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차랜드의 행복한 도미닉 경-369화 (369/528)

〈 369화 〉 [368화]미행

* * *

도미닉 경은 마치 난공불락의 요새와도 같았다.

"낮이라 그래? 그럼 밤엔?"

"괜찮소."

"아니, 기사도에 의하면 지양해야 한다고만 했지, 아예 거부하라고 까진 하지 않잖아."

"술은 사람을 무디게 만들 뿐이오. 잊을 게 많다면 모르겠으나, 하나하나가 즐거운 기억들 뿐인데 술을 마셔서 뭐 하오?"

앨리스 백작 영애는 처음엔 장난으로 시작한 것이었으나, 이제는 오기가 생겼다.

"옛 주군으로서의 부탁이어도 안 되는 건가?"

"..."

결국 앨리스 백작 영애는 비장의 수단을 쓰고야 말았다.

과거의 인연을 이용해 도미닉 경을 설득한다는 비장의 수단을.

놀랍게도 이 비장의 수단은 도미닉 경에게 효과적이었는지, 도미닉 경은 방금 전처럼 바로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

도미닉 경의 침묵은 제법 오랜 시간 이어졌다.

아무래도 스스로가 한 말이 있어서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앨리스 백작 영애는 그런 도미닉 경의 부담을 줄여주고자 약간의 여지를 주었다.

"그, 어렵다면 거절해도 돼."

"그럼 거절하겠소."

"아, 좀!"

도미닉 경은 백작 영애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거절 의사를 밝혔다.

"왜 그렇게 철벽을 치는 거야? 도대체 술 한 잔이 뭐라고!"

결국 앨리스 백작 영애는 폭발하고 말았다.

아무리 앨리스가 성좌 일하며 성격이 유순해지긴 했어도, 자꾸 무언가 꼬이고 잘못될 때 짜증이 나는 건 필멸자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아무래도 그녀가 원래는 필멸자 출신이라는 것도 한몫 하겠지.

아무튼 도미닉 경은 앨리스 백작 영애의 말에 잠깐 움찔하더니, 이내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처럼 옛 인연에게 철벽을 치는 건 이상한 일이었기에.

어째서일까, 어째서일까?

도미닉 경은 그 이유를 생각하기 위해 생각에 잠기자마자 문득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히메라는 사람의 얼굴을.

"...흠."

도미닉 경은 어째서 히메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는지는 몰랐지만, 머리 한 켠에 히메의 얼굴을 밀어 놓았다.

지금 문제를 찾는 데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계속해서 헛돌기 시작한 생각들.

결국 도미닉 경은 앨리스에게 백기를 들었다.

"나도 잘 모르겠소. 이렇게 완고하게 거절할 이유는 없을 것 같긴 한데..."

그때, 도미닉 경은 문득 도미닉 경과 앨리스를 바라보는 두 쌍의 시선을 발견했다.

엉성하게 골목의 벽 뒤에 숨어 빼꼼 고개를 꺼내는 두 사람.

"그,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소?"

도미닉 경은 앨리스에게 양해를 구하고 어째서인지 빤히 도미닉 경을 쳐다보는 마왕 뚜 르 방과 용사 뽀 르 작을 향해 걸어갔다.

마왕 뚜 르 방과 용사 뽀 르 작은 도미닉 경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설마 들켰을 것이라곤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도미닉 경이 바로 앞에 서서야 들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왜 숨어서 우리를 보고 있었소?"

"!"

"...!"

마왕과 용사는 어떻게 찾았냐는 듯 놀란 눈으로 도미닉 경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들의 처지에서는 완벽한 미행이었겠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으론 엉성하기 그지없었다.

마왕과 용사는 당황한 듯 종종걸음으로 작은 원을 그리며 뱅글뱅글 돌다가, 고민에 빠진 인디언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최근 보는 어린이 프로그램에서 고민이 있을 때마다 추면 고민이 해결된다고 배운 춤이었다.

그러나 춤을 춘다고 고민이 해결될 일이 있겠는가.

둘은 그저 흥겨울 뿐, 여전히 이 상황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결국 마왕과 용사는 서로를 바라보더니, 결의에 찬 표정으로 도미닉 경을 바라보았다.

마치 정면으로 돌파하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때였다.

"어? 이 아이들은 누구야?"

도미닉 경의 뒤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앨리스가 도미닉 경을 따라 마왕과 용사에게 다가온 것이다.

앨리스는 난생처음 보는 자그마한 2등신의 꼬마 마왕과 용사를 보며 눈을 빛냈다.

어째서인지 다소 꺼림칙한 느낌은 들었으나, 말랑말랑하고 귀여운 것을 보면 껴안고 싶은 마음이 먼저였다.

결국 앨리스는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당황하던 마왕과 용사를 끌어안고 들어 올렸다.

둘 모두 가볍고 말랑말랑했기에 앨리스가 동시에 들기엔 무리가 없었다.

"세상에. 말랑말랑해."

앨리스는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말랑말랑함에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방금 전 도미닉 경의 철벽같은 거절을 잊어버릴 정도로.

마왕과 용사는 갑자기 자기들을 들어 올린 앨리스의 행동에 당황해 그 짧은 팔다리를 버둥거리다가 이내 추욱 늘어졌다.

앨리스의 키가 제법 높은 탓에 바둥거리다가 떨어지면 분명 무릎이나 팔꿈치가 다칠 수도 있었으니까.

대신 마왕 뚜 르 방과 용사 뽀 르 작은 앨리스의 품에 몸을 맡기고 느긋하게 늘어지는 것을 택했다.

"이 아이들은 누구야? 도미닉 경과 아는 사이인가?"

앨리스는 이 얌전한 아이들이 더욱 마음에 들었는지 마음껏 볼을 부비적거리며 히죽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도미닉 경은 마왕 뚜 르 방과 용사 뽀 르 작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마왕 뚜 르 방과 용사 뽀 르 작이오. 이름만 그럴 뿐, 굉장히 해가 없는... 뭐 그런 이들이라고 생각하면 되오. 왜 우리를 미행하듯 보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도미닉 경은 뚜 르 방과 뽀 르 작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뚜 르 방과 뽀 르 작은 도미닉 경에게 미행을 한 이유를 설명이라도 하려는 듯 팔다리를 다시 바둥거리기 시작했다.

"!"

"?"

"...!"

"!"

도미닉 경은 여전히 마왕 뚜 르 방과 용사 뽀 르 작의 언어를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대충 그 느낌을 통해 앨리스에게 그들의 말을 번역했다.

"지나가던 길에­"

"지나가던 길에 새로운 성좌가 보이길래 신기해서 쳐다보았다. 가차랜드에 있는 성좌는 다 알고 있는데, 처음 보는 성좌가 있어서 누구인지 알아보고는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런데 그런데 그러다가 도미닉 경에게 들켜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잡혀 있는 것이다. 그러니 큭! 죽여라!...라는데?"

앨리스는 유창하게 마왕과 용사의 말을 번역했다.

심지어 중간에 말을 더듬은 부분까지 완벽하게 번역된 상태로 말이다.

"!"

"?"

"어떻게 이 말을 알아들었느냐고? 그야... 성좌가 되고 나서 제 2 외국어로 마족들의 고유어를 공부했으니까. 페럴란트는 마족들의 침략으로 고통을 받던 곳이라, 마족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고 싶었거든."

앨리스 백작 영애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뭔가 찜찜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나저나 얘네들은 왜 고대 언어를 쓰고 있는 거야?"

"...마왕과 용사라서 그런 것 아니겠소?"

"아."

앨리스는 도미닉 경의 말에 다시 마왕 뚜 르 방과 용사 뽀 르 작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전혀 마왕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가차랜드니까 말이오. 우리가 아는 마왕과는 다른 거 아니겠소?"

"그런가..."

앨리스는 도미닉 경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페럴란트에서 마왕이라고 하면 차원 포식자 레기온을 말하는 것이었지만, 여기서는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앨리스는 다시 한번 마왕과 용사를 내려다보았다.

둘은 마치 앨리스의 품에 안긴 고양이와 강아지처럼 얌전했고, 앨리스가 빤히 쳐다볼 때마다 맑고 초롱초롱한 큰 눈으로 앨리스를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은 앨리스에게 있어서 어떤... 모성애를 자극했다.

"도미닉 경이 죽지 않았더라면, 그때 이 만한 아이들이 있었을까."

"...? 뭐라고 했소?"

"아니, 아니야."

앨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마왕과 용사를 다시 내려놓았다.

마왕과 용사는 얌전하게 내려주길 기다렸으나, 이내 지금 심부름을 가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다시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

"!"

마왕과 용사는 땅에 두 발을 내딛자마자 바로 도미닉 경과 앨리스에게 배꼽 인사를 건네고는 저 멀리 도도도 뛰어갔다.

더 늦기 전에 심부름부터 해야 해.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채워진 상태였으니까.

그 와중에 작별 인사를 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마왕과 용사는 꽤 예의 바른 성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마왕이 예의 바르다는 건 조금 이상한 일이었지만.

앨리스는 저 멀리 멀어지는 마왕 뚜 르 방과 용사 뽀 르 작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어쩐지 멍한 표정으로 말이다.

"그나저나 마왕과 용사가 성좌들과 아는 사이라는 건 처음 알았소."

도미닉 경이 마왕과 용사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마왕과 용사는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많구려. 언제 한 번 참모장과 만나서..."

도미닉 경은 그렇게 말하며 앨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영혼이 빠진 것 같은 얼굴로 멍하게 서 있는 앨리스를 발견했다.

"...주군?"

"응? 어? 아. 응. 왜?"

도미닉 경은 상태가 이상해 보이는 앨리스가 걱정되어 앨리스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앨리스.

"괜찮소? 갑자기 멍한 상태가 되었길래..."

"아, 괜찮아. 그냥..."

앨리스 백작 영애는 다시 한번 마왕과 용사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나도 저런 아이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어서."

앨리스는 진담 반 농담 반의 말을 꺼냈다.

사실, 그녀가 멍해진 이유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마왕과 용사가 마지막으로 한 말에 당황해서 그런 것이었다.

'그럼, 둘 모두 데이트 잘해!'

'엄청 잘 어울리는 커플이네. 사귀는 거 맞지?'

도미닉 경의 귀에는 그저 '!'로 들렸겠지만, 정확하게 그 언어를 아는 앨리스는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잘 어울린다니. 앨리스는 그 말을 다시 떠올리곤 다시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미닉 경은 눈치 없는 말을 꺼냈다.

"...혹시 독신이셨소?"

"...응."

앨리스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도미닉 경에게 계속 술 한 잔을 권하는 거야."

앨리스 백작 영애는 용기를 내어 도미닉 경에게 말했다.

"나에게, 기회 한 번은 주지 않겠어?"

"..."

앨리스 백작 영애의 저돌적인 말 한마디.

도미닉 경은 갑작스러운 기습에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얼빠진 모습을 보던 앨리스는 도미닉 경의 눈치를 보더니, 이내 푸흐흐 웃기 시작했다.

"농담이야. 그냥 술 한 잔 하고 싶어서 한 말이니까 크게 신경 쓰지 말고­"

"­죽인다."

"...응?"

앨리스는 문득 등 뒤에서 서늘한 감각이 느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목에서 무언가 한 방울 또르르 흘러내리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차렸다.

"나보다 먼저 도미닉 경에게 고백한 이를 죽인다. 그 생각뿐이었다..."

추가적으로, 등 뒤에 있는 이가 이를 악물고 있는 여성이라는 사실도 함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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