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1화 〉 [390화]굴러라, 도미닉 경!
* * *
어느덧 2그룹 2번째 경기가 끝나고, 3번째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그 말인 즉, 이제 도미닉 경과 아임 낫 리틀이 출전할 차례라는 뜻이었다.
도미닉 경은 앞선 두 경기를 보고 이 경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었다.
기다란 코스를 구른다.
상대는 방해한다.
그 방해를 피해 굴러 적의 성채를 부수고 안에 있는 성좌들의 아바타를 납작하게 뭉갠다.
그리고 그 패배한 성좌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며 모든 성좌들이 깔깔거리며 웃는다.
도미닉 경은 문득 성좌들이 필멸자들과는 다른 정신 상태를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죽지 않는다지만, 죽음 그 자체를 희화화 할 줄이야.
기본적으로 전사의 정신을 가진 도미닉 경으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이런 건 미리 알려주지 않았는데?"
성좌 아임 낫 리틀이 앞선 두 경기의 결과를 보며 두려움에 떨었다.
설마 하니, 패배한 성좌들에 대한 조롱이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도, 도미닉 경..."
"확실히 이겨 버리면 되지 않소. 걱정 하지마시오."
도미닉 경은 불안에 떠는 아임 낫 리틀에게 그렇게 말하며 몸을 앞으로 까닥거렸다.
반할 것만 같은 멋진 말.
그러나 도미닉 경의 동글동글한 외모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 아임 낫 리틀은 순간 웃음을 터뜨렸다.
"풉! 아, 아. 죄송해요. 비웃으려는 게 아니라"
"...괜찮소. 생각해 보니 이런 상태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소."
도미닉 경은 아임 낫 리틀의 행동을 이해했다.
아임 낫 리틀은 그녀의 침으로 축축해진 도미닉 경을 손수건으로 살살 닦아내었다.
"곧 있으면 경기 시작합니다! 2그룹 3경기 선수들은 각자 출발선에 서 주세요!"
그리고 도미닉 경이 다시 뽀송해지고 나서야, 다음 경기를 알리는 안내 요원의 외침이 들렸다.
이제부터는, 달릴 차례였다.
...
아임 낫 리틀의 16강 대진 상대는 커다란 푸른 검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청을 검신에 바른 듯한 거대한 대검이었는데, 검신과 손잡이, 그리고 가드 부분이 십자로 교차하는 부분에 모든 것을 오만하게 내려다보는 푸른 눈이 있었다.
"아."
아임 낫 리틀이 그 모습을 보며 탄식을 터뜨렸다.
"조금 전에 대진표에 있던 이름을 보고 긴가민가했는데, 큰일이네요."
"?"
아임 낫 리틀은 절망적인 표정을 지으며 도미닉 경에게 말했다.
"성좌 대청의 검이예요. 몇몇 부문에서 타임 어택 세계 기록을 가지고 있는 기록 사냥꾼이라구요."
우린 망했다는 뜻이예요. 라고 아임 낫 리틀은 더욱 의기소침하게 변했다.
그때, 성좌 대청의 검이 하늘을 부유하여 아임 낫 리틀에게 다가왔다.
"아임 낫 리틀님이시죠?"
"아, 네."
성좌 대청의 검은 아임 낫 리틀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세상천지 무서울 것 없어 보이는 저 오만한 눈빛.
아임 낫 리틀은 그 무시무시한 눈빛에 쫄아 살짝 움츠러들었다.
성좌 대청의 검은 오만한 눈으로 계속해서 아임 낫 리틀을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아임 낫 리틀에게 검 끝을 겨눴다.
"!"
아임 낫 리틀은 눈을 질끈 감았다.
누가 보더라도 공격하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청의 검은 아임 낫 리틀을 공격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저, 팬입니다! 싸인 좀!"
그의 검 끝에는, 싸인용 종이와 유성 펜이 있었을 뿐이었다.
"...?"
아임 낫 리틀은 갑자기 싸인을 해 달라는 대청의 검의 모습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여기서 아임 낫 리틀님을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설마 이런 작은 대회에 대기업 분께서 오실 줄은..."
"아."
아임 낫 리틀은 문득 자기 가차튜브 시청자 수를 생각해 보고, 이후 대청의 검의 시청자 수를 생각해 보았다.
대청의 검의 시청자 수는 고작 600만을 넘긴 작은 성좌였고, 자신은 그 수십 배의 인원을 가진 거대한 성좌였다.
대청의 검의 실력은 모두가 알아주었으나, 정작 입담이 부족해 시청자 수가 좀 적었기 때문이다.
신앙하는 이의 수가 곧 힘인 성좌들의 세상에서, 아임 낫 리틀은 꽤 높은 곳에 있는 대형 성좌였다.
...평소의 모습을 보면 전혀 그래 보이지는 않지만 말이다.
"저 아임 낫 리틀 팬 카페도 가입하고, 구독도 벌써 352개월 째 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리고"
대청의 검은 마치 아이돌을 만난 팬처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 싸인은 해드릴게요."
아임 낫 리틀은 대청의 검에게서 싸인용 종이와 유성펜을 받아들고 싸인했다.
평소에 밥 먹고 카드 계산할 때 서명하는 일을 제외하면 싸인을 할 일이 없는 아임 낫 리틀이었기에, 손이 달달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문구는 어떻게 적어드릴까요?"
"꼭 승리하세요. 라고 적어 주세요."
"...그러면 제가 져야 한다는 뜻이 되네요?"
"앗, 아아. 그런 게 아니라..."
대청의 검은 아임 낫 리틀의 말에 마구 휘둘리고 있었다.
이것이 오랫동안 단련된 관록이라는 것일까.
결국 '방송 대박 기원!'이라는 문구로 합의를 본 대청의 검은, 싸인을 받은 종이를 품에 꼬옥 안고 헤실헤실 웃었다.
"이거 가보로 간직할게요."
"자! 모든 선수 분들은 30초! 30초 내로 출발 선 앞에 서 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모든 선수 분들은"
"아, 이제 곧 경기가 시작되네요. 저, 후회 없는 경기를 할 거예요. 그러니까... 파이팅이예요!"
대청의 검은 그렇게 말하면서 반대편 봉우리를 향해 날아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임 낫 리틀의 성채가 있는 곳이었다.
"...굉장히 순박한 성좌였구려."
도미닉 경이 겉모습과는 다른 대청의 검의 모습에 당황하며 말했다.
"그러니까요. 겉모습은 성좌 한두 명 죽이고 갓 슬레이어 타이틀 붙였을 줄 알았는데."
아임 낫 리틀도 그렇게 말하며 출발선을 향해 걸어갔다.
"자! 이제부터 2그룹 3번째 경기를 시이자악! 하겠습니다!"
아임 낫 리틀은 해설자들의 외침과 함께 색깔이 바뀌기 시작한 신호등을 바라보았다.
삑삑거리는 소리와 함께 하나씩 점멸되는 등.
그리고 마침내 그 등이 초록 불이 되었을 때, 아임 낫 리틀은 꼭대기에서 도미닉 경을 굴렸다.
진짜로 경기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도미닉 경은 처음엔 아주 천천히 굴렀으나, 이내 가속도를 받고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산꼭대기라서 그런지 경사가 굉장히 가파른 편이었으며, 경기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도로에는 풀이나 나무처럼 가속도를 제어할 수 있는 장애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어째서인지 어지럽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도미닉 경의 시야가 1인칭이 아니라 3인칭으로 보이었다.
도미닉 경은, 뱅글뱅글 도는 도미닉 경인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트으윽이이하아안 겨어어엉허어어어어험이이이로오오구우우우운"
도미닉 경은 특이한 경험이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맹렬하게 돌아가는 몸통에서 나온 말은 이상하게 늘어질 뿐이었다.
사실, 도미닉 경이 경기 동안 3인칭의 시야를 가지게 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아임 낫 리틀의 배려였다.
그녀는 성좌의 힘을 통해 도미닉 경에게 3인칭의 축복을 일시적으로 내려 준 것이다.
그 사실에 대해선 도미닉 경이 몰랐으나, 도미닉 경은 그 사실을 알았어도 신경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단은, 도미닉 경을 방해하려는 온갖 장애물들부터 헤쳐 나가야 했으니까.
도미닉 경은 갑자기 눈앞에서 건설되는 온갖 종류의 벽들과 포탑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 포탑이 쌓아 올라가기 전에 경로에 나타나기 시작한 소 떼와 양떼를 보았다.
도미닉 경은 엄청난 속도로 벽을 부너뜨리고 포탑을 박살 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소들은 죽기 전에 도미닉 경을 자꾸 옆으로 밀어 내려고 하고 있었다.
산에 나 있는 도로는 아주 좁았기에, 조금만 옆으로 밀려나면 자칫 엉뚱한 방향으로 굴러떨어질 수 있는 아주 위험 천만한 상황!
도미닉 경은 다행스럽게도 평소에 단련을 아끼지 않았던 근육을 움직여 엉뚱한 방향으로 굴러떨어지는 것만큼은 막아 낼 수 있었다.
도미닉 경은 다음 장애물이 어떻게 될지 몰라 잠시 경계를 했으나, 처음에 벽과 포탑, 소 떼와 양이 나타난 것 외에는 더 이상 장애물이 나타나지 않았다.
"장애물을 만들기 위해선 자금이 필요해요! 지금 반대편에선 자금이 바닥난 모양이예요!"
그때, 하늘에서 도미닉 경을 향해 아임 낫 리틀이 정보를 전달했다.
도미닉 경은 그제야 상대가 자금이 없어 자기를 더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도미닉 경의 움직임은 거침이 없었다.
도미닉 경은 데굴데굴 다시 구르기 시작하더니, 이내 맹렬한 기세로 도로를 굴러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치거나 후유증이 생길 염려도 없었다.
도미닉 경이 가진 [탱커] 특성 덕분에 도미닉 경의 체력과 방어력은 압도적인 수준이었고, 특수 기술 [기수]와 합쳐질 경우 도미닉 경의 단단함은 거의 신화 속의 금속, 아다만타이트 만큼이나 단단했다.
어지간한 방해로는 도미닉 경의 몸에 흠집조차 남지 않는 상황!
도미닉 경은 문득 저 앞에 성채로 보이는 건축물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도미닉 경은 아무 생각 없이 그 어떤 방해도 없는 상태로 상대방의 성채를 향해 뛰어들었다.
동글동글한 도미닉 경의 엉덩이가 성채의 입구를 강하게 타격했다.
도미닉 경은 문득, 저 멀리서 성좌들이 양팔을 들고 환호하는 소리를 들었다.
"잘했어요, 도미닉 경."
아임 낫 리틀이 성채를 공격한 도미닉 경을 집어 들어 손바닥에 올려 두며 말했다.
"이제 한 번 정도만 더 이렇게 하면 될 것 같아요."
도미닉 경은 그 말에 슬쩍 성채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곳엔, 이미 절반 이상 파손된 성채의 성문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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