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0화 〉 [389화]성좌들의 대회
* * *
도미닉 경은 성좌 아임 낫 리틀의 손 위에서 대진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미 대진표는 다 짜인 상태였는지, 총 16명의 명단이 대진표에 걸려져 있었다.
"아, 전 14번째네요."
아임 낫 리틀의 이름은 14번째에 걸려 있었다.
도미닉 경은 잠시 아임 낫 리틀이 전략을 고민하는 사이, 데굴데굴 굴러 주변을 확인했다.
주변에는 성좌 모습의 아임 낫 리틀처럼 신적인 존재처럼 보이는 이들이 있었는데, 도미닉 경은 그들의 수가 총 열다섯임을 알아차렸다.
아무래도, 저들이 아임 낫 리틀과 경합할 대회 상대인 모양이었다.
"미안 해요. 조금 고통스럽겠지만 참아줘요. 이제 곧 끝날 거거든요."
"...?"
아임 낫 리틀은 손바닥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도미닉 경의 모습을 바라보며 도미닉 경이 고통스러워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사실, 성좌들이 내뿜는 압박감은 일개 필멸자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도미닉 경은 무려 [탱커] 특성에 특수 능력 [기수], [시네마틱]을 보유한 자였다.
이 셋의 시너지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버텨 낼 수 있게 도미닉 경을 보조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도미닉 경은 본가라고 할 수 있는 페럴란트에서는 하얀 까마귀만큼이나 인지도가 높은 자였다.
한때는 성인의 반열에 있었으나, 이제는 거의 반신 취급받는 사나이.
그렇기에 도미닉 경은 절반 정도는 성좌라고 할 수 있는 상태였다.
본체가 반은 성좌였으니, 다른 성좌들의 압박감을 느끼지 못 하는 것은 당연한 일.
그 사실을 모르는 아임 낫 리틀만이 불편한 듯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도미닉 경은 문득 세상이 붉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세상이 붉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붉은 무언가가 세상을 뒤덮고 있는 것이었다.
이내 도미닉 경은 세상이 어두워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말인 즉, 아임 낫 리틀만큼이나 커다란 무언가가 도미닉 경을 굽어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빨간색의 무언가가.
도미닉 경은 고개를 들어 자신을 쳐다보는 이를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붉은 장미 덤불로 된 거대한 거인이었는데, 머리 위에는 엄청난 크기의 붉은 장미가 피어 있었고, 전신에는 가시가 빼곡한 줄기가 엮여 있었다.
"이게 네 기물인가 보구나?"
그리고 그것은 아임 낫 리틀에게 친한 척 말을 걸었다.
"확실히 대회 규정에는 맞는 기물이네."
그렇게 말한 붉은 장미 거인은 도미닉 경을 이리저리 바라보았다.
공허한 가시덤불 구멍이 도미닉 경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도미닉 경에게서 좀 떨어질래요? 도미닉 경은 아직 필멸자라서"
"...내가 누군지를 모른다고?"
정작 아임 낫 리틀은 이 성좌를 모르는지 고개를 갸웃하며 주의를 주었다.
그러자 붉은 장미의 거인은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하! 날 도발하려고 했다면 성공이야, 아임 낫 리틀! 라이벌인 내게 이런 모욕을 주다니. 참 뻔뻔하기도 하지!"
"아."
라이벌이라는 말에 아임 낫 리틀은 무언가 생각이 난 듯 탄성을 내질렀다.
"그, 매일 저 저격하시는 그 분인가요 혹시?"
"저, 저격이라니! 선의의 경쟁이야!"
붉은 장미의 거인은 아임 낫 리틀의 말에 버럭 화를 냈으나, 정작 부정은 하지 않았다.
다만 어감을 조금 순화했을 뿐이다.
"아무튼, 이번엔 운이 좋네. 대진표를 보니 우린 결승에서 만나게 되겠어."
"...? 그 말을 왜 지금 하시죠?"
"그야, 네가 내 라이벌이니까."
"?"
아임 낫 리틀은 붉은 장미의 거인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정작 아임 낫 리틀은 붉은 장미의 거인을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으니까.
"이익...!"
그 모습에 붉은 장미의 거인은 더욱 복장이 터진다는 듯 얼굴이 빨개지더니, 이내 또 한 번 버럭 화를 내며 제 할 말만을 내뱉고 사라져 버렸다.
"두고 봐! 네 그런 나쁜 모습을 시청자들 앞에서 꼭 까발려 줄 테니까!"
"?"
아임 낫 리틀은 끝까지 제멋대로 행동하는 붉은 장미의 거인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도미닉 경은 갑자기 폭풍처럼 지나간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아임 낫 리틀에게 물었다.
"아는 사이요?"
"아, 도미닉 경. 괜찮아요?"
"괜찮소. 그나저나 방금 물은 질문에 대해 듣고 싶소."
도미닉 경의 말에 아임 낫 리틀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별로 신경 쓸 성좌는 아니예요. 얼마 전에 가차튜브를 시작한 가차튜버인데, 언제나 어그로를 끌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거든요."
게임하는 성좌들을 저격하거나, 멀티플레이 게임에서 제멋대로 행동해 파티를 와해시키거나, 검증도 안 된 정보를 사실인 양 호도하거나 하는 성좌예요. 라고 아임 낫 리틀이 말했다.
"그나저나 설마 이 대회에 나왔을 줄은 몰랐네요. 최소 구독자 500만 명 이상만 참가 가능이라고 들었는데 말이예요."
시드권을 샀거나, 아니면 정말 500만 명을 넘긴 걸까요? 라고 말한 아임 낫 리틀은 폰을 꺼내 가차튜브에 들어갔다.
"아. 진짜네. 며칠 전에 500만 달성했네요. 세상에. 이런 채널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다니."
아임 낫 리틀은 혐오스러운 표지와 억지스러운 제목으로 가득한 붉은 장미의 거인의 가차튜브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붉은 장미의 거인의 영상은 '행성 하나를 멸망으로 이끌었습니다.'라거나 '인기 가차튜버 XXX를 참교육 했습니다.'같은 제목들이었다.
"그다지 좋은 성좌는 아닌 모양이구려."
도미닉 경이 붉은 장미의 거인의 가차튜브를 같이 보며 말했다.
"모든 성좌가 선한 것은 아니니까요."
아임 낫 리틀은 어깨를 으쓱하며 도미닉 경에게 답했다.
["자! 이제 대진표가 짜여졌으니 기다리시던 경기가 곧 시작될 예정입니다! 16강은 저희가 시간문제로 인해 1그룹과 2그룹을 동시에 진행하는 점, 시청자 분들께 양해 부탁드립니다."]
["현재 이곳에선 1그룹만 중계할 예정이고, 2그룹은 2번 채널에서 중계될 예정입니다."]
["각 채널에서는 1시간 시청할 때마다 기본 카드 팩 하나씩, 총 2팩씩 드리니까 시청자 여러분들의 많은 시청 부탁드립니다."]
중계진들의 짧은 말이 끝난 뒤, 대회장은 분주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제부터 경기가 시작되니, 이것저것 준비할 것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2팩 씩이면, 총 4팩까지 얻을 수 있다는 거요?"
"그렇죠?"
도미닉 경은 중계진들의 말을 들으며 깜짝 놀라고 말았다.
가차랜드에서 통용되는 카드 팩의 가치를 생각하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나 퍼주다니, 대회 측에서는 남는 게 뭐요?"
"뭐, 애초에 가차랜드에서 지원을 받아서 하는 대회니까요."
아임 낫 리틀은 도미닉 경의 말에 성실하게 대답했다.
"무엇보다 주는 팩은 현재 유행하는 게 아니라 안 팔리는 팩들이니까 재고 처리 측면에서 보면 서로 이득인 셈이죠."
아임 낫 리틀은 혹시라도 도미닉 경이 이해하지 못했을까 봐 좀 더 자세한 비유를 덧붙였다.
"그러니까, 창고에 묵은 곡식들을 처리하는 거예요. 주최자는 묵은 곡식을 처리하고 창고를 비워 보관료를 안 내도 되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고, 시청자들의 처지에서도 묵은 곡식이긴 해도 곡식을 공짜로 받았으니 이득이고. 그런 셈이죠."
도미닉 경은 아임 낫 리틀의 말에 납득했다.
"그나저나, 우린 한참 뒤네요."
아임 낫 리틀은 조금 전 대진표를 확인했을 때 14번에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2그룹 3번째 경기라는 뜻이었다.
"보통 한 판에 15분 정도 걸리니까, 중간중간 쉬는 시간까지 합치면 대략 40분 정도 시간이 있네요."
아임 낫 리틀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반대쪽 손을 들어 올렸다.
그곳에는 엘랑 대위가 아임 낫 리틀의 손가락을 붙잡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무래도 고소 공포증이 있는 모양이었다.
"엘랑 대위라고 했죠? 혹시 배 안 고파요?"
"네, 네?"
엘랑 대위는 패닉에 빠진 채 아임 낫 리틀을 바라보았다.
엘랑 대위는 플레이어로서 성좌들의 압박감에 대해 면역이었기에 아임 낫 리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가서 먹을 것 좀 사오지 않을래요? 좀 불안 해서 말이예요."
"...?"
엘랑 대위는 아임 낫 리틀이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임 낫 리틀은 그런 엘랑 대위를 위해 조금 더 상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도미닉 경이 구르다가 살이 빠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요. 그 전에 잔뜩 먹고 힘을 내자구요."
"아."
엘랑 대위는 그제야 아임 낫 리틀이 하는 말을 알아차렸다.
아임 낫 리틀은, 도미닉 경이 조금 더 동글동글해지길 바라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도 지금 먹으면 속이 안 좋아지지는 않을까요? 안 그래도 강하게 굴러야하는 모양인데, 그러다가 먹은 것이 올라오기라도 한다면..."
"괜찮소."
도미닉 경은 엘랑 대위의 말에 대답했다.
"이왕 도와주기로 한 거, 끝까지 돕는 게 도리 아니겠소. 가서 사오시오."
도미닉 경은 의욕을 불태웠다.
"...이건 제 잘못 아니예요."
엘랑 대위는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아임 낫 리틀이 땅에 엘랑 대위를 내려다주자, 엘랑 대위는 근처에 있는 노점에 가서 먹을 것을 잔뜩 사서 돌아왔다.
"자. 드세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전 잘못 없어요?"
도미닉 경은 엘랑 대위가 입에 밀어 넣어 주는 음식들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전의를 다졌다.
...본인에게 있어선 굉장히 진지한 상황이었겠지만, 겉으로 보기엔 매우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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