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2화 〉 [391화]굴러라, 도미닉 경!
* * *
"여기 먹을 거랑 마실 거요."
엘랑 대위가 도미닉 경에게 음식과 물을 가져왔다.
보통 사람이라면 엄청난 회전력에 의해 속에 있던 것들을 모두 게워내었겠지만, 상태 이상 효과에 내성이 있는 도미닉 경은 그 엄청난 회전 속에서도 멀쩡할 수 있었다.
"첫 공격은 성공이에요."
아임 낫 리틀이 기쁨을 숨길 수 없다는 듯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상대가 초반에만 견제를 몰아서 해 버리는 바람에 후반부에 견제를 받지 않은 것이 주효했어요."
아임 낫 리틀은 도미닉 경에게 전체적인 코스를 보여 주었다.
그녀의 말대로, 대청의 검의 코스는 초반에만 장애물이 몰려 있고 후반에는 뻥 뚫려 마음껏 달릴 수 있었다.
"하지만 대청의 검도 이번 공격으로 교훈을 얻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역시나."
아임 낫 리틀은 후반부에 올라가기 시작한 장애물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에 당한 것이 있으니 이번엔 대비할 것으로 생각했으니까.
"이제는 후반부의 장애물도 피해야 할 거예요."
아임 낫 리틀은 도미닉 경에게 그렇게 말하며 남은 휴식 시간을 바라보았다.
기물을 굴리기 전, 작전을 생각하거나 기물을 수리하거나 장애물을 설치할 시간 3분.
그 3분의 시간이 끝난 것이다.
"이제 다시 굴러갈 시간이네요."
"얼마든지. 난 준비되어 있소."
도미닉 경은 즐거움에 빠져 히죽 웃었다.
그가 살이 찌지만 않았어도, 그 미소는 굉장히 매력적이었을 것이지만, 지금은 그저 볼살에 걸려 푸들거릴 뿐이었다.
아임 낫 리틀은 도미닉 경을 손으로 잡고, 출발 지점에서 도미닉 경을 다시 한번 굴렸다.
어쩌면 마지막 한 방이 될 수도 있을 공격이, 이제 시작되었다.
...
"이야, 설마 마지막에 역전 당할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그러니까요. 역시 스피드 런 전문 가차튜버 답달까..."
"음."
가차랜드 시가지에 위치한 술집, 기사의 모닥불.
이곳에서는 도미닉 경과 아임 낫 리틀, 그리고 엘랑 대위가 나란히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물론 도미닉 경은 여전히 술 만큼은 꺼려 했기에, 도미닉 경의 음료만 사이다로 대체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도미닉 경과 아임 낫 리틀, 그리고 엘랑 대위의 팀은 16강에서 탈락했다.
대전 상대였던 대청의 검은 스피드 런 전문 가차튜버답게 엄청난 속도로 기물을 몰아 공세를 이어갔고, 마침내 먼저 성채의 성문을 박살 내며 승리를 거머쥔 것이었다.
물론, 중간까지는 도미닉 경에게 굉장히 유리한 상황이었던 것은 맞았다.
그러나 마지막에 설치했던 장애물. 그 장애물로 인해 일어난 약간의 감속으로 인해 상대편의 성문의 내구도가 아주 조금 남아버렸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도 이렇게 재밌는 대회도 다 보고, 세상이 넓어지는 기분이 드네요."
엘랑 대위가 기쁘다는 듯 히죽거렸다.
볼이 빨간 것을 보니 조금 취한 모양이었다.
"설마 가차튜버, 그것도 이렇게나 대단한 가차튜버 분과 인연을 맺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에이, 너무 띄워주는 거 아니야?"
엘랑 대위의 말에 아임 낫 리틀은 멋쩍은 듯 헤실거렸다.
"그나저나 꽤 재밌었소."
도미닉 경이 마침내 대회에 끼어들었다.
사실, 도미닉 경은 방금 전에 나왔던 나폴리탄 스파게티 한 접시를 게걸스럽게 먹은 참이었다.
"성좌들의 대회가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지만, 이런 희한하고 신기한 대회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소."
"뭐, 성좌들은 다들 컨텐츠에 굶주려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빵과 서커스라고, 성좌들의 성질을 누그러뜨리는 데에는 이만한 것도 없죠."
아임 낫 리틀은 도미닉 경의 말에 상세하게 대답했다.
아임 낫 리틀의 말 대로, 성좌들은 항상 컨텐츠에 목이 마른 존재들이었다.
오랜 삶을 살아오면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지루함.
그 지루함을 달래줄 컨텐츠는 성좌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심할 경우, 일부 성좌들은 지루하다는 이유로 세계를 엉망으로 만들거나, 혹은...
아무튼, 아임 낫 리틀의 말 대로 성좌들의 성질을 누그러뜨리는 데에도 컨텐츠 만한 것이 없었다.
"아, 이제 슬슬 끝날 때네요?"
아임 낫 리틀은 문득 지금쯤이면 거의 끝났을 것이라며 그녀의 휴대폰을 꺼내 가차튜브 앱을 실행시켰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대회가 진행되는 채널로 들어가더니, 이내 수상자들이 나오는 것을 보며 정말 대회가 끝났다는 걸 알아차렸다.
"뭐, 이변은 없었네요."
1위는 스피드 런 특화 성좌 대청의 검이었다.
"이런 작은 성좌들은 자기 이름을 알리기 위해 필사적이니까요."
아임 낫 리틀은 그렇게 말하며 가차튜브를 껐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경험이 없다는 것이 티가 나요."
"...?"
"사실, 저라면 저 정도의 실력이 있다고 해도 아슬아슬하게 싸우다가 마지막에 꼴사납게 실수. 역전당할 거예요. 아주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살 만큼."
아임 낫 리틀이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도미닉 경은 문득 지금 아임 낫 리틀이 한 말을 생각해 보다가, 엘랑 대위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그거 아임 낫 리틀 님이 하신 거랑 똑같네요?"
"그러니까요."
아임 낫 리틀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저 같은 종합 게임 성좌들은 압도적으로 잘하지 않는 이상,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기가 힘들어요. 하지만 꼴사납게 지면? 사람들 뇌리에 남는 거죠. 당분간은."
아임 낫 리틀의 말에 엘랑 대위는 혀를 내둘렀다.
"그런 거 다 계산하시고 한 거예요?"
"네. 아니, 조금 다르다고 해야 하나..."
아임 낫 리틀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말해도 상관없겠지. 라며 도미닉 경과 엘랑 대위에게 사건의 진상을 말했다.
"사실, 대청의 검은 실력이 대단한 건 맞아요. 하지만 전 그 자리에 대청의 검이 아니라 다른 성좌가 있었어도 지금처럼 16강에서 떨어졌을 거예요."
"?"
"저는 이미 '관심'을 충분히 받은 상태였으니까요."
아임 낫 리틀은 동글동글한 도미닉 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사실, 그 대회에서 필멸자를 기물로 삼은 건 제가 처음이에요. 아니, 예전에도 비슷한 일은 있었지만, 제대로 구르지도 못하고 실격패 당했었어요. 인권 문제였던가. 뭐 그런 문제로 말이에요."
협박을 통해 강제로 참가시킨 거였거든요. 라고 아임 낫 리틀이 덧붙였다.
"아무튼, 저는 애초에 도미닉 경의 컨디션을 위해 16강에서 더 나아갈 생각은 없었어요. 그 이상 올라가게 되면 도미닉 경에게 무리가 갈 테니까."
아임 낫 리틀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많았지만, 왠지 정리되지 않는다는 듯 손가락으로 탁자를 탁탁 쳤다.
"아무튼, 도미닉 경을 통해 이목을 집중시켰기에 이미 자기 자신을 홍보하려는 목적은 달성했죠? 그렇다면 다음은 뭐겠어요? 바로 16강에서 떨어져 상대에게 호감을 사는 거죠. 운이 좋으면 이 인연을 이어나가 나중에 그 성좌와 합방을 하거나 다른 컨텐츠를 소개받을 수도 있어요. 이게 바로 제가 오래 방송할 수 있는 비결이에요."
"세상에."
엘랑 대위는 아임 낫 리틀이 오랫동안 방송을 한 성좌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노련한 성좌인 줄은 처음 알았다.
"대단하구려."
도미닉 경이 아임 낫 리틀의 말에 감탄했다.
도미닉 경이 듣기에도 아임 낫 리틀의 심계가 상당히 깊었기 때문이다.
"별말씀을."
그렇게 말한 아임 낫 리틀은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때였다.
"흥! 겨우 그런 이유로 나랑 싸움을 피하셨겠다?"
도미닉 경은 갑자기 등 뒤에서 시비를 거는 여성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러자 거기엔, 머리에 커다란 붉은 가짜 장미를 단 붉은 치마의 여성이 있었다.
그 여성은 붉은 장갑을 낀 손으로 붉은 부채를 쥐고 있었는데, 굉장히 표독스러워 보이는 여자였다.
"붉은 장미의 거인?"
아임 낫 리틀이 그녀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여긴 어떻게 찾은 거죠?"
"경기가 끝나고 어디론가 가는 모습을 봤지. 쫓아와 보니 여기더라고."
"그거 보통 미행이라고 하지 않나요?"
"몰라. 성좌에게 하계의 규칙을 들이대지 마!"
붉은 장미의 거인은 짜증이 치밀어오른다는 듯 앵앵거리는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아무튼, 너와의 싸움을 그렇게나 고대하고 있었는데 고작 그런 이유로 빠져나가?"
"...그러는 당신도 16강에서 탈락했을 텐데요?"
"윽! 그, 그건..."
아임 낫 리틀의 말에 성좌 붉은 장미의 거인은 말문이 막힌 듯 어버버거렸다.
그럴 수밖에. 지금 붉은 장미의 거인은 아임 낫 리틀에게 억지를 부리고 있었던 것뿐이었으니까.
사실 붉은 장미의 거인은 아주 사악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바로, 아임 낫 리틀의 심기를 건드려 손찌검을 당한 뒤, 아임 낫 리틀의 인성에 대한 영상을 짜깁기해 조회 수를 빨아먹는 것이었다.
그 계획을 다시금 떠올린 붉은 장미의 거인은, 아임 낫 리틀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이렇게 끝낼 순 없어! 그러니까 따로 경기해!"
"제가 왜요?"
아임 낫 리틀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 쳤다.
"제가 뭐가 아쉬워서 저격이나 일삼는 사람과 경기를 해야 하는 거죠?"
"그건... 그건..."
아임 낫 리틀의 말에 붉은 장미의 거인은 또 한 번 말문이 막혔다.
아임 낫 리틀은 구독자 수만 해도 1억이 넘어가는 대형 성좌.
그에 반해 자기는 이제 겨우 500만을 넘긴 작은 성좌.
아임 낫 리틀의 말대로 그녀가 붉은 장미의 거인과 싸울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아임 낫 리틀의 논리적인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붉은 장미의 거인은 무리수를 뒀다.
본래의 목적인 아임 낫 리틀을 화나게 한다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음?"
도미닉 경은 갑자기 발아래가 허전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도미닉 경은 손에 든 허브 티 찻잔과 함께,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붉은 장미의 거인은, 도미닉 경을 어디론가 보내버린 것이다.
"도미닉 경!"
도미닉 경은 어두운 구멍 아래로 굴러떨어지면서, 저 위에서 자신을 부르는 아임 낫 리틀의 외침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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