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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차랜드의 행복한 도미닉 경-322화 (322/528)

〈 322화 〉 [321화]4성의 가치

* * *

상황은 점점 난감하게 변해 갔다.

엘랑 대위는 패닉에 빠져 유아회귀를 일으켰고, 세 명의 소녀 안드로이드들은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또 다른 이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핫하! 세상을 불태워­ 죄송합니다. 장소를 잘못 찾아왔네요."

물론, 이들도 정상적인 사람들은 아니었다.

아니, 적어도 눈앞에 있는 붉고 노랗고 푸른 세 소녀보다는 정상이었다.

새롭게 나타난 이들은 적어도 예의를 아는 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어, 어째서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이 여기 있는 거지?"

"모, 모르겠어. 분명히 계약서 상으론 지휘관 하나와 안드로이드 셋이었는데?"

검은 늑대의 귀와 꼬리가 달린 채 복슬복슬한 털옷을 입은 소녀가 하얀 가운을 입은 흰 머리의 소녀에게 물었다.

흰 가운의 소녀는 하얀 가면을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는데, 머리에 있는 더듬이가 마구 떨리는 것이 당황한 건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검고 흰 두 소녀는 재빨리 무너진 건물 잔해 뒤로 숨어 작전 회의를 시작했다.

"이건 어떻게 해야 하지? 일단 원래 패턴대로 싸워야하나?"

"아니. 이건 우리의 귀책사유가 아니잖아. 아무리 봐도 버그나 뭐 그런 것 같은데, 안 해도 괜찮지 않아?"

이들은 시나리오 상 나오는 적의 간부들이었다.

물론 나름의 여지를 남겨 나중에 고용 가능한 캐릭터로 들어오는 정석적인 중간보스 캐릭터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가 안 했다고 뭐라고 하면 어쩌지?"

"...좋은 생각이 났어."

검은 늑대 소녀는 혹시라도 이 버그 비슷한 무언가의 원인으로 자기들을 지목할지도 모른다며 겁에 질렸다.

그런 검은 소녀를 보던 흰 소녀는 이내 좋은 생각이 있다는 듯 검은 늑대 소녀의 귀에다가 무언가를 속삭였다.

물론, 위에 달린 늑대 귀에다 대고 말이다.

"...그럼 되겠네!"

검은 늑대 소녀가 흰 가운의 소녀의 말을 듣고 얼굴이 밝아졌다.

흰 가운의 소녀가 한 말 대로 한다면, 일은 일대로 제대로 하고, 보상은 보상대로 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럼 그렇게 하는 거다?"

흰 가운 소녀의 더듬이 머리가 살랑거렸다.

"응!"

검은 늑대 소녀의 귀가 쫑긋거렸다.

그렇게 둘은 의미심장한 시선을 나누고는, 이내 잔해를 넘어 도미닉 경과 세 소녀가 싸우는 전장에 난입했다.

...

"하하! 여.기.에. 지.휘.관.이. 있.다.니. 운.이. 좋.은.걸?"

"...그러게. 게다가 제정신이 아니기까지 하다니, 그냥 주워가도 되겠는걸?"

"아앗­! 너희들은?"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세 소녀의 공세를 막아 내던 도중, 도미닉 경과 세 소녀의 중간에 있는 건물 잔해의 위에서 나타난 두 소녀를 바라보았다.

두 소녀는 검은 늑대와 흰 과학자였는데, 도미닉 경은 둘이 방금 전에 나타나려다가 당황하며 사라진 이들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러나 굳이 그 사실을 말할 필요는 없었기에, 도미닉 경은 그저 묵묵히 잔해 위의 두 소녀를 바라보았다.

다행스럽게도 두 소녀의 등장으로 공세가 멈춘 덕분에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굳이 세 소녀를 신경 쓰지는 않았다.

"너희들이 이번 사태의 원흉이지? 난 봤어! 너희가 여기에 오고 나서 이렇게 차원이 뒤틀렸는걸!"

"호.오. 과.연. 그.럴.까?"

"과연 정말 우리가 이 사태의 원흉일까?"

"에? 아니야?"

스즈키는 바보처럼 순진하게 둘의 말을 믿었다.

"바보야! 당연히 거짓말이지! 저 둘이 이 사건의 원흉인 건 당연한 거잖아?"

"...응. 스즈키. 바보."

"으우... 스즈키 바보 아니다 뭐!"

릴리는 바보처럼 행동하는 스즈키의 정수리에 정권을 꽂았다.

스즈키는 억울해하며 릴리에게 버럭 화를 냈다.

물론, 그 누구도 그녀의 말에 동의해주지는 않았지만.

전장의 분위기가 조금 풀어지자, 흰 가운의 소녀는 지금이 기회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방금 전까지 혀를 씹지 않고 읽을 수 있도록 노력한 문구를 입에 담았다.

"거기 있는 탱커들은 너희 팀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 그.런.데. 왜. 싸.우.고. 있.었.지?"

...하얀 가운의 소녀는 검은 늑대 소녀의 말에 한숨을 쉬었다.

연기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자기 조카도 저것보다는 연기를 잘했다.

쿠키를 먹어놓고 안 먹은 척하는 걸 기준으로 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연기라고 동네방네 소문을 낼 수는 없는 노릇.

하얀 가운의 소녀는 검은 늑대 소녀의 옆구리를 찔러 눈치를 주고는, 이내 다시 말을 이었다.

"글쎄? 내분이 일어난 것 같은데. 우리로선 잘된 일이지. 어부지리를 노릴 수 있으니 말이야!"

"에? 어부지리? 어부랑 지리가 무슨 상관이 있어?"

"아니, 둘이 다투다가 제3자가 이득을 본다는 뜻­"

"아! 알겠어! 보석상이 100만원 손해야!"

"...하아. 이 바보를 어쩌지."

릴리는 손에 든 방치로 이 순수한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를 스즈키의 정수리를 오목하게 만들고픈 욕망을 애써 참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스즈키도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닌지, 릴리의 눈치를 보며 괜히 검고 흰 소녀들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흥! 아무튼 우리가 싸우는 동안 이득을 취하려고 했다는 거지? 그럴 순 없지! 우리가 먼저 치는 수밖에!"

"아니, 너 알고 있으면서­ ...에휴. 됐다."

릴리는 또 한 번의 한숨을 내쉬고는 방패를 앞세우고 망치를 들어 올렸다.

스즈키가 싸우겠다고 한 이상, 자기는 그녀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으니까.

...

"아무래도, 우리가 좀 얕보이는 것 같소만."

"아니, 그래도 스토리는 진행되고 있잖아. 어차피 우린 엘랑 대위의 프롤로그를 도와주겠다고 온 거니까."

"그렇긴 하오."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갑자기 격돌하려는 듯 신경전을 벌이는 두 무리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두 무리의 기세는 흉흉하기 그지없었지만, 아무래도 모두 성급이 낮은 모양인지 그리 와닿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언제 싸우기 시작하는 거요?"

도미닉 경은 싸울 듯 말 듯 감질나게 움직이며 이쪽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다섯 소녀를 보았다.

아무래도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모양이었는데,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아닌 것 같았고, 아마 지휘관의 눈치를 살피는 듯했다.

"...지휘관을 좀 깨워야겠소."

도미닉 경은 눈앞의 소녀들이 눈치를 보는 것을 통해 이면 세계에선 지휘관이 없으면 아무것도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저들은 벌써 싸우고도 남았을 테니까.

그렇다면 어째서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공격을 받았는지 궁금해하실지도 모른다.

당연하게도 그건... 컷씬이었다. 아마도.

혹은 그냥 버그라고 생각해 공격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도미닉 경은 모든 것이 지휘관이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지휘관을 깨우려고 노력했다.

"오마니... 오마니가 보고 싶습니다..."

"당장 일어나시오, 엘랑 대위!"

도미닉 경은 엘랑 대위의 어깨를 잡고 전후좌우로 마구 흔들었다.

오히려 엘랑 대위가 정신을 잃지는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으나, 다행스럽게도 엘랑 대위는 꽤 튼튼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으... 세상에... 어라? 도미닉 경? 여긴 어디...?"

"정신이 돌아왔구려!"

도미닉 경이 몸을 흔든 행위가 도움이 되었던 걸지는 모르겠으나, 엘랑 대위는 정신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도미닉 경은 엘랑 대위가 정신이 돌아왔음을 기뻐하며 바로 지금 상황에 대해서 설명했다.

"지금 저들이 보이시오?"

"네? 아. 네. 보입니다."

엘랑 대위는 어째서인지 중간에 기억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으나, 도미닉 경의 말에 지금 상황을 알아차렸다.

"아. 그거네요. 프롤로그 전투."

엘랑 대위는 이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인지 매번 여기서 문제가 생기더라구요. 버그인지, 뭔지..."

엘랑 대위는 갑자기 푸념을 하기 시작했다.

말이 꽤 길어질 것만 같았다.

그 낌새를 눈치챈 다섯 소녀들은 거의 울먹이듯 지휘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죄송하지만 지휘관? 일단 자동 전투를 켜도 좋으니까 제발 전투를 시작해주면 안 될까?"

마침내 스즈키가 굵은 눈물을 흘리며 지휘관에게 애원했다.

엘랑 대위는 그제야 자기가 계속해서 그녀들을 방치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 미안. 수락. 수락."

엘랑 대위가 수락이라고 말하자마자, 그들의 아래에 격자가 생겼다.

3X3 규격의 격자가.

그것은 마치 체스판처럼 보였는데, 이 격자는 적진에도 하나가 있었다.

엘랑 대위가 1113번째 보고 있는 장면이기도 했다.

"전투에 대한 설명을­"

"스킵."

"그럼 공격 턴에 대한 설명을­"

"스킵."

"...UI 조작법­"

"스킵."

정신을 차린 엘랑 대위는 아주 가차없었다.

정신을 잃었을 때와는 달리 아주 냉철하고 효율적인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기억을 잃었을 때처럼 소심하고 겁 많은 성격이 그의 원래 성격이겠지만, 적어도 지금 엘랑 대위는 그 누구보다도 냉철한 지성으로 가득 찬 상태였다.

물론, 이 모든 것이 그가 겪은 1113번의 경험 덕분이겠지만.

엘랑 대위는 모든 설명을 스킵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이번엔 버그가 터지질 않길 바라며..."

도미닉 경은 엘랑 대위가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건, 1113번의 염원이 담긴 한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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