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5화 〉 [364화]앨리스 인 가차랜드
* * *
앨리스 백작 영애는 도미닉 경의 신원 보증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도미닉 경이 기억하는 모습에서 조금씩은 다르긴 했으나, 그녀는 확실한 앨리스 백작 영애였으니까.
물론 약간의 벌금을 물어야만 했다.
폭행 사건에 대한 벌금이었다.
도미닉 경과 앨리스는 경찰서에서 나와 가차랜드의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둘 사이에는 어색한 기류가 맴돌고 있었다.
"그, 주군."
"으, 응?"
도미닉 경은 앨리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오랜만에 불러 보는 호칭이 어째서인지 낯설었다.
이는 앨리스도 마찬가지였는지 주군이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 도미닉 경을 바라보았다.
도미닉 경은 앨리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했다.
물어보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어째서인지 말이 목에서 턱턱 걸리며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도미닉 경은 오랫동안 어쩔 줄을 몰라하더니, 한참 뒤에야 오랜만에 만난 오랜 전우이자 주군에게 짧은 말 한마디를 겨우 꺼낼 수 있었다.
"...잘 지내셨소?"
도미닉 경의 말에 앨리스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저 먼 곳을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난 잘 지냈지. 넌?"
"나도 잘 지냈소."
그 말을 끝으로 둘 사이에는 또 한 번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둘은 말없이 묵묵히 거리를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도미닉 경은 문득 평소에도 자주 가던 카페를 발견했다.
마침 잘되었군. 도미닉 경은 이 어색한 분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앨리스 백작 영애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카페에서 커피라도 한 잔 하시겠소?"
"커피? 아. 좋지."
앨리스는 도미닉 경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둘 사이에 흐르던 어색한 분위기가 약간은 가신 기분이 들었다.
...
"여기 카라멜 마끼아또와 아이스 카페라떼 나왔습니다."
"...고맙소."
"잘 마실게요."
어색함이 약간은 가신 듯한 기분은 말 그대로 기분이었다.
여전히 둘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만이 감돌았고, 이는 커피가 나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커피를 받아들 때 말을 내뱉은 걸 제외하면 다시 침묵의 연속.
정말 숨이 턱턱 막히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이 불편한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말을 꺼낸 쪽은 도미닉 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성좌라고 하던데,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도미닉 경은 앨리스 백작 영애와 만나자마자 가졌던 의문들 중 하나를 입 밖으로 꺼냈다.
앨리스 백작 영애는 갑작스러운 도미닉 경의 질문에 사레가 들렸는지 입을 틀어쥐고 콜록거리기 시작했다.
나름 도미닉 경이 이 문제를 물어볼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물어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자, 잠시만..."
앨리스 백작 영애는 사레가 진정될 때까지 도미닉 경에게 잠시만을 연신 말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태가 조금 진정되자, 앨리스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며 호흡을 안정시키곤 도미닉 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말하면 좋을까..."
"이왕이면 자세히 말해주시오. 그"
"성좌가 된 이유부터?"
"...그렇소."
도미닉 경은 자기가 죽은 이후의 일을 모두 듣고 싶었으나, 일단 성좌가 된 이유부터 듣기로 했다.
나머지는 천천히 들어도 되겠지. 그런 생각 하면서 말이다.
앨리스는 도미닉 경의 말에 검지 손가락으로 탁자를 탁탁 내려쳤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주기적으로 톡톡.
마침내 생각이 정리되었는지, 앨리스 백작 영애는 말을 꺼냈다.
"사실 성좌가 된 건 우연이었어. 페럴란트를 구한 공을 인정받아 호국 영령이 되었거든. 이후에 하얀 까마귀 놈... 님에게 간택받아 챔피온으로서의 삶을 시작했지. 페럴란트에 위기가 있을 때마다 도움을 주는 뭐 그런 거 말이야."
앨리스는 잠시 아이스 카페라떼를 홀짝이더니, 별것 아니라는 듯 다음 말을 내뱉었다.
"그렇게 200년 정도 일했지. 덕분에 페럴란트에선 꽤 알아주는 성좌가 되었어."
"...?"
도미닉 경은 200년을 별것 아니라는 듯 말하는 앨리스의 모습에서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그나저나 200년이라니.
도미닉 경은 그가 가차랜드에 온 시기를 생각했다.
아무리 길게 잡아도 1~2년.
도미닉 경은 페럴란트와 가차랜드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의 간극을 알아내고는 혼란에 빠졌다.
"그나저나 200년이나 지났는데 도미닉 경은 그대로네? 아니, 조금 더 젊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난 이렇게 늙어서 백발 성성한 늙은이가 되었는데 말이지."
앨리스 백작 영애가 씁쓸하게 웃으며 그녀의 피부를 매만졌다.
도미닉 경이 보기에 그녀는 여전히 젊었을 적의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생각하기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200년이 아니라 2년이오."
"응?"
"아무리 길게 잡아도 2년이오. 이 가차랜드에서 내가 살아온 시각은."
도미닉 경은 앨리스 백작 영애에게도 가차랜드와 페럴란트 사이의 시간 차이를 설명했다.
"아무래도 가차랜드와 페럴란트 사이엔 100배의 시간 차이가 있는 것 같소."
"...그런가."
앨리스 백작 영애는 도미닉 경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이제 성좌였던 데다가, 200년이나 지난 페럴란트는 과학이 꽤 발달해 있었다.
차원 간의 시차 문제를 납득할 수 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생각해 보면 대단한 일이네. 기록에 따르면 거의 신의 대리인처럼 묘사되어 있던데, 2년 만에 그렇게 대단한 업적을 세웠... 잠깐."
앨리스 백작 영애는 도미닉 경의 업적에 놀라면서도 문득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와 세상에. 나 큰일 날 뻔했네."
"...? 무슨 일이오?"
"아니, 별 건 아니고. 나 휴가 쓸 때 페럴란트 기준이 아니라 가차랜드 기준으로 냈거든."
페럴란트 기준으로 냈으면 며칠 있지도 못했겠네. 라고 앨리스 백작 영애는 말했다.
페럴란트의 시각은 가차랜드의 100배였기에, 가차랜드의 하루는 페럴란트의 100일이었다.
그녀가 얼마나 오랫동안 휴가를 즐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하마터면 기차역에서 내리자마자 페럴란트로 돌아가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앨리스 백작 영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도미닉 경에게 말했다.
"그거 알아?"
"무엇을 말이오?"
앨리스 백작 영애는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도미닉 경에게 말했다.
"이거 유급 휴가야."
"...?"
"페럴란트 기준으로 수십 년을 유급으로 쉴 수 있는 기회라고! 가차랜드 만세!"
앨리스 백작 영애는 여기가 사람이 많은 카페라는 것도 잊은 채 만세를 불렀다.
"거 카페 혼자 씁니까? 가차랜드 만세!"
"뭐야, 재밌겠다! 다들 한다면 나도 끼지! 가차랜드 만세!"
"으, 으응? 가차랜드 만세!"
다행스럽게도 가차랜드의 사람들은 꽤 상냥하고 유쾌한 사람들이었기에 앨리스의 만세 선창을 받아주었다.
도미닉 경은 그가 기억하는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앨리스 백작 영애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어, 웃었다? 내가 우스운가, 도미닉 경?"
"아닙니다, 주군."
"그런데 왜 입꼬리가 올라가지?"
"기분 탓일 겁니다."
도미닉 경은 옛 기억에 잠겨 앨리스 백작 영애의 아래에 있을 때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이는 앨리스 백작 영애도 마찬가지였는지, 이제 그들은 어색한 분위기를 쇄신하고 점점 더 과거의 분위기로 변하고 있었다.
그렇게 약간은 유쾌하지만 그다지 영양가는 없는 잡담을 나누던 도미닉 경과 앨리스 백작 영애.
도미닉 경은 이 유쾌한 분위기에 휩쓸려 활짝 웃으며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문득, 갑자기 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도미닉 경은 그 생각을 바로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방금 전에 기록이라고 했소?"
"응. 성 도미닉 경의 서. 베스트 셀러지."
도미닉 경은 듣도 보도 못한 책의 이름에 눈살을 찌푸렸다.
도대체 그게 뭐란 말인가?
앨리스 백작 영애는 도미닉 경의 표정을 보고 도미닉 경의 생각을 읽었는지 성 도미닉 경의 서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전사들의 전당에 초대되었던 성인 아르쿠스가 그의 호위 오그레손과 같이 전사들의 전당에 들러 그 모습을 기록한 책이야. 본래는 전사들의 전당 전서라는 제목이었는데, 유독 도미닉 경에 대한 기록이 많아 다들 성 도미닉 경의 서라고 부르지."
앨리스 백작 영애는 그렇게 말하며 트렁크에서 종이 몇 장을 꺼냈다.
"이거 원본. 한번 볼래?"
도미닉 경은 앨리스 백작 영애가 건넨 종이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양쪽에 두 명의 여성을 거느린 채 용을 제압하는 도미닉경의 모습이 있었는데, 등 뒤에는 붉은 날개가 펼쳐져 있어 마치 천사나 성인처럼 보였다.
"...이게 도대체 뭐요?"
"글쎄. 도미닉 경이 모르면 누가 알까?"
도미닉 경은 이 이질적인 느낌의 그림에 어색함을 느꼈다.
분명 모습을 보면 도미닉 경과 닮아 있었으나, 도미닉 경은 도대체 이 그림이 무엇을 보고 그렸는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일단 잘 봤소."
도미닉 경은 다시 앨리스에게 종이들을 건넸다.
여전히 찜찜한 표정을 풀지 않으면서.
앨리스 백작 영애는 도미닉 경이 건넨 종이들을 받아들더니 다시 트렁크를 열어 그 안에 종이들을 집어넣었다.
"아, 맞다."
앨리스 백작 영애는 트렁크를 닫다가 문득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 탄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도미닉 경을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 내가 숙소를 잡지 않고 왔거든. 그래서 그런데 네 집에서 좀 재워주면 안 될까?"
앨리스 백작 영애는 은근슬쩍 도미닉 경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숙소를 찾을 때까지 한 달 정도만."
예상보다 긴 기간을 입에 담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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