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3화 〉 [332화]이면세계 3지역
* * *
한 라운드만 더.
한 라운드만 더.
"저기, 이제 그만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엘랑 대위는 질린다는 듯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경외와 경탄의 시선을 보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말이다.
엘랑 대위가 이렇게 질린다는 눈으로 보는 이유는 간단했다.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이미 35라운드를 넘긴 지 오래였지만, 아직도 한 라운드 더를 외치고 있어서였다.
"무슨 소리요. 아직 더 싸울 수 있소."
"그래. 이 정도면 온종일이라도 할 수 있겠는데?"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이번 라운드의 마지막 몬스터를 방패로 마구 두드리며 그리 말했다.
몬스터는 방패의 충격에 이리저리 몸이 흔들렸으나, 얼마나 둘의 방패 활용이 뛰어난지 거의 제자리에 선 채로 죽어 가고 있었다.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이미 이면세계에서 얻을 수 있는 현재 레벨의 상한선까지 모두 채운 상태였다.
그런데도,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4성에 걸맞은 스탯.
탱커라는 특성이 가지는 뛰어난 체력 재생력.
그리고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의 끝없는 호승심.
이 모든 것이 합쳐져 오히려 지휘관인 엘랑 대위가 먼저 지쳐 버리는 상황까지 와버린 것이다.
"50라운드가 코 앞이잖아. 이왕 이렇게 된 거, 별 3개를 얻고 싶은 마음은 없어?"
"생각해 보니 그렇구려. 지금 수준 정도라면 50라운드까지는 무난하게 갈 수 있을 것 같소."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다시 한번 엘랑 대위를 설득했다.
"지금까지 35라운드를 깬 사람은 몇 명이나 있었지만, 아직 50라운드를 깬 사람은 없지 않았소?"
"그러니까. 지금이라면 첫 클리어 아닌가?"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지금의 기분을 계속 이어 나가고 싶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몸을 움직여서인지 꽤 기분이 달아오른 탓이었다.
왜,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무언가 하나를 쓰러질 때까지 해 보고 싶은 기분.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의 상태가 딱 그런 상태였다.
"전 도미닉 경이나 도미니카 경처럼 강철 체력이 아니라서요. ...그나저나 최초라."
엘랑 대위는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의 말에 질색하면서도 은근슬쩍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의 설득에 넘어가기 시작했다.
엘랑 대위의 마음을 흔들리게 만든 단어는 바로 최초라는 단어였다.
최초 클리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울림이던가.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이라면 이 단어가 가지는 로망과 뿌듯함을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엘랑 대위는 게임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 말인 즉, 엘랑 대위의 마음속에도 최초라는 단어에 대한 로망이 가득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로망은,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의 부추김으로 엘랑 대위의 감정을 온통 장악하기 시작했다.
"...힘든 게 문제겠어요? 최초 타이틀이 걸렸는데! 어쩔 수 없죠. 조금만... 조금만 더 해볼까요?"
엘랑 대위는 결국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의 꼬임에 넘어가고야 말았다.
50라운드 최초 클리어라는 업적에 눈이 멀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뭘 망설이는 거요?"
도미닉 경이 엘랑 대위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래. 우린 준비 되었어."
도미니카 경이 방패를 들어 올리며 히죽 웃었다.
"저, 죄송한데 저 간식시간이라서요. 바나나 하나만 먹으면 안 돼요, 스승님들?"
앨리스가 처량한 눈으로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을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니, 앨리스는 도미닉 경이나 도미니카 경처럼 체력이 아주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며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번 라운드는 좀 쉬도록 해라."
"젤리 먹을래?"
도미닉 경은 앨리스에게 뒤로 가서 잠시 쉬라고 말했고, 도미니카 경은 인벤토리에서 젤리를 꺼내 앨리스에게 쥐여주었다.
앨리스는 방금 전까지 부루퉁했던 얼굴이 바로 활짝 펴지더니, 도미니카 경이 준 젤리를 우물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저건 뭔가요?"
"예전에 사건이 터졌을 때... 아. 이건 말할 수 없겠네."
[미래에 있을 이벤트를 지휘관에게 미리 말할 경우 페널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도미니카 경은 엘랑 대위의 물음에 대답해주려고 했으나, 갑자기 나타난 시스템 창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아무래도 이건 미래에 대한 천기누설이 되는 모양이었다.
"뭐, 말은 해 줄 수 없겠지만, 맛은 보여 줄 수 있지. 어때. 하나 먹을래?"
"그럼 감사히 받죠."
엘랑 대위는 도미니카 경이 준 젤리를 받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은은한 단맛이 입안에 가득 퍼지며, 어째서인지 엘랑 대위는 체력의 일부를 회복한 기분이 들었다.
"...힘이 넘치네요! 지금 기분이라면 얼마든지 더 할 수 있겠어요."
"좋아. 준비되면 시작해."
"우린 언제라도 좋으니 말이오."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다시 의욕을 불태우는 엘랑 대위를 보며 히죽 웃었다.
"그럼 바로 시작하죠!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구요!"
엘랑 대위는 그렇게 말하며 라운드 시작 버튼을 눌렀다.
...
스테이지의 뒤편.
이곳에서는 시스템의 인도 하에, 지휘관과 그의 제대에 적대적인 몬스터들을 만들어내는 곳이 있었다.
기계가 증기를 뿜어내며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 위를 한 번 가렸다가 다시 드러내면 고블린, 오크, 트롤, 오우거 따위가 마구 양산되는 곳.
이 모든 곳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관제실에서, 한 공무원이 의자에 거의 기대듯 앉은 채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 거기, 거기! 슛! 아이고, 저 망할 것이!"
...레트로 그라드의 축구 시합을 보면서 말이다.
당연하게도 여기는 시스템 인더스트리가 유지보수를 담당하고, 행정부에서 관리하는 곳이었다.
모든 것이 자동화가 되어 관리하는 사람도 필요가 없을 지경이었으나, 행정부에서는 반드시 이 공장에 당직 공무원을 한 명 이상 무조건 배치시켰다.
"아! 그게 왜 오프사이드... 응? 잠깐만. 이게 뭐지? 뭔 요청이 와 있대?"
공무원은 눈이 다섯 개나 달린 심판의 눈이 삐었다면서 욕을 한 사발 퍼붓다가 이내 누군가가 특별한 요청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드 모드 요청이라고...?"
그렇다.
혹시 박춘배가 당긴 레버를 기억하는가?
그 레버는 레벨 시스템을 노멀에서 하드로 바꾸는 시스템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몇 지역을 더 지나서야 레버에 대해서 알고 하드 모드가 개방되는 시스템이었지만, 박춘배의 개입으로 예상보다도 훨씬 일찍 하드 모드가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공무원이 이곳에 있어야만 하는 이유였다.
이런 어이가 없는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요청만 들어오면 처리하는 시스템보다 이런 상황에 더 잘 대처할 수 있는 인력을 배치한 것이다.
공무원은 당장 이 요청을 거절해야 했다.
거절을 한 뒤 계속해서 요청이 들어올 경우, 상부에 보고를 한 뒤 상황을 파악하고 나서야 요청을 승인할지 거절할지 결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 당직인 공무원은 축구를 보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고, 이런 상황이 처음이라 대처에 아직 미숙하다는 것이 재앙을 불러왔다.
"어... 이럴 때는... 어? 어어? 와! 골이다! 예! 오예! 이예!"
공무원은 매뉴얼을 보며 이런 상황에 대한 대처법을 확인하려고 했으나, 마침 화면에서 공무원이 응원하는 팀이 아주 멋진 골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 몰라! 주모! 여기 사이다 하나! 예스!"
그리고 그 골에 완전히 정신이 나가 버린 공무원은, 눈앞에 떠오른 요청에 수락 버튼을 누르고야 말았다.
"응? 잠깐. 방금 전까지 여기에 요청 메시지가 떠 있지 않았나?"
공무원은 있는 힘껏 기뻐하다가 문득 하드 모드 요청이 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아, 뭐 어때! 골이 더 중요하지! 뭐, 별일이야 있겠어?"
공무원은 다시금 방금 전의 골을 축하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런 공무원의 아래로, 컨베이어 벨트와 기계들이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증기와 엔진소리를 두 배, 아니, 세 배는 더 강하게 내뿜으면서.
...
42라운드.
엘랑 대위가 시작 버튼을 누르자, 게이트에서 몬스터가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몬스터들은 41라운드와 비슷했으나, 숫자가 조금 더 많은 것 같았다.
고블린, 오크, 트롤, 그리고 드물게 오우거.
게이트가 내뱉는 몬스터는 한 번에 하나씩이었으나 그 숫자는 이미 수백에 달하고 있었다.
도미닉 경은 바로 몬스터들에게 달려들어 가장 앞에 있던 오크의 안면을 방패로 가격했다.
오크의 엄니가 박살이 난 채 허공을 날았다.
"흐."
도미닉 경이 음산하게 웃었다.
아주 행복하다는 듯 말이다.
이는 도미니카 경도 마찬가지였다.
도미니카 경은 고블린 떼에게 총을 겨누고 천천히 방아쇠를 당겨 격발했다.
[충격과 공포]가 시전되며 고블린 떼들은 그 자리에 기절 상태에 걸려 뒤에서 오는 몬스터들의 이동을 방해했다.
이 우연찮은 고블린 벽에 마음이 급했던 일부 몬스터들은, 고블린들이 아군이었음에도 마구 짓밟고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이 둘이서 사악한 악의 군세를 막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
엘랑 대위는 그런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의 모습을 바라보며 참 대단하다며 혀를 내둘렀다.
"...응?"
그때, 문득 엘랑 대위는 게이트가 조금 이상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파란색으로 빛나는 게이트가, 갑자기 붉은색으로 변한 것이다.
어째서? 어째서 갑자기 게이트가 변한 거지? 라고 엘랑 대위가 고개를 갸웃할 때쯤...
게이트에서는, 지금껏 내보내던 고블린과 오크, 트롤과 오우거가 아닌 새로운 몬스터를 내뱉었다.
날개는 없지만 온몸에 달린 비늘. 둔탁한 듯 날카로운 이빨.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
그것은 바로
"...공룡?"
공룡... 아니, 드레이크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