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9화 〉 [318화]4성의 가치
* * *
"스카우트 하려구요."
너무나도 당당한 엘랑 대위의 말에 도미닉 경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그런 걸 당당하게 말해도 되는 거요?"
"...?"
엘랑 대위는 도미닉 경의 질문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의문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그리고 자기가 무언가를 잔뜩 빼먹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으. 그러니까, 미안해요. 머릿속에서 잔뜩 생각하고는 있었는데 실수로 결론만 말해 버렸네요. 처음엔 호감도를 올리다가 마지막에 이적 요청을 한다는 게 그만..."
엘랑 대위는 당황하면서 다시 소심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얼마나 당황했던지 속에 있던 말을 검열도 없이 모두 밖으로 쏟아 내면서 말이다.
"어, 그러니까, 호감작을 위해서 필요한 게..."
"호감작이라. 그런 게 왜 필요하오?"
엘랑 대위는 너무 심하게 당황했는지 주머니에서 군인 수첩을 꺼내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아마 지금 상황에 대처할 방법을 찾는 거겠지.
그 어리바리한 모습에 도미닉 경은 의문스럽다는 듯 말했다.
"어? 여긴 호감작이 없어요? 잠깐만요. 어? 진짜네?"
엘랑 대위는 군인 수첩을 품에 집어넣었다.
"왜, 왜죠? 왜 선물을 삼천 개 쯤 주면 호감도 100 찍고 그런 시스템이 아닌 거죠?"
"왜냐니 그야..."
"여긴, 가차랜드이자 현실이니까?"
엘랑 대위는 말하면서도 무언가 혼란스럽다는 듯 불안하게 눈을 뒹굴거렸다.
아무래도 엘랑 대위가 익숙한 환경과 다소 다른 탓에 그런 모양이었다.
"그, 그럼 여러분들을 뽑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죠? 저 당장 여러분을 제 제대에 넣고 싶은데!"
"아니,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엘랑 대위의 말에 가만히 듣고 있던 악독한 박춘배가 버럭 화를 냈다.
"아무리 뉴비라지만, 할 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지!"
"히익!"
엘랑 대위는 험악하게 생긴 박춘배의 모습에 깜짝 놀라 목을 움츠렸다.
당장에라도 공격할 듯 험악한 분위기가 너무 생생했다.
그러나 엘랑 대위에게 온 것은 박춘배의 주먹이 아니라, 그의 말 한마디였다.
"뉴비라면 일단 스토리 모드 11부터 깨는 게 순서야! 알았어? 보아하니 아직 프롤로그 미션도 안 깼구만! 깨고 오면 말해줄게. 빨리 가서 깨!"
"...그게 보이오?"
도미닉 경은 박춘배에게 어떻게 엘랑 대위가 프롤로그 미션조차 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는지 물었다.
"당연하지. 저길 봐."
박춘배는 엘랑 대위의 머리 위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0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마치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 박춘배와 말레이의 머리 위에 칭호가 있듯 말이다.
"저게 이번에 업데이트된 레벨 시스템이지. 저 레벨이 올라야 우리의 레벨 상한선이 오른다더라고. 패치 노트 97번 쯤에 있을 거야."
도미닉 경은 다시 한번 패치 노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정말 97번에 레벨링과 관련된 시스템이 적혀 있는 것이 아닌가.
도미닉 경은 박춘배가 가진 의외의 섬세함에 감탄했다.
"아무튼 프롤로그나 깨고 와. 그래야 카드 팩 교환소가 개방될 테니까. 기본적으로 지원해주는 안드로이드들을 이용하면 금방 깰 수"
"어요."
"응?"
박춘배는 퉁명스러운 듯 친절하게 이 뉴비 지휘관에게 이런저런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뉴비 지휘관은 박춘배의 말에 고개를 푹 숙이고는 주먹을 꽉 주며 어떤 말을 중얼거렸다.
"없어요."
"...뭐라고 하는 거요?"
"모르겠네. 없다는 말 외에는"
"안드로이드들이 없다구요!"
엘랑 대위는 빼액 소리를 질렀다.
그는 씩씩거리며 있는 힘껏 나 화났소를 온몸으로 표현하더니, 이내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프롤로그요? 당연히 해봤죠. 그런데 프롤로그 왜 이렇게 어려워요? 잡몹은 잡히지도 않고! 글자는 깨져 있고! 안드로이드들은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고! 이게 무슨 게임이야! 버그 덩어리 프로그램이지!"
엘랑 대위는 머리에 쓴 캡을 쥐고 땅에 내던졌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엘랑 대위의 숨소리가 더욱 거칠어졌다.
"아니, 안드로이드들이 남았으면 그래도 다시 할 순 있었을 텐데."
"무려 1113번이나 새로 계정을 팠지만, 이번에도 안드로이드들이 다 증발해 버렸어요. 특정 기기에서 접속하면 안드로이드들이 사라지는 버그가 생기는 모양인데"
"그럼 왜 아직 여기 있는 거냐?"
박춘배가 엘랑 대위에게 띠꺼운 말투로 말을 걸었다.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건가?"
물론, 뉴비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그건... 그건..."
엘랑 대위의 분노가 서서히 옅어졌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억울함과 슬픔이 엘랑 대위의 공허한 마음속에 채워져 나갔다.
"그건... 캐릭터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예요... 사실 전 밴시 박사 유입이거든요. 그런데 보다 보니 다른 캐릭터들도 다 애정이 생겨 버려서..."
엘랑 대위는 그 말을 끝으로 갑자기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프롤로그 미션조차 제대로 깨지 못한 억울함과 버그 친화적인 자기 계정에 대한 분노가 뒤섞여 그랬으리라.
"으아앙! 나 화났어! 화났다고! 3000가차석만큼 화났어! 아니, 3성 확정 선택권! 아니, 거기에 장비 재료 선택권! 아니, 가차석 4200만큼이랑 3성 확정권!"
엘랑 대위는 거의 떼를 쓰듯 악을 질러댔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박춘배가 버럭 화를 내지를 정도였다.
"그만! 그만! 그만해! 민폐야!"
엘랑 대위의 목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박춘배의 말대로 거의 민폐에 가까울 정도의 피해를 입힐 정도였다.
유리창이 깨지고, 가까이 있던 말레이는 기절 직전까지 몰렸으며, 저항력이 높은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조차 귀를 막을 정도로 울음소리가 대단했다.
"하지만... 하지만... 이제 지쳤다구요! 1113번째 똑같은 버그를 겪는 제 입장을 생각하면 절 막을 수 없을 걸요! 안드로이드도 없고, 있어도 버그 걸리고... 아이고, 내 신세야! 난 그저 느긋하게 이 게임을 즐기고 싶었던 것뿐이었는데!"
"아, 그러니까 우리가 도와줄 테니 뚝! 울음 뚝 그치라고!"
박춘배가 버럭 화를 내질렀다.
그 기백이 얼마나 대단한지 엘랑 대위가 코를 훌쩍이며 바로 울음을 그쳐 버릴 정도였다.
"거, 아무래도 안드로이드들이 불량인 모양인데 우리가 도와줄 테니 울지 말라고. 어이, 거기 기사 놈들!"
"우리 말이오?"
박춘배의 말에 도미닉 경이 자신을 가리켰다.
"그래. 너희도 좀 도와줄 생각 없냐?"
"흠."
"애초에 우린 라이벌 관계긴 하지만 이번만큼은 손을 잡자고. 사실, 이번 베타 테스트로 인해 꽤 많은 보상이 있는 건 알고 있겠지? 지휘관 하나둘 정도 알고 있어서 나쁠 것은 없잖아?"
박춘배의 말은 정론이었다.
패치 노트에도 나와 있는 사실이었지만, 최초로 선택된 100인은 지휘관의 도움 요청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큰 보상을 받는 시스템이었다.
무엇보다도 엘랑 대위는 프롤로그 미션에서의 버그로 가차랜드로 튕겨 나와 우연히 가장 먼저 가차랜드로 오게 된 셈이었지만, 이번 베타 테스트에는 엘랑 대위 말고도 수많은 지휘관들이 있을 예정이었다.
...고 박춘배는 설명했다.
"그렇구려."
도미닉 경은 박춘배의 설명에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이건 서로 나쁠 일이 없는 거야. 원래 총량 보존의 법칙이라고, 지금, 이렇게 운이 없는 것도 나중에 풀리려고 그런 게 아니겠어?"
박춘배는 마치 엘랑 대위 들으라는 듯 언성을 조금 높였다.
도미닉 경은 박춘배의 말이 옳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어필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반했나?"
도미니카 경이 박춘배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엘랑 대위가 박춘배의 취향에 딱 맞는다거나 뭐 그런 거는 아니겠지?"
"그거 가능성이 있구려."
도미닉 경은 도미니카 경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아니라면, 저 악독한 박춘배가 저렇게 적극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 예로, 바로 옆의 비열한 말레이를 보라.
그도 박춘배의 행동이 어이가 없던지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아, 그래서 안 도와줄 거야?"
박춘배는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의 속삭임에 괜히 찔린다는 듯 더욱 언성을 높였다.
"기사라는 놈들이 곤란에 빠진 뉴비를 돕지 않겠다고?"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이내 다시 박춘배를 바라보았다.
박춘배의 말은 도발임이 뻔했지만,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에게 아주 효과적인 도발이었다.
"좋소. 도와주리다."
"그나저나 너무 티나게 행동하는 거 아니야?"
"티, 티가 나다니. 그 무슨..."
박춘배는 짐짓 아닌 척을 하며 두어 번 헛기침했다.
사실, 엘랑 대위의 모습은 꽤 미인이었다.
양 갈래로 땋은 금발에 푸른 눈, 여리여리한 몸에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하얀 피부.
단점이라면 심각할 정도로 납작한... 아니, 슬렌더 이기는 했으나 그 사실을 감안 하더라도 상당한 미인임은 틀림없었다.
박춘배는 힐끗 엘랑 대위를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자기가 작업을 걸려는 걸 알아차릴까 봐 눈치가 보인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엘랑 대위는 박춘배의 시선에 고개를 갸웃거릴 뿐, 딱히 이상하다거나 그런 건 없는 모양이었다.
"흠흠. 아무튼 이렇게 다들 엘랑 대위를 도와주는 걸 동의한 거지?"
박춘배는 이 모든 것이 자기 공로라는 듯, 목소리 높여 자랑하듯 말했다.
과할 정도로 엘랑 대위를 의식해서 한 행동이었다.
"...고마워요."
엘랑 대위는 방금 전까지 울었던 탓에 코를 훌쩍거리면서도 모두에게 감사를 표했다.
박춘배는 엘랑 대위가 눈이 조금 붓기는 했지만, 여전히 아름답다는 사실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 감사하다면 나중에 나랑 커피나 한잔"
"당연하죠! 총알은 준비되어 있으니까, 얼마든지 사드릴게요. 프롤로그와 1지역만 깨면..."
엘랑 대위는 정말 감사하다는 듯 박춘배와 도미닉 경, 도미니카 경, 그리고 말레이를 한 번씩 와락 끌어안았다.
박춘배의 입이 귓가에 걸릴 정도로 환하게 찢어졌다.
"...알아차렸소?"
"...그거지?"
그리고 그 뒤에서,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방금 전 엘랑 대위와의 접촉에서 무언가를 알아낸 듯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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