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1화 〉 [320화]4성의 가치
* * *
"저는... 누굽니까?"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엘랑 대위가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얼굴이 싸악 굳었다.
"어쩌지? 아무래도 기억을 잃은 모양인데."
"그렇소. 엘랑 대위가 이 상태여선 여길 빠져나가질 못할 텐데..."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난색을 표했다.
이면 세계로 오기 위해선 엘랑 대위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는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이 이면세계에서 나가기 위해서도 엘랑 대위의 도움이 필요했다.
"혹시 이 이면 세계에서 나가는 방법이 기억나시오?"
"네? 아뇨. 여기 온 것도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혹시나 해 엘랑 대위에게 퇴각 방법을 물어보았으나, 엘랑 대위는 그마저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이를 어쩐다..."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크게 한숨을 쉬며 이후의 상황을 걱정했다.
그때였다.
"으, 세상에. 이면 세계라니! 너무 싫어!"
"투정은 나중에 해. 지금은 지휘관을 찾는 것이 먼저다."
"음."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세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다.
도미닉 경은 소리가 난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세 명의 소녀가 있었는데, 붉은 머리카락에 커다란 일본도를 든 말괄량이와 망치와 방패를 든 노란 머리의 성기사, 그리고 푸른 머리의 저격수가 있었다.
도미닉 경은 그들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 이면 세계에서 지휘관도 없이 움직인다?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도미니카 경의 생각은 달랐다.
"아무래도 저들이 안드로이드 들인가 봐."
"안드로이드 말이오?"
도미닉 경은 도미니카 경에게 되물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에 세 명의 안드로이드들을 지원해 준다는 말을 얼핏 들었던 것도 같았다.
"어라? 저, 저길봐! 지휘관이 쓰러져 있어! 곁에 누가 있는데?"
붉은 머리에 대검을 든 말괄량이가 호들갑을 떨었다.
"적인가?"
노란 머리의 성기사가 망치와 방패를 들어 올리며 경계했다.
"...도미닉 경?"
그리고 파란 머리의 저격수가 도미닉 경의 존재를 알아보았다.
"도미닉 경?"
붉은 머리의 말괄량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그 유명한 페럴란트의 도미닉 경?"
"태, 탱커의 귀감이 왜 여기에?"
붉은 머리의 말괄량이와 노란 머리의 성기사는 왜 도미닉 경이 여기에 있냐는 듯 더욱 당황하기 시작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프롤로그 기간 동안은 가차랜드의 용병들을 불러올 수 없는 상태에서 오로지 이 세 안드로이드들로만 진행해야 했으니까.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이 여기에 있다는 건, 안드로이드들이 생각하지도 못한 변수였다.
"...버그일까?"
"핵일지도 모르지."
"아니."
붉은 머리와 노란 머리의 소녀들이 경계하자, 푸른 머리의 소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버그든 핵이든 상관없어. 일단 지휘관 확보가 먼저야."
"그, 그렇지! 지휘관! 혹시 괜찮아?"
붉은 머리의 소녀가 지휘관의 상태를 확인한답시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누구, 저요?"
엘랑 대위는 누구를 말하는 건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도미닉 경이 자신을 엘랑 '대위'라고 말했던 걸 기억했다.
대위 쯤 되면 지휘관의 자격이 있었으니, 그제야 자기를 부른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응! 반응이 조금 느리긴 하지만 확실히 지휘관이네!"
그렇게 말한 붉은 머리는 거대한 일본도를 한 손으로 들고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검신에서 불길이 치솟더니, 그 상태 그대로 지휘관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당장 구해 줄 테니까, 가만히 있어!"
"잠깐, 스즈키!"
특수 기술 [이매망량]
붉은 머리의 소녀 무사는 불길이 이글거리는 검을 들고는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을 향해 큰 기술을 사용했다.
넓게 휘둘러진 검의 궤적을 따라 불길이 비단처럼 이어졌다.
그리고 그 불길은 마침내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을 삼키고 말았다.
"스즈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노란 머리의 성기사가 스즈키라고 불린 붉은 머리를 제지하러 달려왔다.
스즈키의 기술은 전방 3칸을 커버하는 광역기임에도 피해 계수가 높은 순수한 딜로 이루어진 기술이었다.
"아, 릴리. 버그면 어떻고 핵이면 어때. 해결하고 지휘관을 되찾기만 하면 되는걸."
"아니, 그게 아니라 지휘관이 다치기라도 하면"
"에? 그쪽?"
릴리라고 불린 노란 머리는 지휘관 외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지휘관이 있음에도 공격을 자행한 스즈키를 탓했다.
"...생각해 보니 그러네. 미안."
스즈키는 잠깐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자기가 너무 과하게 행동했음을 인정했다.
"넌 그게 문제야. 늘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 앞서나가선"
"온다."
스즈키와 릴리는 언제나 그렇듯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였다.
푸른 머리의 소녀 저격수가 경고를 내리기 전까지는.
"무슨 소리야, 리? 스즈키가 조금 덜렁거리긴 해도 기술 위력은 최고라고. 그 기술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없"
릴리는 리의 말에 반박하려는 듯 아직 타오르는 불의 장벽 사이를 바라보았다가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 엄청난 불의 장벽을 찢어 버리며 나오는 두 명의 사람과 지휘관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그럴 순 없어."
릴리는 충격이라는 듯 중얼거렸다.
"아무리 진심을 내지 않았다고 해도, 스즈키의 공격은 나도 견디기 힘들다고. 그런데 어떻게..."
릴리는 떨리는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떻게 저렇게 멀쩡할 수 있지?"
아무리 릴리와 스즈키가 티격태격하는 사이라도 이 셋은 서로를 아주 잘 아는 친구들이었다.
그렇기에 스즈키의 기술이 가지는 위력도 잘 알고 있었고, 이 기술을 견디다 못해 거의 무시하다시피 하는 도미닉 경이 얼마나 대단한지도 알 수 있었다.
릴리는 아무래도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스즈키! 아무래도 뭔가 이상"
"이익! 이렇게 된 이상 정면 돌파야! 지휘관을 돌려줘!"
스즈키는 평소에도 그랬듯 갑자기 급발진을 하며 도미닉 경을 향해 달려들었다.
글쎄. 그만큼 혈기가 왕성하다는 뜻이 아닐까?
"스즈키! 스즈키! ...어휴. 어쩔 수 없지."
"늘 있던 일. 곤란."
"뭐, 그렇다고 스즈키 혼자 보낼 순 없잖아. 일단 전투야. 혼내는 것은 나중에."
"이해. 엉덩이 100대 때릴 용의가 있음."
스즈키의 갑작스러운 돌발 행동에 릴리와 리는 당황하면서도 늘 있던 일이라는 듯 고작 한숨 한 번으로 당황을 씻어내었다.
그리고 스즈키의 행동을 지원이라도 하려는 듯 각자의 무기를 들어 올렸다.
릴리는 망치와 방패를, 리는 대구경 저격총을.
이러니저러니 말은 많았지만, 그들은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고 가장 잘 도와주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역시 가장 친한 친구들이었으니까.
...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오?"
도미닉 경은 갑자기 달려드는 붉은 머리의 소녀 무사의 공격을 몸으로 맞아가며 도미니카 경에게 물었다.
"글쎄. 아무래도 갑자기 전투가 일어난 것 같은데."
도미니카 경이 12.7mm 관통탄을 우연찮게 손등으로 튕겨 내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저 소녀들이 이번 프롤로그 스토리의 주인공 격 안드로이드였던 모양이야. 우린 그 자리를 빼앗았... 빼앗은 걸지도."
"그럼 어떻게 해야 하오?"
도미닉 경은 방패의 모서리로 성기사의 방패를 걸어 옆으로 넘어뜨렸다.
성기사는 압도적인 힘과 기술에 눌려 바닥을 굴렀다.
"지휘관은 기억을 잃었지, 원래 아군이어야 할 이들은 우릴 공격해오지, 그렇다고 이들을 공격할 수는 없잖소."
그랬다간 시나리오가 다 꼬일 텐데. 도미닉 경이 그렇게 걱정했다.
사실,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이들을 제압할 수 없어서 안 하는 것이 아니었다.
제압했다간 어떤 버그가 터질지 걱정되어 움직일 수 없었다.
이미 기존의 프롤로그를 벗어났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그게 앞으로의 시나리오를 더욱 엉망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잠깐만 기다려 봐."
도미니카 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커다란 일본도를 방패로 막고, 날아오는 망치를 정권으로 후려친 다음, 날아온 뜨거운 총알이 우연히 가슴골 속으로 들어가 당황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말이다.
도미니카 경은 갑자기 흉악한 흉부 사이로 쏘옥 들어간 총탄을 밖으로 빼내며 한숨을 내쉬고는 그 총탄을 뒤로 던졌다.
우연찮게도 그 총알은 마침 방패를 앞세우고 달려드는 소녀 성기사의 이마에 튕겨 작은 혹을 만들었다.
별것 아닌 행동이었지만, 스탯 차이로 인해 사소한 것도 무서운 기술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아무래도 우리끼리 있다간 계속 이렇게 대치 상태가 될 것 같아."
도미니카 경이 마침내 이 상황을 해결할 방도를 찾았다는 듯, 명쾌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이 대치 상황은 바로 엘랑 대위를 두고 일어나고 있지."
"그렇소."
도미닉 경은 도미니카 경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도 지휘관을 찾는 것을 보면 이 모든 일의 원흉은 엘랑 대위였다.
"그러니까 엘랑 대위에게 부탁하는 거지. 지금, 이 전투를 멈춰달라고. 우린 모두 아군이라고. 그럼 되지 않을까?"
도미니카 경의 말에 도미닉 경은 턱을 매만지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도미니카 경의 말은 아주 정석적이었고,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으니까.
그런데도 도미닉 경은 고민에 빠졌다.
어째서일까?
"다 좋소. 다 좋은데"
도미닉 경은 날아오는 관통탄 세례를 방패로 막아 내며 대답했다.
"지금 엘랑 대위의 상태가 저런데, 어떻게 부탁할 생각이오?"
도미니카 경이 도미닉 경의 말에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러고는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엘랑 대위의 상태가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 제길."
"엄마보고싶다엄마보고싶다엄마보고싶다"
엘랑 대위는 현재 사방에서 몰아치는 총알과, 불꽃과, 방패와 방패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에 놀라 머리를 붙잡고 쪼그린 채 패닉에 빠진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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