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3화 〉 [432화]배심원들
* * *
미스터 노바가 도미닉 경을 데리러 간 그 시각.
가차랜드가 내려다보이는 어떠한 공간에서, 한 여성이 의자에 앉아 가차랜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마른 몸매에 깐깐한 표정을 지은 흰 머리의 여성이었는데, 흉흉하게 빛나는 붉은 눈이 인상적이었다.
"배심원들은 모두 준비되었습니까?"
"글쎄."
그런 여성이 앉은 의자의 뒤로 담배를 피는 여성이 나타났다.
그녀는 녹색의 머리카락과 보라색의 네일아트를 한 여성이었으며 페인트가 묻은, 마치 우비와도 같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림자 진 곳에 서 있자 그녀의 머리카락과 손톱, 그리고 옷에 묻은 페인트들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모든 것이 형광인 모양이었다.
형광색의 여성이 붉은 눈의 여성에게 말했다.
"일단 그래픽 팀은 준비되었어."
"스토리 팀도 마찬가지."
그 말과 함께 온몸에 덕지덕지 양피지를 붙여놓아 드레스처럼 입은 남성이 나타났다.
그는 얼굴의 절반을 양피지 들로 가리고 있었는데, 반대편에 드러난 검은 머리에선 잉크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가 지나가는 길마다 잉크로 적힌 글씨가 발자국처럼 새겨졌는데, 그의 뒤에는 거대한 수정펜을 든 기계 시종들이 그의 발자국을 지워주고 있었다.
"운영팀과 SFX팀은요?"
"운영팀은 조금 늦는다고 전화가 왔어. 이번 프로모션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야. SFX팀은... 글쎄. 또 어디 파티라도 가 있지 않을까?"
스토리 팀에서 나온 남자가 붉은 눈의 여성에게 대답했다.
"고작 세 명이 전부라는 말인가? 붉은 눈의 여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다른 이들로 부터 위임장을 미리 받아 뒀다는 점일까."
"스토리 팀."
"이크. 미안. 직업병이라."
스토리 팀에서 나온 남자는 마치 나레이터처럼 붉은 눈의 여성의 심정을 글로 표현했다.
"미안. 늦었습니다. 아무래도 이번에 메신저와 연계해서 이벤트 하려던 게 문제가 생겨서 말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운영 팀에서도 사람이 왔다. 그렇다는 말은, 이번에 심사를 위한 배심원 5명 중 4명이 도착했다는 뜻이었다. 과반수는 진즉에 넘겼지만, 그래도 명분 상 배심원은 무조건 5명이어야만 했다."
"...스토리 팀!"
"아, 미안."
...스토리 팀은 아무래도 내 밥줄을 끊어가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무튼, 운영 팀에서 온 사람은 상당히 살이 퉁퉁하게 찐 남자였다.
그는 모든 것이 동글동글한 남자였는데, 눈도 축 처져 둥글둥글 순했고, 코도 동글동글해 마치 호빵과 같았으며 입은 늘 웃는 상이라 광대와 턱에 동그라미가 세 개 있는 듯한 사람이었다.
그는 심지어 동그란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인상이 더욱 동글동글해 보였다.
다른 이들에 비해선 너무나도 평범한, 오히려 그래서 더욱 눈에 띄는 남자.
어떻게 보면 운영을 잘할 수 있을지 걱정되는 몸매였지만, 적어도 가차랜드를 운영하기엔 이 만한 적임자가 없었다.
"그나저나, 남은 하나는 누구지요?"
운영 팀에서 온 사내가 붉은 눈의 여성에게 물었다.
"저도 급하게 오느라, 오늘 배심원들에 대해서 듣지 못해서 말입니다. 보아하니 그래픽, 스토리, 운영, 그리고..."
"SFX 팀입니다. 오늘은."
"아, 하긴. 오늘 그 사람이 비번이긴 하지요."
붉은 눈의 여성의 말에 운영 팀에서 온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사람은 오늘 비번이라면서 술 마시고 파티나 즐기고 있을 텐데요."
운영 팀에서 온 사내는 SFX팀에서 올 사내를 잘 알았다.
그는 사내에서 가장 자유분방한 사람이었다.
예술적인 감각을 위해선 감각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이상한 지론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실력 하나는 확실해 누가 뭐라고 하지는 못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SFX팀에서 올 사람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SFX 팀 말고 다른 팀을 부르면 어떻습니까? EFX팀이라던가, 디자인 팀이라던가, 그마저 힘들면 고객 대응 팀이라던가..."
"...그들은 저번에 한 번 했으니까요. 무엇보다 SFX 팀은 쉰다는 핑계로 이미 두 번이나 배심원의 의무를 빠졌습니다."
"아, 저런."
붉은 눈의 여성은 배심원의 의무를 말했다.
"이는 사내에 존재하는 모든 팀은 반드시 배심원으로서 호출되었을 때 배심원으로서 참석해야 하는 의무였다. 물론, 배심원으로 호출 당해도 두 번까지는 거절할 수 있지만, 세 번은 안 되었다. 세 번이면 중앙 시스템에 의해 감봉이나 근신 등의 처벌을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스토리 팀?"
"아, 어쩔 수 없다니까. 하도 설정을 짜다 보니 입으로 중얼거리는 게 습관이 되어서 그래."
그렇게 말한 스토리 팀에서 온 이는 기계 시종을 시켜 땅바닥에 끄적거려놓은 것들을 지웠다.
그 난리통에 그가 입고 있던 양피지 일부가 지워졌으나, 스토리 팀에서 온 남자는 만년필을 꺼내 머리에 푹 꽃더니 다시금 양피지를 그려 나갔다.
그러자 다시금 온갖 설정이 적힌 양피지가 수복되었다.
애초에 저 양피지들은 그가 머릿속에 담아둔 온갖 설정이었다.
가차랜드의 수 년, 수십 년, 혹은 수십만 년과 함께 한 설정인 만큼, 스토리 팀은 그 방대한 기억을 모조리 머릿속에 저장해 두고 있었다.
"아, 그런 건 그래픽 팀에게 부탁하라고 했잖아."
형광색으로 빛나는 여성이 스토리 팀의 양피지 남성에게 투덜거렸다.
"요즘엔 글도 그림도 같이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니까. 진짜 나 같은 전공자들은 어떻게 살라는 말인지."
그래픽 팀의 여성은 투덜대면서 스토리 팀이 그려 낸 양피지에 무언가를 덕지덕지 발랐다.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무언가를 덕지덕지 바르자, 양피지는 그저 그려진 그림과도 같은 모습에서 현실성을 가지고 펄럭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일 두 번 하지 않게 좀 도우려는 의도였지."
"어설프게 고치면 일 세 번 하니까 그냥 하지 말라는 소리야."
"자, 자. 투닥거리지 마시고."
그래픽 팀과 스토리 팀이 투닥거리기 시작하자, 운영 팀에서 온 동글동글한 남자가 한 손에는 전화기를 든 채 둘을 만류했다.
"둘 다 가차랜드에 중요한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니까..."
...뚝.
["...왜요."]
그때, 운영 팀에서 온 남자의 휴대폰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금 전까지 남자의 손에 전화기가 들려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그는 다른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던 모양이다.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퉁명스럽게 운영 팀의 전화를 받았다.
"아, 별 건 아니고, SFX팀이 튀어서 말입니다. 혹시 대타로 좀 뛸 수 없을까 해서요."
["..."]
운영 팀의 남자가 말했음에도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대신 그곳에는 캔과 병이 부딪치는 소리만이 들렸는데, 아무래도 건너편에는 엄청난 양의 캔과 병이 있는 모양이었다.
["잠시만요."]
반대편에서 캔을 따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벌컥벌컥 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푸하. 이제 살 것 같네. 그러니까... 뭐라구요?"]
"사운드 이펙트 팀이 튀어서, 대타를 좀 부탁하려고 말입니다."
["..."]
"그, 고생하신 만큼 보답은 하겠습니다."
운영 팀장은 어떻게든 반대편에 있는 이를 설득하려고 저자세로 나갔다.
["저 지금 283일 째 야근 도장 찍히고 있는 거 알고 그런 말 하시는 거죠?"]
"...네."
["심지어 원래는 577일 째 야근일 뻔한 거, 중간에 휴가랍시고 하루 쉬는 바람에 283일 인 거 아시죠?"]
"..."
["그 하루 마저도 서버 터졌다고 전화하는 바람에, 잠 조차 제대로 자지 못했다는 사실을 아시죠?"]
"그..."
["그 뭐고 자시고 감히 그걸 알면서 내게 배심원 대타를 신청해요? 감히 내게!"]
와장창. 하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캔 사이로 병이 날아가 깨지는 소리, 캔이 찢어지는 소리, 무언가 키보드 같은 것이 박살 나는 소리, 마우스가 벽에 부딪치는 소리...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조금 있다가 도미닉 경이 올 겁니다. 그때까지 배심원 5명을 다 채워야 하는데..."
["4성 쯤일 거잖아요. 그럼 중앙 시스템과 미스터 노바 시켜요. 뭘 우리가 직접 본다고."]
"...5성입니다."
["..."]
운영 팀의 말에 반대편에서 한숨이 들려왔다.
5성 심사를 위해선, 반드시 배심원 5명이 필요하다.
정말, 정말 다급한 상황이나 중앙 시스템 혼자 독단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일에나 위임장이 발동되는 법이었지, 이처럼 중요한 일에는 위임장이고 뭐고 반드시 5명의 배심원이 모두 있어야만 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운영 팀의 남자에게 말했다.
["하아... 알겠어요. 10분 이내로 거기로 갈 테니까, 보상이나 제대로 준비해 줘요."]
"좋습니다. 혹시 원하는 거라도 있으신지...?"
운영 팀의 남자는 너무나도 고마운 마음에 과할 정도로 저자세로 나왔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 있던 사람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말했다.
["도미니카 경 굿즈. 저번에 그 비매품."]
그렇게 말한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
운영팀의 남자는 그 정도는 자기가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나머지 배심원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마지막 5번째 배심원이, 마침내 채워진 것 같군요."
그 말에 붉은 눈의 여성은 다시 한번 말없이 가차랜드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남은 건, 도미닉 경이 올라오는 일 뿐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