 이것, 이것이오."
도미닉 경은 가로로 네 칸, 세로로 네 칸, 총 열여섯 칸으로 된 정사각형의 사진에서 횡단보도가 있는 부분만 골라 가리켰다.
그러나 번져나가는 색깔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다시 한번 다른 사진을 가지고 물었다.
"여기서 소방차가 있는 곳만 골라."
"...?"
도미닉 경은 도대체 왜 다시 다른 사진으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했지만, 번져나가는 색깔이 원하는 대로 소방차가 있는 곳만 골랐다.
그러자 그제야 번져나가는 색깔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로 돌아갔다.
마지막으로 나온 것은 거대한 코더였다.
그는 도미닉 경을 내려다보더니, 이내 눈높이를 맞추려는 듯 허리를 굽히고 도미닉 경을 바라보았다.
"내가 내려는 건 좀 간단해. 이건 그다지 어려운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러더니, 코더는 주머니에서 거대한 핸드폰을 꺼내어 무언가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됐다."
"?"
도미닉 경은 도대체 무엇이 되었는지 궁금해 고개를 갸웃했으나,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도미닉 경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한 번 울렸기 때문이다.
"이제 거기에 적힌 숫자 좀 읽어 줄래?"
코더가 도미닉 경에게 부탁했다.
도미닉 경은 코더의 말을 듣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어째서인지 권외 표시가 떠 있었지만, 문자는 제대로 도미닉 경에게 수신된 상태였다.
"877683이오."
"다시 한번 불러줘. 이오는 빼고."
"877683."
"좋아. 잠시 다음으로 넘어가서, 하나만 더 해줄래?"
그렇게 말한 코더는 눈앞에 특이한 문자를 띄웠다.
"다음 글자를 제대로 적기만 하면 돼."
[㉿®@⒳]
도미닉 경은 코더에게서 네 글자로 된 문자표를 받았고, 그대로 KRAX라고 적었다.
그제야 코더는 만족한 듯 몸을 돌려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제 마지막 하나만 남았군요."
도미닉 경은 마지막이라고 말하는 중앙 시스템을 올려다보았다.
중앙시스템은 매우 엄숙한 분위기로 도미닉 경을 내려다보더니, 바로 이렇게 말했다.
"다음 약관에 동의하시겠습니까?"
도미닉 경은 중앙 시스템이 건넨 약관 뭉치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약 100페이지에 달하는 엄청난 두께의 서류였다.
"만일 원하시지 않는다면 동의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불이익은 없으니까요."
중앙 시스템은 도미닉 경에게 그렇게 말했으나, 도미닉 경은 일단 약관을 확인해 보고 나서 결정하고 싶었다.
약관은 그다지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도미닉 경의 정보를 공개할 것인지, 안 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었으니까.
도미닉 경은 명예와 명성 때문에라도 정보를 공개할 예정이었기에 예를 눌렀다.
"약관 동의에 필요한 시간이 지났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아이고, 처음부터 다시입니까? 에휴. 자, 도미닉 경. 여기에 정보를 기입해 주시고..."
그 와중에 약간의 해프닝이 있기는 했지만...
도미닉 경은 이렇게, 5성 심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