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3화 〉 [322화]4성의 가치
* * *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엘랑 대위는 익숙한 듯 허공을 휘젓더니, 이내 그의 앞에 있는 칸에 세 명의 소녀를 좌라락 배치했다.
마치 지휘관을 지키려는 듯, 세 소녀는 지휘관의 앞에서 의욕을 불태웠다.
"지휘관의 믿음, 저버릴 수 없지!"
"지휘관. 제 뒤로."
"음."
세 소녀는 믿어달라는 듯 든든하게 한 마디씩을 내뱉었다.
그러나 엘랑 대위는 무언가 불안한 듯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도미닉 경이 엘랑 대위에게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으나, 어째서인지 도미닉 경은 엘랑 대위에게 말을 건넬 수 없었다.
"...? 어째서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지 모르겠소."
"아마 배치가 되지 않아서 그럴지도."
"배치라."
도미닉 경은 지휘관의 앞에 서 있는 세 명의 소녀를 다시 한번 보았다.
분명 저 소녀들은 지휘관의 어떤 행동에 반응해 모눈에 배치되지 않았던가.
이래서 지휘관이 필요하다는 것이로군. 하고 도미닉 경이 지금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
"그나저나 우리 먼저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저 세 명을 먼저 배치했구려."
"본인 입으로 1113번이나 이 상황을 겪었다잖아. 그 정도면 몸이 기억하고 있어서 그렇겠지."
도미니카 경은 도미닉 경의 의문에 나름의 답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 답은 사실이었다.
1113번 동안 버그를 겪으며 거의 최적화된 동선에 익숙해진 엘랑 대위로서는 무의식의 영역에서 배치를 끝내버리는 경지에까지 올랐다.
물론, 튜토리얼 스테이지였기에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캐릭터 슬롯이 저 세 명뿐이라는 것도 한몫했고,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의 코스트가 초반에 내기엔 조금 무거운 6코스트라는 점도 한몫했다.
6코스트면 조금 더 보태어 눈앞에 있는 세 명의 소녀를 모두 소환할 수 있는 코스트였으니까.
"그나저나, 제법 무난해 보이는구려."
도미닉 경은 그의 말대로 무난하게 흘러가는 전투 양상을 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스즈키와 릴리, 그리고 리로 구성된 엘랑 대위의 파티는 적절하게 스킬을 써가며 늑대 소녀와 과학자 소녀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엘랑 대위는 여전히 무엇이 그리 불안한지, 식은땀을 흘리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엘랑 대위가 허공에다 대고 손가락을 마구 휘저었다.
6코스트가 회복되자마자 도미닉 경이나 도미니카 경을 바로 배치할 생각이었다.
엘랑 대위는 도미닉 경이나 도미니카 경의 능력이 어떤지는 잘 모르는 상태였지만 적어도 넷 보다는 다섯, 다섯 보다는 여섯이 더 나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엘랑 대위가 당신과의 가계약을 통해 전장에 불러내고자 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Y/N]]
도미닉 경은 갑자기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창을 바라보았다.
이런 식이라. 도미닉 경은 3지역의 기믹이 갑자기 기억났다.
규모는 작아졌지만, 대략 그런 느낌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렇게 시답잖은 생각한 도미닉 경은 바로 Y를 눌러 소환에 응했다.
그러자 갑자기 시야가 변하더니, 이내 격자의 안에 들어온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비싸네요."
엘랑 대위가 도미닉 경을 보고는 조금 안심이 된 듯, 손톱을 물어뜯는 걸 멈췄다.
"6코스트라. 도미닉 경은 엄청 스탯이 좋은 모양이에요."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소."
도미닉 경은 엘랑 대위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사실 엘랑 대위도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저, 이번엔 버그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약간의 안정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도미닉 경! 이름은 많이 들었어. 히메 공주님을 꼬신 희대의 카사노바라지?"
"...스즈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같은 팀한테 도발하면 안 돼!"
"응? 카사노바는 좋은 말 아니야?"
도미닉 경은 스즈키와 릴리의 뒤편, 엘랑 대위의 오른편에 서 있었다.
"또 내부 분열이야?"
"물어 버린다!"
늑대와 과학자 듀오는 완전히 승기가 기울자 최대한 허세를 부리기 시작했다.
"물어 버린다니! 흥! 그 전에 베어 버리면 그만이야!"
스즈키는 커다란 일본도를 양손으로 잡고 검신에 불을 붙였다.
"내 기술로 한 번에 잡아주겠어!"
말 그대로 마지막 일격을 날리려는 의도였다.
늑대와 과학자 듀오는 스즈키가 기술을 쓰려고 자세를 잡자마자 서로를 바라보며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둘은 이때를 노리고 있었다.
스즈키의 특수 기술 [이매망량]이 시전 되었다.
다시금 세상은 불타오르기 시작하고, 검의 궤적을 따라 타오르는 불꽃은 늑대와 과학자를 휘감았다.
"이때를 노렸어!"
그 순간, 늑대 소녀가 과학자를 끌어안고 자리를 박찼다.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뒤로 돌아 전진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단어로는 후퇴라는 것이었다.
"하하! 이번엔 이 정도로 봐주지!"
"자, 잠깐! 도망이라니, 비겁하다! 그러고도 너희가?"
스즈키와 일행들은 도망가는 둘을 바라보며 화를 내었다.
거의 다 이겼는데! 라는 생각이 그들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지휘관. 추적을."
얼마나 분했던지, 그 차분한 리마저 주먹을 꽉 쥔 채 지휘관에게 추격을 명해 달라고 부탁을 할 정도였다.
"별로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군."
도미닉 경은 늑대와 과학자 듀오가 도망친 것으로 이 모든 상황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자, 이제 진행하도록 합시다. 이번에는"
"...이거 900번대 계정들이랑 똑같은 상황이에요."
그러나 엘랑은 여전히 표정을 풀지 않았다.
다소 진정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불안함에 몸서리치고 있었다.
"아아, 싫어. 이 패턴 대로라면"
엘랑은 모자를 벗어 자기 눈을 가렸다.
앞으로 있을 일을 보고 싶지 않다는 강한 의지였다.
"분명, 보이지 않는 기둥이"
그때였다.
엘랑 대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도미닉 경은 엄청난 충격과 함께 몸이 뒤로 밀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도미닉 경은 무려 3미터나 퉁겨져나갔는데, 도미닉 경과 무언가가 부딪친 소리가 그때에서야 들렸다.
"맙소사."
엘랑 대위는 쾅하고 큰 소리가 나자 몸을 움찔거렸다.
분명히 누군가가 산산조각이 났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저게 사람?"
"인간이라곤 볼 수 없"
"세상에."
보라.
엄청난 충격에 의해 사람이 인간으로 볼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말조차 나오지 않는 상태가 되지 않았는가.
안드로이드 소녀의 말로 유추해볼 때, 아마 피해자는 도미닉 경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엘랑 대위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나마 강해 보이던 도미닉 경도 이 상황을 막을 수 없었다.
그 말인 즉, 어쩌면 엘랑 대위는 이 게임을 접을
"흠. 이거 무시무시하구려."
수밖에... 응?
엘랑 대위는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가 들린 것만 같았다.
아니, 들린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지만, 분명히 이 목소리의 주인은...
그렇게 생각한 엘랑 대위가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난 쪽으로 돌아보았다.
"...? 왜 그렇게 보시오?"
그리고 거기엔 아주 멀쩡한 상태의 도미닉 경이 있었다.
옷의 각마저 제대로 살아 있는 상태의, 단 1의 피해도 입지 않은 도미닉 경이.
엘랑 대위는 그런 도미닉 경의 모습을 귀신보듯 바라보았다.
방금 전의 충격에서 살아남는 사람을 본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심지어 900번대 끝자락에서는 무려 넷이서 이 현상을 막아보려고 했으나 모두 가루가 되어 버렸던 적도 있었다.
그런 충격을, 고작 한 사람이?
엘랑 대위가 멍하게 도미닉 경을 바라보자, 도미닉 경은 그런 엘랑 대위에게 멋쩍은 듯 이렇게 말했다.
"탱커여서 살았소. 어설픈 딜러들은 살아남지 못했을지도 모르겠군. 당신의 말이 옳았소."
"탱커... 여서라구요?"
엘랑 대위는 도미닉 경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그럼 릴리는 탱커가 아니라, 딜러라도 된다는 말인가?
"4성이니까."
그런 엘랑 대위의 뒤에서 도미니카 경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금 전의 충격 이후, 전투 상황이 풀린 것이 틀림없었다.
"1성과 4성은 엄청 큰 차이가 있으니까. 1성이 방패라면, 4성은 성채 쯤 되겠지."
도미니카 경은 1성과 4성의 차이를 그렇게 비교하며 엘랑 대위에게 말을 건넸다.
"특히나 도미닉 경은 4성에 기본적으로 방어력, 저항력이 높고 탱커 특성으로 인해 또 한 번 피해가 반감되는데다가 특수 기술 [기수]의 효과로 무려 13.5%의 피해 감소도 얻지. 그런 상황에서 관통 피해가 없는 일반 공격은 그냥... 이렇게 말하니까 왠지 양산박의 광고 같네."
도미니카 경은 엘랑 대위에게 도미닉 경이 어떻게 그 충격에서 살아남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하다 말고 얼굴을 찌푸렸다.
어째선지 도미닉 경에 대한 설명이 양산박의 광고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도미니카 경이 그렇게 생각할 만큼, 도미닉 경의 스탯특성특수 기술의 삼위일체는 완벽한 것이었다.
"뭘 부끄럽게 그런 걸 설명하고 그러시오?"
도미닉 경은 괜히 자기 칭찬에 부끄러워 도미니카 경에게 타박했다.
"그러는 도미니카 경도"
"아, 그만그만. 서로 과거는 잊고 화해하자고. 오케이?"
도미닉 경은 혼자 죽을 수 없다는 듯 도미니카 경의 장점을 이야기하려고 입을 열었다.
만일 도미니카 경이 도미닉 경의 입을 막지 않았더라면, 아마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칭찬의 상호 확증 파괴를 통한 부끄러움의 늪에 빠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방금 전의 그런 일을 당했는데도, 서로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는 자들.
"이것이... 4성."
지휘관과 세 소녀들 중 누가 말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이 짧은 상황에서 4성에 대한 동경을 가지게 되었다.
"바로 뽑아야겠다..."
특히 지휘관인 엘랑 대위는 더더욱.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