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4화 〉 [383화]휴식
* * *
도미닉 경은 마침내 집에 도착했다.
귀에 꽂은 이어폰을 빼내고 현관문을 열자, 그곳은 파티장이었다.
"아, 오빠! 어서 와."
현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레미가 도미닉 경을 반겼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도미닉 경이 당혹스럽다는 듯 거실을 바라보았다.
거실에는 몇 가지의 배달 음식과 다양한 음료수, 그리고 도미닉 경의 냉장고에 있던 몇 가지 반찬이 널려 있었다.
주방에서는 앞치마를 입은 도미니카 경이 스튜를 냄비 째로 가져오고 있었고, 팬텀 박사는 검은 배경에 형광빛이 도는 녹색 발톱 자국이 그려진 음료수를 홀짝이고 있었다.
"별 건 아니야."
레미가 은근슬쩍 앨리스 백작 영애를 바라보았다.
"하도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뭔가 자꾸 먹고 싶다고 하길래, 일단 도미니카 경의 허락을 받고 샀어."
도미닉 경은 레미의 말에 이마를 짚었다.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이론 상 하나의 존재였으니, 도미니카 경에게 허락받은 건 도미닉 경에게 허락받은 거나 다름없다는 논리였다.
"어라? 도미닉 경."
도미닉 경이 이 골때리는 상황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있을 때, 히메가 다가왔다.
히메는 어째서인지 꽤 양이 많아 보이는 음료수 병을 들고 있었는데, 병의 라벨에는 '이건 술 아님. 알콜 함유 17%'라고 적혀 있었다.
도미닉 경은 히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도오미이니익 겨어어어엉."
히메는 도미닉 경의 시선에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도미닉 경의 품 안으로 달려들었다.
도미닉 경이 체술로 히메를 무의식적으로 제압했기에 망정이지, 까딱 잘못했으면 히메의 흑역사가 하나 생겼으리라.
도미닉 경은 쓰러질락 말락하는 히메를 들어 소파로 걸어갔다.
그리고 소파에 기절한 히메를 내려다 놓고 엉망이 된 거실을 지나 도미니카 경에게 다가 갔다.
도미니카 경은 어째서인지 펑펑 울고 있는 앨리스 백작 영애의 앞에 있는 그릇에 닭고기 스튜를 한 국자 떠주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도미니카 경?"
"아, 도미닉 경."
도미니카 경은 도미닉 경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앨리스 백작 영애는 스트레스를 먹는 걸로 푸는 사람인가 봐."
아.
도미닉 경은 그 말에 앨리스 백작 영애를 바라보았다.
앨리스 백작 영애는 무엇이 그리 서러운지 펑펑 울며 술과 음식을 마구 먹고 있었다.
아무래도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그런 모양이었다.
"처음엔 1인분, 2인분 이었는데, 갑자기 모자라다면서 돈을 주더라고. 이 돈으로 살 수 있는 건 다 사달라고. 그래서 배달을 좀 시켰지."
도미닉 경은 슬쩍 주변에 쌓여 있는 음식들을 보았다.
도저히 얼마나 썼을지 감이 잡히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몇십 인분은 넘어보였다.
"이것 참. 이해 못 할 것도 아니긴 하오만..."
도미닉 경은 앨리스 백작 영애가 어째서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아마 오늘 갑자기 일어난 일들이 그녀를 예민하게 만든 거겠지.
예전부터 앨리스 백작 영애는 자기 예측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으면 짜증을 부리는 성격이었다.
그 부분은 전혀 바뀐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도미닉 경은 한숨을 내쉬며 도미니카 경에게 말했다.
"뭐, 먹고 마시는 건 상관이 없소. 다만 돌아왔으니 일단 씻고 자긴 해야 하는데..."
"아, 미안."
"?"
도미니카 경은 도미닉 경의 말에 다짜고짜 사과했다.
도미니카 경은 말없이 도미닉 경을 욕실로 데려갔다.
그리고 도미니카 경이 욕실의 문을 열자, 도미닉 경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욕조와 세면대는 이미 광어, 우럭, 도다리가 점령하고 있었다.
"술 마실 땐 회가 최고라고 들어서..."
집 앞에 흐르는 저거. 3픽셀짜리 저기서 잡은 애들이야. 라고 도미니카 경이 말했다.
도미닉 경은 도미니카 경의 말에 세상에서 가장 황당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표정을 지었다.
차마 글이나 그림으로서는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표정이었다.
"그렇다면, 내 방도?"
"맞아."
도미닉 경의 물음에 도미니카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긴 이미 치킨과 피자, 그리고 파스타와 서비스로 받은 치즈 볼들로 가득 차 있어."
아, 세상에.
도미닉 경은 이 황망스러운 상황에 마른세수했다.
씻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면 도대체 집의 존재 의의란 무엇인가?
도미닉 경은 그리 생각하며 술에 취해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레미와 팬텀 박사의 옆을 지나쳤다.
"어디 가세요오오?"
소파에 누워 있다가 인기척에 슬쩍 깬 히메가 귀를 팔랑거리며 도미닉 경을 바라보았다.
아직 술이 깨지 않아 풀린 눈이 매력적이었지만, 도미닉 경은 히메를 슬쩍 보더니, 이내 이렇게 말했다.
"바람 쐬러 가오."
도미닉 경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현관문을 나섰다.
...
도미닉 경은 정처 없이 가차랜드 시내를 방황했다.
야밤의 시내는 오랜만이었다.
과거 아직 집이 없었을 때엔 잠도 자지 않고 야밤의 골목길을 걸어 다니곤 했는데.
도미닉 경은 그때를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생각해 보면 고작 2년도 안 된 시기였으니까.
깊은 밤의 가차랜드는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제각기 다른 시간대의 조명들이 제각기의 매력을 뽐내고, 엉망진창으로 뒤섞인 간판들이 깜빡거리며 자기 존재감을 드러냈으며, 그 불빛들로 건물들의 외곽선이 희미하게 빛나는 도시.
그 건물들 너머로 도미닉 경은 세 건축물을 볼 수 있었다.
어둠에 휩쌓여 있음에도 밝게 보이는 뒤죽박죽인 건축물, 시스템 인더스트리의 본사.
다른 두 건축물에 비해 높이는 다소 낮지만, 그 부지의 넓이는 셋 중 가장 넓은 행정부.
그리고 가장 자본주의적이면서도 효율적인 건축물의 집합체, 블랙 그룹의 본사.
도미닉 경은 그것들을 바라보며 걸었다.
마치 그것들이 가차랜드의 등대, 이정표라도 된다는 듯이.
그때, 도미닉 경은 문득 옆에 신비한 분위기의 노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노점은 마치 작은 서커스 천막처럼 생겼는데, 보라색과 파란색으로 된 천에 해, 달, 별이 그려져 있는 우스꽝스럽지만 신비로운 천막이었다.
도미닉 경은 홀린 듯 그곳으로 들어갔다.
이유는 없었다.
그저 도미닉 경의 호기심이 그곳으로 도미닉 경을 이끌었기 때문이었다.
"어서 오시지요..."
도미닉 경이 천막 안으로 들어가자, 그 안에는 매부리 코에 넓적한 얼굴을 가진 노파가 있었다.
그 노파는 카드를 섞거나, 수정 구슬을 보거나, 산가지가 들어 있는 통을 흔들거나, 혹은 그 모두를 하거나 하지 않고 있었다.
"자리에 앉으시지요..."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도미닉 경의 인식에서 그녀는 그 모든 것을 같이 하기도, 가만히 있기도 하는 상태였으니까.
도미닉 경은 이 조차도 가차랜드답다고 생각하며 노파의 안내대로 의자에 앉았다.
노파는 아무 말도 없이 무언가를 섞었다.
그건 밀알이었는지, 산가지였는지, 혹은 타로 카드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책상 위에 그것들을 가지런히 던지더니, 갑자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당신은 현재 번 아웃 위험이 있습니다. 너무 앞만 보고 달린 나머지, 탈진할 수도 있다는 뜻이지요. 그러니 가끔은 쉬어가는 것도 좋습니다."
그렇게 말한 노파는 다시금 도미닉 경에게 손사래를 쳤다.
"이제 가시지요..."
도미닉 경은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천막 바깥으로 나섰다.
천막 바깥으로 나서자, 도미닉 경은 골목길에서 큰길로 나왔다.
도미닉 경은 방금 전까지 이곳에 천막이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도미닉 경의 시선엔 그곳은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이었다.
그곳은 정말 골목이기는 한 걸까?
도미닉 경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걸었다.
그때, 도미닉 경의 옆으로 세 명의 남자가 지나갔다.
"아니, 진짜라니까? 예전에 여기를 지나가는데, 한 노파가 나타나서 점괘를 알려주는 데 아주 용하더라고!"
"그래서 그 노파가 어디에 있냐고. 지금 나흘 째 같은 곳을 돌아다니는 데 아무도 없잖아."
"도시 전설같은 거 아냐?"
세 남자는 낄낄대며 도미닉 경의 옆을 지나쳤다.
골목이 어두운 나머지 세 사람은 도미닉 경을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도미닉 경은 세 사람의 말에 자신이 도시 전설에 휘말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건 위키에서나 보는 건 줄 알았는데.'
도미닉 경은 놀란 표정으로 다시 어두운 골목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자신이 만났던 그 노파는, 이스터 에그같은 것이 확실했다.
도미닉 경은 방금 전 노파의 말을 생각했다.
'당신은 현재 번 아웃 위험이 있습니다. 너무 앞만 보고 달린 나머지, 탈진할 수도 있다는 뜻이지요. 그러니 가끔은 쉬어가는 것도 좋습니다.'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본 도미닉 경은 이런 생각에 닿았다.
'생각해 보니, 너무 달려오지는 않았나.'
이 생각은 도미닉 경이 신경을 쓰지 않아도 좋을 만큼 아주 짧은 시간만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지만, 도미닉 경은 이 문제에 대해 제법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도미닉 경은 쉬는 시간이라는 것이 어색한 남자였다.
물론 일상생활에서 나름의 여유를 찾아가고는 있지만, 어디 제대로 쉬어 본 적이 있던가?
농노 시절의 도미닉 경은 그저 일 년을 일해 일 년을 먹고 살 걱정 밖에 없었다.
병사 시절의 도미닉 경은 그저 살아남는 것, 그 외의 걱정은 사치였다.
기사 시절의 도미닉 경은 복수하는 것. 그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가차랜드에 와서도 도미닉 경은 앞만 보고 달렸다.
목표를 세우는 것도 좋았고, 이것저것 즐기는 것도 좋았지만 도미닉 경은 지금은 쉬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훈련도 휴식이 있어야 효율적이지 않던가.
지금까지 스스로에게 엄격했으니, 조금은 풀어져도 괜찮지 않을까?
도미닉 경은 그런 생각 하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여전히 밝게 빛나는 가차랜드의 거리와 저 멀리 보이는 세 개의 건물이 보였다.
그러나 도미닉 경의 눈에는 이 똑같은 풍경이 조금은 다르게 보였다.
도미닉 경의 시야가 살짝 바뀌는 순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