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7화 〉 [336화]이면세계 3지역 하드
* * *
"...아니. 조금 다르군."
도미닉 경은 슬라톤 벡스의 모습이 저번과는 다소 다르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정확하게는, 도미닉 경이 슬라톤 벡스의 이름을 불렀음에도 그다지 큰 타격이 없다는 점에서 말이다.
무엇보다도...
"도미닉 경! 저번과는 다를 것이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오늘에서야 저번의 원수를 갚을 수 있겠구나."
눈앞에 있는 슬라톤 벡스는,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데이터화 된 몬스터네."
도미니카 경이 눈앞에 있는 슬라톤 벡스를 정확하게 정의했다.
"혹시 이건, 내가 가장 증오하는 인물로 보이는 뭐 그런 건가?"
물론, 도미니카 경도 모든 것을 알지는 못했기에 몇몇 부분은 오판했다.
"아무래도 저것이 이번 스테이지를 클리어할 열쇠인 모양이오."
도미닉 경은 슬라톤 벡스의 덩치가 너무 큰 나머지, 게이트에서 나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말인 즉, 슬라톤 벡스가 전장에 있는 동안 몬스터가 충원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어쩌면 이 끔찍한 라운드를 깨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도미닉 경은 다시금 방패를 들어 올렸다.
슬라톤 벡스는 체력이 일부라도 깎이거나 불리한 상황에 부닥치면 주변에 있는 생물체를 먹어 더 강해지려는 습성이 있었다.
이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도미닉 경은, 슬라톤 벡스의 특성을 잘 활용하면 이 엄청난 몬스터 떼를 처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엘랑 대위! 슬라톤 벡스는 아주 탐욕스러운 마족이오! 조금만 피해를 줘도 주변의 몬스터들을 잡아먹기 시작할 거요!"
"아, 네!"
도미닉 경은 도미니카 경도 슬라톤 벡스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엘랑 대위는 그렇지 못할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도미닉 경은 그래서 엘랑 대위에게도 슬라톤 벡스에 대한 정보를 간략하게나마 전달했다.
다행스럽게도 엘랑 대위는 도미닉 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잘 알아차렸다.
그녀는 남은 안드로이드 중 스즈키를 뒤로 물리는 한 편, 리를 통해 슬라톤 벡스에게 지속적인 피해를 줄 것을 부탁했다.
리와 슬라톤 벡스 간에는 거대한 격의 차이가 있지만, 1이나 2의 피해 정도는 꾸준히 넣을 수 있으니까.
"...아프다! 아파!"
그리고 슬라톤 벡스는...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데이터화 되어 복제된 슬라톤 벡스는 도미닉 경의 예상대로, 약간의 체력이 떨어지자마자 바로 근처에 있던 고블린 하나를 잡아먹었다.
슬라톤 벡스의 원본이었더라면 이런 꼼수가 통하지 않았겠지만, 눈앞에 있는 슬라톤 벡스는 복제된 가짜였다.
그 결과, 어느 정도 패턴을 유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지속해서 피해를 입힌다고 해서 슬라톤 벡스가 끊임없이 몬스터를 잡아먹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자체적인 쿨타임이 있는 모양이네."
도미니카 경이 날카롭게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슬라톤 벡스가 몬스터를 포식하는 것은, 자체적으로 일정 시간이 지나야만 다시 한번 발동했다.
아마 데이터화가 되면서 포식이 너무 사기라고 판단한 것인지, 약간의 밸런스 패치가 있었던 것 같았다.
"아쉽구려. 조금 더 빨리 깰 수 있었는데."
그러나 이는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에게 있어서는 단점이 되었다.
최대한 빠르게 슬라톤 벡스에게 몬스터들을 먹여 필드를 클리어하고 싶었지만, 저 자체적인 쿨타임 때문에 시간이 좀 더 지체되게 되었던 것이다.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방패를 나란히 세우고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뒤에선 저격수 리와 앨리스가 계속해서 슬라톤 벡스의 본체를 공격하고 있었다.
방패들은 마치 불도저처럼 몬스터들을 슬라톤 벡스 쪽으로 밀어냈고, 피해를 입은 슬라톤 벡스는 몬스터들을 먹는 일의 반복.
"세상에..."
엘랑 대위는 정신없이 리에게 탄약통을 지원하다가 문득 필드가 점점 깨끗해진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많던, 그 강력하던 몬스터들은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의 놀라운 활약과 슬라톤 벡스의 아군 학살로 거의... 아니,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이다.
방금 전, 마지막 몬스터가 슬라톤 벡스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그 몬스터는 오우거였는데, 목에 힘줄이 돋을 정도로 힘을 주며 밀려나지 않으려고 노력하다가,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의 힘을 이길 수 없어 점점 밀려나기 시작했다.
힘겨루기를 하는 와중에도 오우거의 표정은 점점 절망과 공포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더 이상 밀리기 싫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는지 오우거는 짧은 인생 속에서도 최대의 힘을 내는 데 성공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을 이길 수는 없는 노릇.
마침내 오우거는 슬라톤 벡스의 목구멍으로 떨어지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마지막 몬스터까지 슬라톤 벡스에게 밀어 넣은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나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막막했는데, 운이 좋았네."
"그러게 말이오. 아무래도 이런 기믹인 듯싶소."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처음에 몬스터들이 몰려나오는 것을 보고 버그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이후 슬라톤 벡스가 나오자,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슬라톤 벡스의 특성을 기억하며 이를 스테이지 기믹이라고 판단하고 말았다.
난제를 던져 주는 듯하면서도 해결책까지 같이 던져 주는 것.
누가 보더라도 가차랜드식 스테이지가 아니던가!
도미닉 경이 아니라 다른 그 누가 보더라도, 지금의 상황은 버그라기보다는 기믹에 더 가까워 보였다.
"꽤 재밌는 기믹이었소."
"그러게. 압도적인 물량으로 아찔하게 만든 다음에, 해결책을 제시해 성취감을 얻는다... 이 스테이지를 구성한 이들은 꽤 머리가 좋은 모양이네."
"그, 그런가요?"
엘랑 대위는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의 말을 듣고는 꽤 그럴싸하다고 여겼다.
처음 몬스터가 몰려올 때엔 또 버그인지, 아니면 너무 욕심을 낸 벌인지 헷갈렸으나,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의 말을 듣고 나니 확실히 심각한 위기와 극복의 성취감을 극한까지 경혐할 수 있는 라운드였던 것 같기도 했다.
에이. 설마 난이도를 사람이 못 깰 정도로 만들었겠어?
다 기믹이었겠지.
결국, 엘랑 대위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 모든 상황이 하나의 기믹이었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재, 재밌네요. 지금까지 몬스터가 나오고, 막는 일의 연속이었는데 이렇게 새로운 기믹을 선보이다니..."
엘랑 대위는 발갛게 상기된 표정으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가차랜드를 경험 하면서 가장 재미있는 기믹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어제 엘랑 대위는 이 가차랜드에 대한 평점을 5점 만점에 3.5점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이번 경험으로 인해 엘랑 대위의 평가는 4.5점까지는 오른 상태였다.
"...필멸자들. 뭘 잊어버린 것은 아니겠지?"
한참 동안 기립박수를 치던 엘랑 대위의 몸이 우뚝 멈췄다.
아. 맞다.
생각해 보니, 아직 스테이지가 끝나지 않았네.
엘랑 대위는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직 게이트에는 슬라톤 벡스가 남아 있었다.
...방금 전보다 더 꽉 낀 상태로.
"감히, 감히 날 무시해? 고작 우주의 먼지보다도 못한 놈들이, 감히 날 무시해?"
슬라톤 벡스는 산성으로 된 침을 튀겨 가며 분노를 드러내였다.
엘랑 대위는 이 상황이 불안한 듯 눈이 마구 흔들렸다.
아무래도 슬라톤 벡스까지 해결해야 스테이지가 클리어 될 것 같았으니까.
"어, 어쩌죠? 저렇게나 강해 보이는데..."
엘랑 대위는 딱 봐도 강해 보이는 슬라톤 벡스에게 겁을 집어먹었다.
그야, 방금 전까지 그렇게 게걸스럽게 몬스터를 먹는 모습을 봤는데, 겁을 먹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물론,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슬라톤 벡스의 처지에서 충분히 이상한 이들이었고.
"걱정할 것 없소. 오히려 아까 전보다 상황은 좋으니."
"그러니까. 고작 하나잖아?"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이 어깨를 뱅글뱅글 돌려 살짝 뻐근해진 관절을 풀어 주며 여유롭게 말했다.
"이리저리 움직이기라도 한다면 좀 곤란했겠지만..."
"가만히 있는 상대라면, 절대로 질 일은 없지."
도미닉 경이 게이트에 꽉 낀 슬라톤 벡스에게 방패를 휘둘렀다.
피부 가죽 아래에 드러나 있던 슬라톤 벡스의 눈 중 하나가 방패의 모서리를 맞고 아픈 듯 비명을 질렀다.
"악! 아! 이 비열한 필멸자놈들이...!"
슬라톤 벡스는 길길이 날뛰려고 했으나, 슬라톤 벡스는 그럴 수 없었다.
도미닉 경의 장비에 붙은 방패로 타격시 기절 효과로 인해 몸을 움직일 수 없었던 탓이다.
"비겁하다라."
도미닉 경은 다시금 팔을 뒤로 쭉 당겼다.
그리고 다시 한번, 때린 곳을 또 때리며 이리 말했다.
"마족이 비겁함을 논하다니. 재밌군, 슬라톤 벡스!"
"큭...! 그만! 그만!"
"아, 나도 한 대만!"
"저도 끼워주세요!"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신나게 슬라톤 벡스를 타격했다.
가짜 슬라톤 벡스는 데이터 상으로 막대한 체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만큼은 그 막대한 체력은 더 많은 고통으로 치환될 뿐이었다.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이 얼마나 신나게 슬라톤 벡스를 때렸던지, 앨리스마저 슬쩍 이 일방적인 폭행에 가담할 정도였다.
그렇게 수십 분을 일방적으로 두드린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의 공격은, 슬라톤 벡스가 데이터 조각으로 변해 사라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으윽... 분하다... 이번에도 복수를 실패했..."
슬라톤 벡스는 사라지면서도 분하다는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본체였더라면 조금 더 버틸 수 있었을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확실한 건...
"어...?"
엘랑 대위가, 이 모든 과정을 보고는 얼빠진 소리를 내뱉었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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