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6화 〉 [365화]앨리스 인 가차랜드
* * *
"여기가 바로 도미닉 경의 집이구나?"
앨리스는 도미닉 경의 집이 신기한 듯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앨리스가 영주로 있던 영주 성만큼은 아니었지만, 기사로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장원에 비할 정도는 되었으니까.
"자수성가했네."
"페럴란트에 쌓은 재화를 교환해서 살 수 있었소."
"교환했다고?"
"그렇소. 처음에 가차석이 없을 때 환전소에서 교환했소."
도미닉 경의 말에 앨리스는 약 190년 전쯤 도미닉 경의 무덤에 있던 재화 일부가 도굴당했다는 것이 떠올랐다.
도미닉 경은 비록 농노 출신이었지만 가장 기사다웠고, 가장 성실했으며, 가장 타의 모범이 되는 기사였다.
덕분에 도미닉 경을 선망하는 귀족 기사들도 적지 않았다.
결국 그의 사후에 그의 무덤은 도미닉 경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려는 귀족 기사들의 재화로 가득 채워졌었다.
어쩌면 그런 재화를 노린 도굴꾼들이 있는 것은 흔하디흔한 일이었다.
비록 도굴꾼들은 잡히지 않았지만, 당시 피해를 유추한결과 대략 페럴란트에서 넓은 장원 한 채를 살 수 있... 아하.
"맙소사. 그건 도미닉 경이 정당하게 가져간 것이었구나?"
앨리스는 이마를 탁 치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 그게 무슨 소리요?"
"아니, 그런 게 있어."
앨리스 백작 영애는 비밀이라는 듯 키득키득 웃었다.
도미닉 경은 앨리스 백작 영애가 왜 웃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피어올랐으나 이내 단념했다.
호기심은 일단 풀고 봐야 직성이 풀리는 도미닉 경으로서는 굉장히 이례적인 태도였다.
"안 물어볼 거야?"
앨리스 백작 영애는 재미없다는 듯 볼을 부풀렸다.
"예전엔 이런 상황에서 알려달라고 울고불고 애원하더니."
"그렇게 애원해도 안 알려 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오. 이런 적이 한두 번이었어야지."
도미닉 경은 앨리스 백작 영애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앨리스 백작 영애는 굉장히 성격이 나쁜 편에 속했다.
그는 비밀을 간직한 채 다른 이들에게 알려줄 듯 말 듯 간을 보다가 결국 애걸복걸하는 걸 보는 것을 즐겼다.
도미닉 경도 처음에는 앨리스 백작 영애에게 몇 번이고 당한 전적이 있었기에, 도미닉 경의 성격으로는 이례적으로 호기심을 포기하는 사례가 된 것이다.
"재미없네."
앨리스 백작 영애는 도미닉 경의 태도에 재미가 없다며 투덜거렸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알려줄 생각은 없었지만.
"아무튼, 이제 나를 당신의 장원에 초대 해주시겠습니까, 도미닉 경?"
"물론이오. 안으로 들어오시..."
앨리스는 도미닉 경에게 안으로 들어가도 되는지를 물었다.
여기에 오면서 이미 허락받은 상황이었기에 상관은 없었지만, 페럴란트의 예법대로라면 집주인에게 들어가도 되는지를 물은 다음에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를 어기면 페럴란트의 하얀 까마귀가 노해 약 3일 정도 불운한 일을 겪는다는 미신도 있었다.
그 하얀 까마귀 옆에서 일했던 앨리스는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튼 도미닉 경은 페럴란트의 예법대로 손님을 환영했다.
먼 곳에서 온 손님이든, 가까운 곳에서 온 손님이든 일단 안으로 들여 넉넉히 대접하는 것.
이 역시 페럴란트의 예법이었다.
척박한 페럴란트에 올 정도라면 정말 형편이 궁하다는 것이었기에 그런 이들에게 나누는 문화가 발달했다.
도미닉 경은 오랜만에 겪어보는 페럴란트식 문화에 피식 웃다가, 문득 방 안에 있을 누군가가 생각이 나 말끝을 흐렸다.
도미니카 경이, 스킨을, 갈아입었던가?
도미닉 경은 방금 전 식재료를 가져다 놓으려고 잠시 집에 들렸을 때 도미니카 경이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지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분명히 도미니카 경은... 스킨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그럼 사양 않고 들어간다."
"자, 잠시만 기다리시오!"
도미닉 경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앨리스를 붙잡으려고 했으나, 앨리스는 이미 현관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버린 후였다.
"어서 와. 방금 전엔 뭘 그리 바쁘게 다시 나... 간..."
"...응?"
앨리스 백작 영애는 어째서인지 메이드 복을 입고 있는, 어딘가 도미닉 경을 닮은 여자를 보았다.
그녀는 꽤 전투적인 흉부가 인상적인... 메이드였는데, 도미닉 경처럼 한쪽 눈이 없었다.
앨리스는 도미니카 경을 보고 나서 순간 생각이 멈췄다.
누구지? 도미닉 경의 동생? 도미닉 경의 누나? 도미닉 경의 아내? 도미닉 경의 어머니? 도미닉 경의 딸?
앨리스는 고개를 격하게 흔들었다가 다시 바라보기를 반복했다.
혹시라도 거울에 비친 도미닉 경을 잘못 본 것이 아닌가 싶어서였다.
그러나 도미니카 경은 분명히 가차랜드에서 살아가는 이였고, 고개를 흔든다고 해서 사라질 부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 누구지?"
이 충격적인 만남에서 그나마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도미니카 경이었다.
"앨리스 백작 영애요. 페럴란트에서 내 주군이었던."
"아."
도미니카 경은 그제야 눈앞에 있는 이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어딘가 안쓰러운 눈으로 앨리스 백작 영애를 쳐다보았다.
"그, 힘내요. 가차랜드가 좀 어지러운 곳이라 처음엔 적응이 힘들겠지만, 살다 보면"
"잠깐, 잠깐! 그런 게 아니오."
도미니카 경은 아무래도 앨리스 백작 영애가 죽어 가차랜드에 초대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도미닉 경은 도미니카 경의 오해를 정정했다.
"그녀는 성좌요. 이번에 가차랜드에 휴가를 왔소."
"휴가를?"
"그렇소. 페럴란트의 성좌로서 일하다가, 이번 기회에 나를 볼 겸 휴가를 왔다고 하오."
도미닉 경의 말에 도미니카 경은 다시 한번 앨리스 백작 영애를 바라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도저히 신성해 보이지 않...
도미니카 경은 그때 문득 성좌 아임 낫 리틀을 떠올렸다.
음. 믿을 만 해. 확실히 앨리스 백작 영애는 성좌가 맞군.
도미니카 경은 제멋대로 납득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런 분이 이곳엔 무슨 일로?"
도미니카 경은 특유의 친화력으로 앨리스 백작 영애를 소파에 앉히고 트렁크를 들어 구석에 두었다.
그리고 모자와 코트를 받아 옷걸이에 걸어 둔 뒤, 앨리스 백작 영애의 옆에 딱 붙어 앉았다.
누가 보더라도 아가씨를 모시는 메이드같은 모습!
"설마 휴가 기간 동안 여기서 살기 위해 온 것은 아니겠죠?"
움찔.
도미니카 경의 말에 앨리스는 움찔했다.
그러려고 온 것이 맞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앨리스 백작 영애도 무려 200년이나 하얀 까마귀밑에서 뻔뻔함을 배웠다.
"그러려고 온 거지. 여행지에 지인이 있어서 도움을 좀 받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잖아?"
그렇게 말한 앨리스는 오히려 도미니카 경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내 소개는 끝났는데, 어째서 당신은 소개하지 않지? 예의범절이 우리와 조금 다른가?"
"...실례했습니다. 페럴란트의 도미니카 경입니다."
도미니카 경은 실수했다는 듯 앨리스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앨리스는 기세 싸움에서 이겼다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다가, 문득 페럴란트에는 이런 여기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페럴란트 출신이라고? 어디에?"
"그건 내가 말해 줄 수 있소."
둘의 대화에 도미닉 경이 끼어들었다.
"그녀는 평행세계의 나요. 두 세계가 합쳐지는 바람에 같이 살고 있소."
"...?"
도미닉 경은 정말 간단하게 설명을 마쳤으나, 앨리스는 도미닉 경의 말을 거의 이해할 수 없었다.
평행세계는 무엇이고, 세계가 합쳐진다는 건 또 무슨 뜻이란 말인가?
"페럴란트와 가차랜드가 서로 다른 차원이지만 페럴란트 출신인 내가 가차랜드에 있듯, 그녀도 그런 거라고 보면 편하오."
"흠."
앨리스 백작 영애는 도미닉 경의 말을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단 여기서 살기로 한 이상 얼마든지 그녀의 정체를 알아낼 시간은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나저나 내 방은 어디야? 일단 짐을 풀고 싶은데."
앨리스는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려고 도미닉 경에게 방까지 안내해 달라는 부탁했다.
"아, 잠깐 기다리시오."
도미닉 경은 잠시 건물의 시스템을 이리저리 조작하더니, 이내 도미닉 경의 방과 도미니카 경의 방을 지나 새롭게 나타난 방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여기를 쓰면 되오, 주군."
도미닉 경은 빈 방의 문을 열며 앨리스에게 말했다.
"혹시 가구가 필요하면 말하시오. 나가서 사오리다."
"세상에."
그러나 그런 도미닉 경의 말은 앨리스 백작 영애에게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이 신비한 현상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하다니, 도미닉 경은 가차랜드의 성좌들에게 꽤 사랑받는 가 봐?"
"...? 그게 무슨 소리요?"
도미닉 경은 앨리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앨리스는 성 도미닉 경의 서에 적힌 것으로만 가차랜드를 알고 있었다.
이른바 책으로 배운 지식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앨리스는 도미닉 경이 이렇게 빈 방을 만들어내는 이적을 일으킬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가차랜드의 성좌들의 관심을 받고 있어서라고 생각했다.
페럴란트에서 하얀 까마귀의 관심을 받은 자들이 그러하듯 말이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이미 가차랜드의 삶에 익숙해진 상황이라 앨리스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다시 한번 말해 줄 수"
도미닉 경은 앨리스에게 추가적인 설명을 부탁하려고 했으나, 앨리스는 이미 이 빈 방의 내부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구석구석을 구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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