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3화 〉 [392화]굴려라, 도미닉 경!
* * *
길고 어두운 통로를 지나치자, 그곳은 어둠 속이었다.
도미닉 경은 엄청난 속도로 바닥에 낙하했으나, 다행스럽게도 도미닉 경은 둥글둥글 말랑말랑했기에 통통 튀며 안전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안전하게 바닥에 착지한 도미닉 경은 가장 먼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어디지?"
도미닉 경은 이곳이 너무나도 어두워 주변을 전혀 구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도미닉 경은, 이런 곳을 한 군데 알고 있었다.
"여긴 글리치 부르크인가?"
도미닉 경은 여기가 글리치 부르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굴이 어두워졌다.
저번에 글리치 부르크에서 겪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이내 여기가 글리치 부르크와는 다른 공간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갑자기 도미닉 경의 눈앞에 불빛이 번쩍이더니, 사각형의 빛무리 위에 무언가 알 수 없는 글자가 떠오른 것이다.
도미닉 경은 그 갑작스러운 불빛에 놀라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으나, 이미 눈에 잔상이 남아 시야가 가려졌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다행스럽게도 이 모든 건 일시적인 현상이었기에 도미닉 경의 시야는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도미닉 경은 눈앞에 떠오른 사각형의 빛무리, 그리고 그 빛무리 가운데에 떠오른 글자를 바라보았다.
그 글자는 's2q'라고 적혀 있었는데, 이 모든 현상은 도미닉 경이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도미닉 경은 빛무리가 주변을 밝히자, 그제야 이곳이 어떻게 생긴 곳인지를 알아차렸다.
이곳은, 어째서인지 각진 것들로 가득 찬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제대로 둥근 것은 도미닉 경 밖에 없었다.
도미닉 경은 도대체 여기가 어디인지 확인하려고 바닥에 발을 짚었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어째서인지 걸어 다닐 수가 없었다.
바닥이 도미닉 경의 발바닥에 붙어 버렸으니까.
"이게 무슨...?"
"아, 찾았다."
도미닉 경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방금 전 빛무리가 있었던 사각형의 공간 너머에 거대한 아임 낫 리틀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임 낫 리틀 공?"
"도미닉 경! 여기 계셨네요!"
아임 낫 리틀은 마침내 찾았다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붉은 장미의 거인이 저주를 걸어 도미닉 경이 근처에 있던 콘솔에 들어가 버렸어요. 저주와 악담만큼은 인정할 만하다고 생각했지만, 설마 도미닉 경의 저항력을 뚫을 줄은..."
아임 낫 리틀은 대비하지 못한 자기 잘못이라며 자책했다.
그러나 도미닉 경이 알고 싶은 건 아임 낫 리틀의 자책이 아니라, 지금의 상황이었다.
도미닉 경은 지금의 상황에 대해 아임 낫 리틀에게 물었다.
"지금 내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 거요? 무엇보다, 내가 왜 지금 걸을 수 없는 거요?"
"도미닉 경은 정확하게는 콘솔 게임기, 그중에서도 안에 설치된 게임 중 하나에 있어요. 그리고 걷는 문제는... 아마 그 게임의 게임성 때문일 거예요."
그렇게 말한 아임 낫 리틀은 도미닉 경에게 굴러 볼 것을 권유했다.
"도미닉 경. 혹시 구를 수는 있겠어요?"
"해 보겠소."
도미닉 경은 아임 낫 리틀의 말대로 이리저리 굴렀다.
그제야 땅에서 발이 떨어지며 데굴데굴 구를 수 있게 된 도미닉 경.
"되오."
"그러네요. 심지어 게임 기믹까지 바로 알 수 있겠어요."
"기믹?"
도미닉 경은 아임 낫 리틀의 말에 의문을 표하며 자기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도미닉 경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도미닉 경의 손과 팔, 그리고 여기저기에 무언가가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도미닉 경, 잘 들어요."
아임 낫 리틀은 도미닉 경에게 이 게임의 정확한 기믹을 알려주었다.
"이 게임은 일정 시간 안에 동그란 물체에 이것저것을 붙여 일정 크기 이상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인 게임이에요."
"일정 크기 이상으로 만든다?"
"네. 도미닉 경의 몸을 보면, 지금, 이것저것이 붙어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으실 거예요. 그리고 그것들은 도미닉 경보다 작은 물건들이죠. 도미닉 경은 그 물건들을 붙여나가며 점점 더 덩치를 불리고, 불린 덩치로 더 큰물건들을 붙여나가며 더 덩치를 불려 나가는 거예요."
"아, 이해했소."
도미닉 경은 아임 낫 리틀의 말에 이 게임의 목적을 확실히 알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곳에서 빠져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오?"
"음... 일단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두 가지?"
"첫 번째는 레트로 그라드 시립 도서관에 가서 게임 잡지를 뒤져 공략집을 찾는 거예요. 운이 좋다면, 한 달 내로 찾아낼 수 있겠죠."
"그럼 두 번째는 뭐요?"
"두 번째는, 그냥 해 보는 거예요. 어차피 이 게임은 캐주얼하게 만들어진 것 같으니, 공략이 따로 필요 없어 보이니까요."
"그럼 후자를 고르겠소."
도미닉 경은 아임 낫 리틀의 말에 일말의 고민도 없이 후자를 골랐다.
"그럴 줄 알았어요. 이 게임의 조작은 간단해요. 그냥 구르기만 하세요. 구르고 굴러 덩치를 키운 뒤, 또 구르고 구르는 게임이에요."
"알겠소."
도미닉 경은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땅바닥을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
시작은 각진 모양의 개미나 풍뎅이, 혹은 별사탕이나 레고 같은 물건들이었다.
그것들은 도미닉 경의 몸에 붙어 마구 몸부림치거나 도미닉 경을 아프게 했지만, 도미닉 경은 강인한 전사였기에 그런 고통쯤은 감수하고 움직일 수 있었다.
한 번의 성장이 있고 난 뒤, 도미닉 경은 다음 물건들을 몸에 붙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과자나 벽돌과 같은 꽤 커다란 물건들이었다.
또 한 번의 성장이 있고 나자, 이제 도미닉 경은 어째서인지 길 가에 떨어져 있던 슬레이트 판이나 키가 작은 나무, 작은 바위나 세발 자전거 따위를 몸에 붙일 수 있었다.
세 번째 성장 이후에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NPC들이나 담벼락, 키가 큰 나무, 강아지나 오리 등을 몸에 붙일 수 있었고, 네 번째 성장 이후에는 자동차나 북극곰 같은 덩치 큰 것들을 붙일 수 있었다.
그리고... 도미닉 경의 첫 도전은 거기서 끝나고 말았다.
"이거 참 어렵구려."
도미닉 경이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지금의 도미닉 경은 다시 개미와 비견될 정도로 작아진 상태였다.
방금 전까지의 도미닉 경은 거대한 덩치로 작은 아포칼립스로 군림했으나, 시간제한이 끝나자마자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 것이다.
"시간이 꽤 촉박하오."
도미닉 경은 도저히 제한 시간 내에 목표를 달성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의 목표가 끝날 때마다 다음의 목표가 나타나는 식이었기에 정확한 마지막 목표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보니까, 여기저기에 시간 추가 아이템들이 떨어져 있었어요."
아임 낫 리틀은 뱅글뱅글 도느라 정신이 없는 도미닉 경과 달리, 도미닉 경을 위에서 올려다보며 주변을 살필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런 것들을 내게 말해주시오.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하고 말거요."
도미닉 경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게임을 시작했다.
...
"도미닉 경! 3시 방향에 시간 추가 아이템!"
"3시가 어딘지 모르겠소!"
"도미닉 경 기준으로 오른쪽이요!"
"알겠 아."
도미닉 경의 두 번째 시도는 꽤 성공적이었으나, 결론적으로는 실패였다.
처음 합을 맞춰 보는 것이다 보니, 서로 손발이 잘 안 맞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도미닉 경은 이번엔 거대한 빌딩을 붙일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희망이 보이오."
다시 개미만큼이나 작아진 도미닉 경이 씨익 웃었다.
도미닉 경의 말대로, 이번에는 마지막 목표로 추정되는 단계까지는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바로... 달만큼이나 크게 몸을 불리는 것이었다.
"방금 전엔 조금 아쉬웠어요."
"그러게 말이오."
"이번엔 풀 수 있겠... 음?"
"...? 무슨 일이오?"
도미닉 경은 갑자기 반대편에서 말을 끊어 버린 아임 낫 리틀에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는지를 물었다.
다행스럽게도 무슨 문제가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도미닉 경에게 호재라고 해도 좋았다.
"저 예전에 이거 해 본 기억이 나요."
엘랑 대위가 아임 낫 리틀과 함께 화면에 나타났다.
"도미닉 경. 잠시만요. 잠깐 시야가 가려질 수 있어요."
엘랑 대위는 익숙하게 무언가를 조작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메뉴 창을 열고 옵션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옵션에서 무언가를 조작하자, 옵션 창에 숨겨져 있던 항목들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아, 역시. 이건 그대로네요. 와 세상에. 가차랜드에도 이런 게 있을 줄은 몰랐는데."
엘랑 대위는 거의 완벽하게 이식된 게임에 감탄하며 옵션을 추가적으로 조작했다.
그러자 도미닉 경의 머리 위에 있던 타이머가, 20분을 넘어 30분, 40분, 1시간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8레벨로 해놨었네. 자, 이 정도면 충분히 깨고 남겠죠?"
엘랑 대위는 한 건 해냈다는 듯 기쁜 표정을 지었다.
"충분하오."
도미닉 경은 순식간에 3배나 늘어난 타이머를 보며 말했다.
"이 정도면 못 깰 것이 없지."
도미닉 경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금 게임을 시작할 준비했다.
설마 달의 크기까지 성장한 이후에 또 다른 목표는 없겠지.
도미닉 경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금 땅바닥을 구르며 게임의 시작을 알렸다.
시각은 널널했지만, 도미닉 경은 당장 이 좁은 공간을 벗어나고 싶었으니까.
도미닉 경은 앞선 두 번의 시도를 통해 알아낸 최단 거리를 통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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