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0화 〉 [369화]삼자대면
* * *
도미닉 경과 앨리스가 시내에 가구를 사러 간 그 시각.
도미니카 경은 집에서 옷을 갈아입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앨리스 백작 영애는 여자였지. 이런저런 게 더 필요할 텐데, 도미닉 경이 그런 걸 알고 있으려나."
도미니카 경은 진지하게 이 의제에 대해서 걱정하기 시작했다.
도미니카 경이 잘못 기억하는 것이 아니면, 앨리스 백작 영애는 이 집에서 약 한 달, 혹은 그 이상을 있을 예정이었다.
그렇다면 당연하게도 이런저런 물건들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도미니카 경이야 하도 전장에서 구른 경험이 있다 보니 간단한 화장이나 편한 옷으로 만족하는 편이었지만, 앨리스 백작 영애는 귀족이었다.
귀족인 만큼 입고 먹고 쓰는 모든 것이 제법 고급일 터.
물론 이는 도미니카 경의 오해였다.
앨리스 백작 영애는 척박한 페럴란트 출신이었고, 그만큼 치장에 신경을 쓸 여력이 되지 않았다.
이는 곧 습관으로 굳어져 앨리스는 그다지 치장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앨리스가 가차랜드에 왔을 때 제법 잘 입은 것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 사람들도 있겠지만, 사실 그건 업무용 의상이었다.
업무용 의상과 평상복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만큼 앨리스는 치장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이를 모르는 도미니카 경은 앨리스에게 화장품이나 세면도구들 같이 이런저런 자잘한 것들이 필요할 것이라고 여겼다.
"어쩔 수 없지. 보자, 저번에 갔던 가구점이..."
도미니카 경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지도 앱으로 가구점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사야 할 가구가 제법 많았으니 아무리 빨라도 그 근처에 있을 터.
도미니카 경은 빠르게 도미닉 경과 앨리스를 쫓아가 여러 가지 물건을 살 생각이었다.
마침 도미니카 경의 파운데이션도 거의 다 떨어져가기도 했고.
그렇게 도미니카 경은 집을 나와 가차랜드의 시가지로 향했다.
...
도미닉 경은 앨리스의 목에 쿠나이를 가져다 대고 협박하는 이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나 살기로 번들거리는 눈과 같이 이질적인 모습이 보이긴 했으나, 그녀는 분명 히메였다.
"히메 공?"
"아, 도미닉 경."
히메는 도미닉 경의 말에 급격하게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녀의 머리에 달린 여우 귀가 살랑거리고, 그녀의 꼬리가 맹렬하게 흔들거렸다.
"도대체 뭐 하는 거요?"
"뭐 하는 거... 라뇨?"
히메는 도미닉 경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야, 도미닉 경에게 꼬리치는 여우 하나에게 따끔한 충고를 하고자"
"히메 공."
"읏?"
도미닉 경은 히메의 말을 듣고 히메가 현재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동안 히메와 마주쳤던 기간이 얼마나 길었던가.
그렇기에 히메의 모습이 이상하다는 건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도미닉 경은 히메에게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 갔다.
히메는 갑자기 한 발자국 가까워진 도미닉 경의 모습에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나려고 했지만, 그녀는 앨리스의 목을 쿠나이로 겨누고 있었기에 뒤로 물러날 수 없었다.
대신 그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는데, 도미닉 경이 가까워질 수록 히메의 숨소리는 점점 더 거칠어져갔다.
"그, 또 무슨 오해를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진정하시오."
히메는 도미닉 경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음에도 움직이지 못했다.
현재 히메는 이성을 반쯤 잃어 버린 상태였고, 도미닉 경을 사랑하는 마음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어 머릿속이 더욱 혼란해진 상태였다.
결국 히메는 도미닉 경에게 손목을 붙잡히고 말았다.
"...!"
히메는 손목에서 느껴지는 거칠고 우악스러운 커다란 손의 감촉에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히메는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도미닉 경의 옆에 있는 여자에 대한 질투보다, 도미닉 경에 대한 마음이 더 컸기에 이성이 돌아올 수 있었다.
물론 도미닉 경은 그런 사실을 몰랐기에 여전히 히메의 손목을 붙잡고 히메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도, 도미닉 경? 저 정신 차렸으니까..."
"아."
히메는 도미닉 경의 시선이 부끄럽다는 듯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그러고는 도미닉 경에게 이제정신을 찾았노라고 말했다.
도미닉 경은 그제야 히메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히메는 도미닉 경이 잡은 손목을 매만졌다.
그러고 보니 도미닉 경과 이렇게 스킨쉽을 했던 적이 있었나?
도미닉 경의 굳센 손이 강하게 잡은 손목엔 도미닉 경의 손가락 모양의 붉은 자국이 생겼지만, 히메는 그 자국을 매만지며 어째서인지 기뻐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직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었다.
"정신을 차렸다니 다행이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도미닉 경은 히메가 정말 제정신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목에 쿠나이가 겨누어져 있었던 앨리스 백작 영애를 향해 괜찮은지 물었다.
"괜찮소?"
"응? 아. 응."
앨리스 백작 영애는 놀란 눈으로 조금 전까지 쿠나이가 닿아 있었던 목을 매만졌다.
그녀는 조금 전 순식간에 일어났던 기습에 크게 놀란 상태였다.
그녀는 한 때 페럴란트를 수호하는 기사 중 하나였고, 페럴란트의 기사단을 이끄는 귀족이었으며 마족들과의 전투에 이골이 나 있던 지휘관이었다.
또한 수백 년 동안 하얀 까마귀 아래에서 챔피온 일하며 성좌로서의 입지를 제법 굳건히 다져온 자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이토록 무력하게 뒤를 내주었다?
앨리스 백작 영애는 아르쿠스가 썼던 성 도미닉 경의 서에 적힌 내용을 기억해냈다.
'그곳은 전사들의 전당이 확실했다. 지나가는 사람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은 이가 없었으며...'
역시나 여긴 전사들의 전당이구나.
이렇게 가냘픈 여성도 이렇게나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다니!
그렇게 생각한 앨리스 백작 영애는 갑자기 히메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여기서 얼마나 강한 거죠?"
앨리스 백작 영애의 말에 히메가 이상하다는 눈으로 앨리스를 바라보았다.
물론 앨리스 백작 영애도 아무 생각 없이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은 아니었다.
이 질문은 히메에 대한 앨리스의 호승심이었다.
앨리스 백작 영애는 페럴란트에서도 손꼽히는 강자였다.
도미닉 경과 같이 변칙적인 강함이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강함으로 따진다면 페럴란트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자신이 있었다.
물론 이는 도미닉 경이 아직 살아 있을 당시의 일이었고, 하얀 까마귀 휘하의 성좌가 된 지금은 성좌들까지 포함해 세 손가락 안에는 들어가리라 자부하는 상태.
그런 앨리스의 감각을 속일 정도라면, 히메는 꽤 강한 축에 속하는 사람일 것이다.
앨리스는 히메가 이 전사들의 전장, 가차랜드에서도 손꼽히는 강자이기를 바랐다.
그래야 그녀의 자존심이 덜 상할 테니까.
그러나 히메의 대답은 앨리스의 기대를 무참히 박살 내고 말았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 중간보다 약간 아래 정도일 거예요."
히메는 앨리스에게 알아서 뭐 하려고 그러냐는 투로 말하려고 했으나, 이내 도미닉 경이 옆에 있음을 기억하고 최대한 예의 바르게 말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눈앞에 있는 여성은 도미닉 경과 꽤 잘 아는 사이 같았으니, 잘못하면 도미닉 경이 히메에게 실망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히메는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 강함을 말했다.
히메는 3성 근접 딜러였고, 스탯보다는 치명타와 유틸리티의 비중이 큰 딜러였다.
그리고 이런 딜러는 전체적으로 중간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현재 6성 초월 단계가 새롭게 추가된 상태였으니 3성이라는 자리는 숫자 상 중간보다는 약간 아래 단계였다.
그러한 이유로 히메는 자신을 중간보다 약간 아래라고 말한 것이다.
"중간보다 약간 아래...?"
앨리스는 히메의 말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녀의 생각엔 히메는 가차랜드에서도 손꼽히는 강자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히메의 무력은 앨리스와 비교해서 크게 다를 것은 없어 보였다.
히메가 앨리스의 뒤를 몰래 점하기는 했으나, 칼 끝에서 전해지는 무력의 느낌은 앨리스가 조금 우위였다.
정면에서 싸우면 앨리스의 힘겨운 승리.
기습을 당한다면 히메의 힘겨운 승리.
앨리스가 두 사람이 싸울 때를 예측했을 때의 결과였다.
앨리스는 페럴란트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자.
가차랜드에 와서도 그 자신감은 여전했다.
"겨우 중간보다 약간 아래라니..."
그러나 그 자신감은 히메를 만나고 나서 완전히 깨어지고 말았다.
앨리스는 페럴란트에서만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일 뿐, 가차랜드에선 고작 절반도 가지 못 하는 여기저기 널린 그저 그런 강자였다.
물론 페럴란트와는 달리 가차랜드는 시스템의 보조가 있었기에 오히려 앨리스의 경지는 더욱 대단한 것이었으나, 가차랜드에 대해서 잘 모르는 앨리스가 그런 걸 알 리가 없었다.
"..."
앨리스는 자기 경지에 대한 자신감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를 지탱하던 자존심이 무너진 그 순간, 그녀는...
"...흑."
갑자기, 눈물 한 방울을 흘리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