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차랜드의 행복한 도미닉 경-363화 (363/528)

〈 363화 〉 [362화]앨리스 인 가차랜드

* * *

"여긴 참 신기한 곳이네."

하얀 머리의 여성은 마치 시골에서 상경한 사람처럼 가차랜드의 거리를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나 외지에서 살다가 가차랜드에 초대된 사람인 걸까?

그러나 그렇다고 하기엔 또 의문이었다.

그녀의 행동이나 복장은 시골에서 살았다기엔 너무나도 고귀하고 고풍스러웠기 때문이다.

아주 연한 갈색의 와이셔츠에 아주 진한 갈색의 넥타이.

그리고 적당한 갈색의 양복에 그보다 약간 더 진한 갈색의 코트와 양복과 같은 색의 챙이 넓은 중절모.

손에 들린 지팡이는 주목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끝에 은으로 된 까마귀의 머리 형상이 달려 있어 손잡이로 쓸 수 있었다.

지팡이를 든 손의 반대편에는 꽤 묵직해 보이는 트렁크가 있었는데, 겉에는 갈색 배경에 하얀 주목에 앉은 하얀 까마귀가 그려진 우표 몇 개가 붙여져 있었다.

우표들은 제각기 다른 시기, 다른 곳에서 만들어진 듯 전체적인 그림과 아래에 적혀 있는 숫자가 다 달랐는데, 가장 새것으로 보이는 우표는 갈색으로 그려진 공장지대를 배경으로 1733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정말 간만에 휴가인데, 가차랜드로 온 건 잘한 일인 것 같아."

하얀 머리의 여성은 싱글벙글 웃으며 거리를 걸었다.

가끔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사 먹었고,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구입해 트렁크에 담았다.

가차랜드에 오기 전에 환전을 이미 끝내놨었기 때문에 돈이 없다거나 부족해서 문제가 생길 일은 없었다.

애초에 그녀는 오랜 세월 동안 그녀의 고용주에게 낚여 쉬지도 못하고 일해야만 했다.

그만큼 쌓여 있던 돈이 제법 되었고, 혹시라도 돈이 부족해지면 환전할 곳도 몇 군데 알아 놓았기에 별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정작 문제는 다른 곳에서 나타났지만.

"어이, 거기 아가씨. 혹시 시간 돼?"

누군가가 흰 머리의 여성을 불렀다.

그러나 흰 머리의 여성은 그 말이 자기를 지칭하는 줄도 모르고 여전히 가차랜드의 풍경에 감탄하고 있었다.

흰 머리의 여성을 부른 이는 흰 머리의 여성의 행동에 발끈했는지, 방금 전보다 신경질적으로 다시 흰 머리의 여성을 불렀다.

"이봐! 아가씨! 그래! 거기 앞에 흰 머리! 당신 말이야!"

여성은 누군가의 외침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한쪽 눈에 곰이 햘퀸 듯한 자국이 있는 험악한 인상의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여성이 자기 말을 무시했다는 사실에 분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다혈질적인 사람인 모양이군.

여성은 그렇게 생각했다.

"무슨 일이시죠?"

하지만 여성은 그런 생각을 속으로 숨긴 채 겉으로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는 그가 누구에게 배운 것이었다.

힘들고 짜증 나는 일일수록 웃어라.

물론 그가 직접 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의 행동을 보고 배운 것이기는 했다.

그 미소에 험악한 인상의 남자는 발그레하게 얼굴을 붉혔다.

가차랜드에서도 손에 꼽힐만한 미녀의 미소에 빠져 버린 것이다.

"별 건 아니고. 혹시 시간이 있나 싶어서."

남자가 우물쭈물 여자에게 말했다.

"혹시 괜찮으면, 커피라도 한 잔 어때?"

"아, 미안해요. 제가 지금 당장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서."

여자는 여전히 웃으면서 남자의 제안을 거절했다.

너무나도 단호하게,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바로 거절했기에 재고의 여지도 없었다.

남자는 너무나도 단호한 여자의 태도에 발끈했다.

"거, 너무 비싸게 구는 거 아니야?"

남자가 순간적으로 여자의 손목을 붙잡았다.

여자의 손목은 남자의 손에 부러질 것처럼 얇았다.

"내가 커피 한 잔 하자고 하잖아!"

그렇게 말한 남자는 여자의 손목을 잡아당겨 끌고 가려고 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강하게 붙잡고 당긴 그였지만, 놀랍게도 여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흠. 이건 정당방위라고 봐도 되겠지?"

"뭐?"

남자는 갑자기 무언가를 중얼거린 여자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여자는 남자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턱을 쓰다듬으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이윽고 짧은 생각을 끝낸 여자는 혼자 무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남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건 정방방위야. 알았어?"

그리고 여자는 남자를 끌고 아무도 없어 보이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골목에서 아주 처량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

"후. 제법 후련하네."

여자가 다시 거리로 돌아온 건 골목으로 들어간 지 고작 10분이 지나서였다.

그녀는 굉장히 후련한 표정으로 골목길을 나왔는데, 옷이 조금 구겨진 것 말고는 들어갈 때와 큰 차이가 없었다.

정확하게는 누군가가 그녀의 발목을 잡았던 것처럼 바지의 밑단이 조금 구겨져 있었다.

"좋아. 이런 상쾌한 기분으로 다시 시작해보자고. 보자... 여기에 적힌 대로라면..."

그녀는 코트의 품속에서 종이 몇 장을 꺼냈다.

놀랍게도 그 종이들은 아르쿠스가 가차랜드에 대해서 적은 것들이었다.

성물로 지정된 물건을 그녀가 어떻게 개인적으로 가졌는지는 몰랐으나, 그녀는 그런 건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몇 번이고 읽었던 내용을 다시 읽어내렸다.

"도미닉 경을 만났던 곳이 여기 와 여기... 꿈속에서 만났다는 건 좀 허황된 이야기니까 넘어가도록 하고..."

그녀는 빨간 펜으로 도미닉 경의 행적이 기록된 부분들에 동그라미를 치기 시작했다.

페럴란트의 하얀 까마귀 교단에서 본다면 놀라다 못해 불경하다고 소리치며 울 지도 모르는 행동을 그녀는 거리낌 없이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꿈속의 도미닉 경이 여기서 만나자고 했다는 곳이... 여기네."

여성은 마침내 아르쿠스가 꿈속의 도미닉 경에게 계시받은 장소에 도착했다.

도미닉 경이 집에서 나와 가차랜드 시내로 갈 때 나타나는 곳이었다.

"여기서 기다리면 도미닉 경을 만날 수 있다는 말이지...?"

여성은 꽤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그 자리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도미닉 경이 언제 나타날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도미닉 경이 나타날 때까지 그곳에 서 있을 작정인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는 계속해서 그 자리에 있을 수는 없었다.

가차랜드의 경찰이 와서 그녀를 잡아갔기 때문이다.

"저 사람입니다! 저 사람이에요! 저 사람이 절 때렸다구요!"

"응?"

방금 전 골목으로 끌려갔던 남자가 경찰을 데리고 나타났다.

그녀는 갑자기 나타나 소리치는 남성의 행동에 의아함을 느꼈다.

분명 방금 전엔 절대다시 깝치지 않겠다고 했는데!

"실례합니다. 혹시 저 남자를 때리거나 하셨습니까?"

경찰은 그녀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콧수염이 인상적인 경찰, 자베르 경감이었다.

"아, 아뇨?"

그녀는 일단 발뺌하기로 마음먹었다.

골목에서 일어난 일을 누가 보기라도 하지 않은 이상, 그녀의 행동은 완전 범죄였으니까.

"죄송하지만 시스템에 데미지 로그가 다 남아 있습니다. 때리긴 하셨군요."

"...?"

자베르 경감의 말에 그녀는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시스템이라니.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시스템이라는 것이 자기 행동을 몰래 봤던 모양이었다.

"그, 맞아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저 사람이 먼저 저에게­"

"아, 폭행 자체를 탓하려는 건 아닙니다. 그건 가차랜드에서 범죄가 아니거든요."

자베르 경감은 여자의 오해를 정정했다.

"아니, 어쩌면 폭행 문제가 맞긴 합니다."

그렇게 말한 자베르 경감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차랜드로 오면서 힘을 봉인하지 않은 성좌가 시민을 폭행하는 건 범죄니까요."

일단 서로 가서 조서를 좀 쓰셔야겠습니다. 라고 자베르 경감이 말했으나, 흰 머리의 여성은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자기 정체가 들킨 것 같았으니까.

여성은 계속해서 멍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경찰서에 연행되어갈 때까지도.

...

여성이 경찰서에 연행되어 간 뒤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

"설마 그게 마지막 식재료였을 줄이야..."

방금 전까지 여성이 있던 자리 근처에서 도미닉 경이 나타났다.

도미닉 경은 방금 전에 먹은 고기 볶음과 빵이 오늘의 마지막 식재료였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저녁에 먹을 식재료를 사고자 밖으로 나온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누가 사러 갔다 오느냐를 정하는가위바위보를 했으나, 결과를 보면 알겠지만 도미닉 경이 패배했다.

상승불패의 전사 도미닉 경의 치욕스러운 패배였다.

"...음?"

도미닉 경은 오늘은 어디에서 물건을 살 지 잠시 고민하던 차에, 문득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람결에 실려 온 향기. 그 향기가 제법 익숙했던 탓이었다.

그러나 바람결에 실려 온 향기는 언제나 그렇듯 바람결에 실려 다시 사라져 버렸다.

도미닉 경은 이 익숙한 향기에 고개를 잠시 갸웃거렸으나, 이내 다시 저녁에 뭘 먹어야 할지, 그에 따른 식재료는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도미닉 경을 스쳐 지나간 향기는 한 방향으로 날아가 마침내 한 사람에게 닿았다.

"아니, 그러니까 그런 건 몰랐다니까요? 입국 심사장에서도 알려주지 않았어요!"

"그, 잠시 흥분을 좀 가라앉히시고..."

경찰서에서 억울함을 토로하는 한 여성에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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