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7화 〉 [366화]앨리스 인 가차랜드
* * *
도미닉 경과 앨리스는 시내로 나왔다.
앨리스 백작 영애의 방을 꾸밀 가구를 사러 나온 것이다.
"나는 공주풍이 좋겠어."
앨리스 백작 영애가 도미닉 경에게 말했다.
"예전엔 그런 거 질색하시더니, 그새 취향이 바뀌셨소?"
도미닉 경은 아직 그가 페럴란트에 있었을 때를 생각했다.
그때의 앨리스 백작 영애는 굉장히 검소하고 단촐한 것을 좋아했다.
그녀가 가진 것 중 가장 화려한 것은, 그녀의 아버지인 페럴란트 백작에게서 물려받은 백금 갑옷 뿐이었다.
"뭐, 지배자로서 과소비하긴 그렇잖아."
도미닉 경의 물음에 앨리스 백작 영애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애초에 뭔가 핑크핑크한 걸 좋아하긴 했어. 하지만 알다시피... 페럴란트에는 분홍색이 귀하잖아?"
도미닉 경은 잠시 페럴란트를 떠올렸다.
페럴란트는 밝은 색상과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메마른 갈색과 우울한 잿빛이 가득한 곳.
가끔 꽃이 피기는 했으나 그 역시 시들시들한 색상이었을 뿐, 유쾌하고 밝은 색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페럴란트에서 밝은 색을 구하려면 웬만한 판금 갑옷 하나를 구하는 만큼의 돈이 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페럴란트는 매우 척박한 곳이다.
모두가 부족하게 살고, 모두가 힘겹게 살아가는 곳.
그런 곳이었으니, 앨리스 백작 영애도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백금 갑옷을 살 정도로 과소비가 심했던 그의 아버지 페럴란트 백작이 어떻게 백작 영애에게 권력을 물려줘야만 했는지를 봤으니, 더더욱.
"뭐, 이제는 눈치 보지 않아도 되니까. 내 돈으로 내가 산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어? 게다가 여긴 페럴란트도 아니고."
앨리스 백작 영애는 꽤 신난다는 듯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녀는 지난 수백 년의 세월을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듯 머릿속으로 온갖 가구들을 떠올렸다.
대개 한 나라의 왕이나 왕비나 쓸법한 고급 가구들이었다.
그렇게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자니, 어느새 가구점에 도착하게 된 도미닉 경과 앨리스.
"여기요. 내가 자주 가는 곳이기도 하오."
"흠."
앨리스는 가구들 사이를 둘러보았다.
그녀의 마음에 드는 가구를 찾기 위해 훑어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내 앨리스는 그녀가 원하는가구가 여기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원하는 분홍색 가구는 없는데?"
앨리스 백작 영애는 시무룩해졌다.
"그냥 싼 걸로 사라는 건가? 예전처럼?"
"그게 아니오."
도미닉 경은 갑자기 울먹거리는 앨리스 백작 영애의 행동에 당황하며 가구들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가차랜드의 가구들은 페럴란트와는 다르오. 이걸 한 번 보시겠소?"
도미닉 경이 침대 하나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자, 가구에서 UI가 나타났다.
떠오른 창에는 컨셉과 색상을 정할 수 있는 메뉴가 따로 있었는데, 도미닉 경은 여기서 컨셉을 공주풍으로 바꾸고 색상을 핑크로 바꿨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수수하던 침대가 공주님이 쓸 법한 프릴 가득한 분홍색 침대로 변했다.
"이곳의 가구는 원하는 대로 바뀌오. 그러니 그냥 하나 사기만 하면 나머진 집에 가서 수정해도 된다는 거요."
"세상에."
앨리스 백작 영애는 섭리를 벗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에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가차랜드가 유별난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법칙이 다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건... 이건 확실히 놀랍네. 한 방 먹었어."
앨리스는 무엇을 한 방 먹었는지는 몰랐으나, 일단 한 방 먹은 것처럼 휘청거렸다.
그만큼 그녀가 받은 문화적 충격이 강했다는 뜻이리라.
"아무튼, 여기서 필요한 가구를 사서 가면 되오. 이것저것 고를 필요도 없소. 효율적이지."
도미닉 경은 그리 말하며 근처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일단둘러보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하시오. 난 여기 있다가 갈 때 드는 것만 도와드리리다."
도미닉 경은 앨리스 백작 영애에게는 인벤토리가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페럴란트에도 마법사들은 있었지만, 그들이 아공간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
도미닉 경의 예상은 정확해서, 앨리스 백작 영애는 놀란 눈으로 도미닉 경을 바라보았다.
"제법 많을 텐데, 혼자서 도와준다고? 사람들을 더 불러야 하지 않을까?"
"괜찮소. 인벤토리가 있으니."
도미닉 경은 인벤토리를 열어 안에서 젤리 몇 개를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도미닉 경에게 있어선 이제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앨리스가 보기에 그건 도미닉 경이 허공에서 무언가를 소환한 것처럼 보였다.
"도미닉 경, 마검사였어?"
"아니오. 마법은 배운 적 없소."
앨리스 백작 영애는 도미닉 경의 말에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마법이 아니라면, 아무래도 가차랜드의 성좌들에게 은총을 받은 모양이네.
그렇게 생각한 앨리스 백작 영애는 시무룩해졌다.
"이토록 성좌들에게 사랑받는다니. 내가 설 자리가 있기나 할까?"
"뭐라고 했소?"
"아니, 아니야. 꽤 신기해서."
앨리스는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다행스럽게도 큰 소리를 낸 건 아니었고, 들릴락 말락하게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기에 도미닉 경이 그 말을 듣는 일은 없었다.
앨리스는 그 사실을 다행으로 여기며, 다시 한번 속으로 계획을 하나 짜기 시작했다.
도미닉 경과 관련된 계획 하나를.
"그, 가구 산 다음에 혹시 시간 있어?"
앨리스는 방금 도미닉 경이 설정을 바꾼 분홍색의 공주 침대를 바라보며 말했다.
"가차랜드의 커피, 먹어보니 맛있더라. 아까 건 도미닉 경이 샀으니, 이번엔 내가 살까 싶어서."
"뭐, 좋소."
도미닉 경은 흔쾌히 앨리스의 제안을 수락했다.
커피를 사준 것에 대한 보답이라는 명분이 있었으니,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좋아.
앨리스 백작 영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라도 도미닉 경이 거절했더라면, 또 다른 새로운 계획을 수립해야 했을 것이니까.
앨리스 백작 영애는 문득 지금 상황보다 전장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전장은 계획이 어그러질지언정, 그녀가 가장 잘 아는 분야였으니까.
이렇게 인간관계에 대한 것은 그녀의 분야가 아니었다.
영주였을 때에도, 그리고 200년간 성좌로서의 삶 사이에서도.
...
도미닉 경과 앨리스가 가구점에서 한창 가구를 고르고 있을 때, 그 주변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이가 하나 있었다.
다들 예상했겠지만, 히메였다.
"...저 여자는 누구지?"
히메는 놀라울 정도로 대단한 은신 능력으로 전봇대 뒤에 숨은 뒤 가게 안에 있는 도미닉 경과 앨리스를 바라보았다.
하얀 머리에 늘씬한 미녀. 히메는 어째서인지 놀라울 정도로 그녀의 외모에 질투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혹시 도미닉 경의... 여자 친구?"
히메는 갑자기 눈을 부릅 뜨며 앨리스를 노려보았다.
갑작스러울 수도 있지만, 이는 히메의 깊은 생각의 결과였다.
도미닉 경의 성격을 아주 잘 아는 히메는 도미닉 경이 저 정도로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게 두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았다.
그건 바로 자기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나도 저 거리 안에 들어가기까지 얼마나 노력했는데!
히메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었다.
물론 이는 히메가 생각과 조심성이 많아서 그런 것이었지만, 이미 질투에 사로잡힌 히메는 그런 것 따위...
"...아니야. 오해겠지."
...극복해냈다!
"저번에도 그랬고, 저저번에도 그랬잖아. 그리고 항상 오해였다고 밝혀졌고."
그렇게나 도미닉 경과 친하면서, 도미닉 경의 심리를 모르니? 라고 히메는 히메 자신에게 말했다.
그렇다.
히메는 성장했다.
과거 도미닉 경과 종자 앨리스와의 관계에 대한 오해.
탱커 노조 소속 탱커 판데모니아와의 오해.
도미니카 경에 대한 오해 및 그 외에 서술되지 않았던 오해 들까지.
히메는 질투심에 그 많은 것들을 질투해왔으나, 정작 그중에선 오해가 아닌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은 히메의 일방적인 오해로 생긴 질투였고, 히메는 오해를 몇 번 겪고 나자 마침내 학습이란 것을 한 것이다.
"아마 도미닉 경의 지인이겠지. 도미닉 경은 상냥해서 어려운 상황에 부닥친 지인을 가만히 두질 못하니까."
히메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어째서인지 개운한 표정으로 전봇대 뒤에서 나왔다.
"뭐, 이번에도 별거 없는 거겠지."
히메는 그렇게 말하면서 지나가던 길 그대로 사라졌다.
히메는 오늘도 성장했다.
그러나 하필 오늘 성장해 버린 것은 왜란 말인가?
...
"세상에. 그거참 편리하네."
앨리스 백작 영애는 도미닉 경이 가진 인벤토리의 존재에 대해 혀를 내부두르며 감탄했다.
앨리스가 산 가구는 무려 수십 종이 넘어갔지만, 도미닉 경의 인벤토리는 그 모든 것을 수용하고도 버거운 기색이 없었다.
"별것 아니오. 가차랜드에선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난 가차랜드가 처음이니까. 신기한 건 당연한 일이잖아?"
도미닉 경은 앨리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자기 자신도 처음 가차랜드에 왔을 때 얼마나 어리버리했던가.
지금이야 가차랜드에 대해서 꽤 잘 안다고 자부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도미닉 경은 초보자 그 자체였다.
"그것도 그렇소."
도미닉 경은 앨리스의 말에 긍정했다.
"그나저나, 내가 커피 사겠다고 했었지? 가구 사는 것도 도와줬으니 좀 더 비싼 걸 사주고 싶은데..."
"?"
도미닉 경은 앨리스의 말에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째서인지 교태로운 표정으로, 손끝으로 앞머리를 귀 뒤쪽으로 넘기며 도미닉 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술... 먹으러 갈래?"
그렇게 말한 앨리스는 말없이 도미닉 경을 바라보기만 했다.
도미닉 경은 앨리스 백작 영애의 말에 입을 열지 않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