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차랜드의 행복한 도미닉 경-371화 (371/528)

〈 371화 〉 [370화]삼자대면

* * *

앨리스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주변에서 보기엔 이건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울음이었지만, 사실 이는 그녀가 살아온 환경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페럴란트의 백작 영애 시절부터 외롭게 살아왔다.

다른 또래의 여자 친구들과는 달리 겁쟁이인 아버지를 대신해 전장을 누볐고, 인형을 쥐고 목마를 타는 대신 검을 쥐고 군마를 탔다.

페럴란트 백작이 되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뛰어난 지휘관이자 귀족이었으며 뛰어난 기사였으나, 그저 그뿐이었다.

모두가 그녀를 페럴란트의 백작 앨리스로 볼 뿐, 작은 소녀 앨리스로 보는 이는 없었다.

그녀가 페럴란트에서의 과업을 마치고 하얀 까마귀의 눈에 들어 성좌가 되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얀 까마귀는 오롯이 홀로 존재하는 존재였으나, 이내 자기의 힘이 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성좌를 택했다.

그게 바로 앨리스 백작 영애였다.

그 말인 즉, 하얀 까마귀는 앨리스 백작 영애를 하나의 성좌로만 봤을 뿐 인격체적으로 본 적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애초에 인간에서 신이 된 앨리스의 마음을, 처음부터 신이었던 하얀 까마귀가 어찌 알겠는가?

그러나 그녀의 정신력은 과연 성좌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초월적이었다.

이 모든 것들을 버티고, 또 버티며 수백 년의 세월을 홀로 버텨 왔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정신력을 지탱하고 있던 것은, 그녀가 이룩한 모든 것이었다.

그녀의 무력, 그녀의 통솔력, 그녀의 정치력...

그 모든 것이야말로, 앨리스의 근간을 이루는 것들이었다.

이 자신감이라는 기둥들은 앨리스의 정신력을 겨우 지탱하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정신 승리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이리라.

혹은 돌려 막기라거나.

그러나 오늘 있었던 일은 앨리스의 정신을 지탱하고 있던 기둥 중 하나를 완전히 박살 내버리는 일이었다.

그것도 앨리스 백작 영애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무력, 정치력, 통솔력 중 한 축을 말이다.

가장 큰 기둥이 박살 났으니,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것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

결국, 지금까지 정신력으로 막고 있던 설움과 외로움, 그리고 슬픔과 분노가 둑이 터진 듯한 번에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고작, 고작 다른 데서 중간이나 하려고 내가 이 노력을 한 거야? 고작? 심지어 성좌도 아니야. 시민, 필멸자라고!"

"그, 가차랜드에선 죽음이란 개념이 희박하오. 사실상 불멸자들­"

"조용히 해!"

앨리스 백작 영애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따위는 무시한 채 거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녀가 쌓아왔던 모든 것들이 옹알이처럼 흘러나왔다.

"내가 어째서 지금까지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내가 어째서 강함과 카리스마에 집착했는데? 그런데 뭐 어째? 여기선 중간?"

심지어 같은 성좌도 아니야. 그냥 시민이라고! 라는 말은 콧물과 함께 훌쩍거리는 바람에 잘 들리지 않았다.

이 말을 도미닉 경이 들었더라면 가차랜드의 성좌라고 해서 그렇게 무력이 강한 건 아니라고 말해줬겠지만, 아쉽게도 도미닉 경은 이 엉망진창인 말을 듣지 못했다.

"도미니 경을 보면 이렇게 말하고 싶었어! 내가 이렇게나 열심히 살았다고! 내가 이렇게나 좋은 여자라고! 도미닉 경을 다시 보면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그런데 이게 뭐야!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도 고작 중간? 주웅가안?"

아. 도미닉 경은 그제야 왜 앨리스 백작 영애가 짜증을 부리는지 알아차렸다.

앨리스 백작 영애는 도미닉 경에게 이토록 자기가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으나, 정작 도미닉 경이 볼 때 얼마나 우습게 보였을까라는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도미닉 경의 추측은 거의 정답이었다.

"집도 더 좋은 걸 사고, 돈도 더 잘 벌고, 심지어 200년 수련한 나보다 2년 수련한 도미닉 경이 더 강하고... 난, 난 대체... 대체 뭘 위해서..."

앨리스 백작 영애는 그 말을 끝으로 말없이 울기만 했다.

땅바닥에 쪼그려 앉아,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은 채 어깨를 파르르 떨며 훌쩍거리는 소리만이 도미닉 경의 귓가에 들렸다.

히메도 역시 앨리스 백작 영애를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히메는 앨리스 백작 영애가 못내 안타까운지 가까이 다가 갔다.

그리고 앨리스 백작 영애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갑자기 어깨에 톡톡 느껴지는 손의 감촉에 앨리스 백작 영애가 고개를 들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얼마나 서럽게 울었던지, 눈 주변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히메는 고개를 들어 올린 백작 영애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안타깝다는 눈으로, 앨리스 백작 영애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도미닉 경에게 꼬리 치려고 온 건 맞다는 거네요?"

히메가 갑자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표정이 확확 바뀌자, 앨리스 백작 영애는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구나... 도미닉 경에게 꼬리치려고 온 거구나..."

앨리스는 굉장히 자애로운 표정으로 앨리스 백작 영애의 양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자애로운, 그러나 그늘진 얼굴로 미소 지으며 앨리스 백작 영애의 귓가에 이렇게 속삭였다.

"죽을래요?"

그 섬뜩한 말에 앨리스 백작 영애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히메는 놀랍게도 아주 평온하고 자애로운 표정을 지으며, 앨리스 백작 영애만 겨우 들릴 수 있는 크기의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찜한 남자에게 침 묻히지 마요."

히메는 그렇게 말하며 앨리스 백작 영애를 꼭 안아주었다.

겉으로만 보기엔, 히메가 앨리스 백작 영애를 다독여주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본다면, 히메의 눈동자가 살기로 번들거리고 있다는 것과 앨리스 백작 영애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흔들리고 있다는 것에서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으리라.

히메의 거친 생각과, 앨리스의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도미닉 경.

아쉽게도, 도미닉 경은 전혀 이 상황에 대해서 알아차리지 못했다.

...

"저기 도미닉 경. 휴지 가진 거 있어요? 아무래도 눈 주변을 좀 닦아드려야 할 것 같아요."

히메는 도미닉 경에게 급하게 휴지를 찾았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젤리와 사탕은 들고 다닐지언정 휴지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편의점에서 빨리 사오리다."

하지만 도미닉 경은 다행스럽게도 돈을 가지고 있었다.

도미닉 경은 근처에 있는 편의점에 들러 휴지를 사려고 했다.

물론 단품으로만 파는 곳이 없었기에 제법 여러 군데를 들려야 할 것 같았다.

도미닉 경이 휴지를 사러 저 멀리 멀어지는 것을 본 히메가 앨리스에게 말했다.

"...이봐요."

움찔. 하고 앨리스의 몸이 떨렸다.

"이제 알겠죠? 제가 도미닉 경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히메는 그렇게 말하며 앨리스를 쳐다보았다.

앨리스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얼굴을 제대로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아마 겁을 먹은 게 아닐까? 히메는 그렇게 나름의 추측을 해 보았다.

"지금까지의 일은 다 잊을게요. 도미닉 경과 같이 있는 모습을 보여줘도 상관없어요. 하지만... 도미닉 경은 내 거예요."

히메는 당당하게 앨리스에게 도미닉 경에 대한 사랑을 주장했다.

히메가 성장한 것은 오해에 대한 것뿐만이 아니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도, 히메는 꽤 성장한 것이다.

물론 좋은 쪽으로 성장했냐고 물어본다면 고개를 갸웃할 뿐이지만, 일단 성장은 성장이었다.

앨리스 백작 영애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히메는 대답조차 하지 않는 앨리스 백작 영애가 답답했던지, 대답을 촉구하기 위해 말을 걸었다.

"이봐요­"

"도미닉 경, 지금 없죠?"

"...?"

히메는 앨리스에게 대답을 촉구하려고 했으나, 앨리스는 갑자기 이상한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녀는 여전히 눈물 자국과 부은 눈을 가지고 있었고, 몸이 달달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히메는 앨리스의 분위기가 방금 전과는 사뭇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니, 관찰할 필요도 없었다.

앨리스는 양손으로 양팔을 부여잡고, 희열에 찬 듯 몸을 부르르 떨며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아, 역시나. 책은 언제나 마음의 스승이라니까."

앨리스는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며 히메를 바라보았다.

"저기, 히메 양이라고 했던가요?"

앨리스는 방금 전 도미닉 경이 한 말을 기억해냈다.

"히메 양은, 연애 경험이 없는 편이죠?"

"...!"

히메는 앨리스의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도미닉 경에게 빠지기 전까진 연애를 해 본 적이 없었으니,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어떻게 아셨죠?"

"당연하죠. 방금 전의 상황에서 그렇게 강하게 행동하는데, 모를 수가 있나요."

그렇게 말한 앨리스는 품속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그곳엔 굉장히 촌스러운 하트무늬 표지에 '사랑에 대한 5가지 논고'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앨리스는 책갈피가 된 부분을 잠시 열어 그곳에 적혀 있는 문구 하나를 읽었다.

"남자는 자존심이 강한 생물이기에, 보호받기보다 보호해 줄 수 있는 이에게 더 관심이 간다. 사랑에 대한 5가지 논고 47페이지 7째 줄."

앨리스는 그 문구를 마지막으로 책을 탁 소리 나게 덮었다.

"그렇게 강해 보이는 여자는, 매력이 없는 법이랍니다, 히메 양."

히메는 방금 전과 다른 앨리스의 모습에 이 모든 것이 앨리스의 계획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히메는 앨리스를 노려보았다.

앨리스는, 히메의 생각처럼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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