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차랜드의 행복한 도미닉 경-317화 (317/528)

〈 317화 〉 [316화]베타 테스트

* * *

그러나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의 고민은 생각보다는 오래가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 도미닉 경 주변에는 일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기... 도미닉 경?"

"음?"

도미닉 경은 말을 거는 누군가로 인해 갑자기 환경이 바뀌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검은 공간. 익숙하지 않지만, 익숙한 공간.

도미닉 경은 이 공간이 어디인지 한참을 고민했으나, 이내 도미닉 경이 처음 가차랜드에 오기 전, 검은 양복을 입은 무언가와 만났던 곳임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오랜만이오, 당신도."

방금 전 도미닉 경을 부른 이도, 그때의 양복일 것이다.

"...그렇군요. 도미닉 경에게 있어선 오랜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도미닉 경의 추측은 사실이었다.

...

검은 공간에는 오로지 두 사람만이 존재했다.

도미닉 경과 양복.

물론 양복을 사람으로 칠지 말지에 대한 문제는 논외로 두고서 말이다.

성급 심사를 위해 모였던 그 많은 사람들은 물론, 도미니카 경조차 없는 공간.

도미닉 경은 그곳에서, 인벤토리에 들어 있던 편의점 커피를 홀짝이며 양복을 바라보았다.

"그래, 어째서 날 여기로 부른 거요?"

도미닉 경은 눈앞에 있는 양복이 도미닉 경을 불렀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는 그저 추측일 뿐이었으나 도미닉 경의 감은 제법 잘 맞는 편이었다.

"저번에 가차랜드에 보낸 걸로 끝인 줄로만 알았소."

"뭐, 이해합니다. 저희의 업무란 대체적으로 그런 쪽이니까요. 하지만­"

검은 양복은 품속에서 타블렛을 꺼내 무언가를 끄적였다.

처음 볼 때에도 그러더니, 아무래도 그게 버릇일 지도 몰랐다.

"알파 테스트까지의 저희 임무가 헤드헌팅이라면, 베타 테스트부터는 조금 다르니까요."

"베타 테스트는 다르다?"

도미닉 경은 검은 양복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크게 다를 것이 무엇이 있소? 가차랜드는 지금처럼­"

"지금처럼 계속될 수는 없죠. 엉망진창에, 온갖 이상한 것으로 가득한 곳이니까요."

검은 양복은 도미닉 경의 말을 끊으며 말을 이었다.

"...본론만 말하자면, 저희는 가차랜드에서 가치가 적당한 이들을 유심히 선별하고 있었습니다."

"선별하고 있었다? 그것도 적당한 이들을?"

"가차랜드는 가치만 있으면 죽음도 극복할 수 있는 곳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죠."

검은 양복은 다시금 타블렛에 무언가를 끄적였다.

"저희는 그중에서도 '적당한' 가치를 가진 이들을 선별했습니다."

"어째서 그런 거요? 가치가 높다거나, 아니면­"

"가치가 높은 이들을 뽑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런 식의 운영은 가차랜드 자체의 가치를 떨어뜨립니다."

"가차랜드의 가치."

도미닉 경은 그 말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가차랜드의 가치.

"네. 가차랜드에서는 여러분의 가치를 존중해주지만, 가차랜드라는 브랜드 자체는 어떨까요? 가차랜드 자체가 가지는 가치는 얼마일까요?"

뭐, 일단 억 단위는 가뿐히 넘겠습니다만. 하고 검은 양복이 농담처럼 말했다.

"알파 테스트 동안은 성좌들을 통해 다양한 반응을 얻었습니다만, 그것은 우리와 우호적인 성좌들의 이야기입니다. 베타 테스트부턴 온갖 종류의 성좌들이 몰려들 겁니다."

도미닉 경은 검은 양복의 말을 유심히 듣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항상 가치가 높은 이들을 선별한다? 처음엔 좋겠지요. 하지만 그다음엔? 그다음으로 가치가 높은 이들이 선별되겠지만, 이미 가장 가치가 높은 이들이 모든 것을 가진 상황에서, 후속으로 선별된 이들이 설 자리가 있을까요?"

검은 양복의 말은 가차랜드 자체의 가치뿐만이 아니라, 얼마나 그 가치가 오래가느냐를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치가 낮은 이들부터 선별하기엔 베타 테스트가 엉망이 되고 말 겁니다. 아무도 쓰고 싶지 않은 이들을 도대체 누가 쓰려고 할까요?"

쓰려는 이들도 있겠지요. 하고 검은 양복은 첨언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적당한 가치를 가진 이들을 먼저 선발하고, 그다음에 서서히 가치가 높은 이들을 선발하는 겁니다. 그리고 가치가 낮은 이들을 리메이크... 아니, 새로운 변화로 이끌어 더 나은 가치를 가진 이들로 만들 겁니다. 그게 바로, 저희 가차랜드가 오랫동안 살아남을 비결일 테니까."

도미닉 경은 검은 양복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을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가차랜드를 위한 그의 마음가짐은 충분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좋소. 당신이 얼마나 가차랜드를 위한 마음이 각별한지는 알겠소. 하지만 그것과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것은 대체 무슨 연관이 있다는 말이오?"

"아, 미안합니다. 잠시 말이 딴 곳으로 샜군요."

검은 양복은 격정적인 감정을 조금 누그러뜨리기 위해 타블렛을 조작해 클래식 음악을 들었다.

"방금 전에도 말했듯, 우리는 적당한 수준의 인물들을 선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준에 도미닉 경이 들어가 있었지요."

검은 양복은 여기서 잠깐 말을 멈췄다.

그리고 도미닉 경이 검은 양복을 빤히 쳐다보자, 그 시선을 즐기는 듯 다시 말을 이었다.

"도미닉 경에게 제안하나 하겠습니다. 이는 도미니카 경도 마찬가지로 받는 질문일 겁니다."

검은 양복은 도미닉 경에게 한 가지 제안을 건넸다.

"베타 테스트 때 선별될 21인의 인물들 중 하나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건, 어쩌면 도미닉 경에게 있어서 큰 결정이 될 수도 있는 제안이었다.

"...왜 21인이오?"

도미닉 경은 이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 조금 신중해지기로 마음먹었다.

"정확하게는 20장, 21인입니다."

검은 양복의 대답은 신속했다.

마치 이런 질문을 예상했다는 듯 말이다.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의 카드는, 하나로 묶일 예정이니까요. 서로 단일로 쓸 수도 있고, 혹은 슬롯 2칸을 써서 태그 매치 룰을 써도 좋습니다. 사실, 위에서는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이 가진 기믹을 제법... 좋게 보고 있으니까요."

"좋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충분하오. 하지만 또 하나의 질문이 있소. 다른 탱커들도 있는데, 왜 하필 우리요?"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검은 양복의 대답은 막힘이 없었다.

"21인 중에는 총 4명의 탱커가 들어갈 예정입니다. 정확하게는 3장이겠군요.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 판데모니아 양, 그리고 L­003."

"나머지 17인은?"

"아마 딜러 분들이 11명. 서포터 분들이 6명이 들어갈 겁니다. 지금 저희가 한 제안을 모두 수락한다는 가정하에 말이죠."

"흠."

도미닉 경은 검은 양복의 말에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검은 양복의 제안은 아직 나빠 보이지는 않았던 탓이다.

"그 21명만 선발되는 거요?"

"아니요. 여기에 리메이크... 리워크... 아니, 갱생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1성급들과 2성급들을 조금 투입할 예정입니다. 아마 최종적으론 100여 명에 달하지 않을까 싶군요."

도미닉 경은 검은 양복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가차랜드의 인원이 얼마나 많은데 그중 21명만 선별되겠는가.

100명이라는 숫자는 여전히 가차랜드의 시민 수를 생각하면 적은 수였지만, 그래도 납득은 할 수 있는 숫자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쁠 것이 없는 제안.

그때 문득, 도미닉 경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도미닉 경은 아닐 것으로 생각하면서도, 검은 양복에게 그 말을 건넸다.

"...한 가지 질문을 더 해도 되겠소?"

"얼마든지 괜찮습니다."

"그럼, 묻겠소. 100명은... '어디로 가는 거'요?"

"..."

검은 양복은 도미닉 경의 말에 침묵을 유지했다.

방금 전까지 청산유수로 말을 내뱉던 것과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도미닉 경은 그런 검은 양복을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검은 양복은 그 시선에 잠시 무언가를 말하려다 말다가를 반복하더니, 이내 말문을 열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당연한 일이오. 아까 전부터 선별이라고 한 것부터 무언가 이상했소."

도미닉 경은 검은 양복의 말에 대답했다.

"게다가 21인이니, 100명이니 하며 마치 한정된 인원만 선별한다는 듯 말하는 것도 그랬소. 가차랜드 내부에서 하는 일이라면 이렇게 누군가를 선별할 일도 없겠지. 시민들이 알아서 할 테니까."

도미닉 경의 말은 꽤 논리적이었다.

검은 양복은 그런 도미닉 경의 말에 잠시 일렁거리는 얼굴을 매만지더니, 이내 한숨처럼 소리를 내뱉고는 양손을 들어 올렸다.

마치 항복이라도 하는 듯 말이다.

"물론, 도미닉 경의 말씀이 맞습니다. 저희가 선별한 100명의 사람들은 가차랜드와는 다른, 가차랜드의 이면에 가게 될 예정입니다."

"가차랜드의 이면?"

"네. 평행세계라고 하죠."

도미닉 경은 그 말에 바로 도미니카 경을 생각했다.

"하지만... 평행세계는 파괴되었잖소?"

도미닉 경은 도미니카 경이 가차랜드로 넘어오면서 했던 말을 기억했다.

평행세계는 산산조각이 나 사라졌다고 들었던 것 같다.

"평행세계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검은 양복은 단호하게 그리 말했다.

"사실, 평행세계는 저희가 만들던 가차랜드의 또 다른 버전이었습니다만, 저희의 실수로 평행세계가 망가지고 말았죠."

검은 양복은 침통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저희는 그 평행세계를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기 위해 가차랜드의 100인을 선정해 그곳에서 복구 작업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복구 작업이라."

"뒤틀린 괴물들이나, 혹은 평행세계에 남은 잔존 사념 같은 것들을 제거하는 작업이죠."

도미닉 경은 검은 양복의 말에 제법 흥미를 느꼈다.

"사실, 이 부분은 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가차랜드와 평행세계를 오갈 수 있게끔 저희가 손을 쓸 생각이었으니까요."

검은 양복은 도미닉 경의 눈치를 보았다.

"오직, 저희가 선정한 100명에게만 말입니다."

더 추가될 수도 있고요. 라고 검은 양복이 덧붙였다.

"어떻습니까. 흥미가 좀 돋지 않습니까?"

도미닉 경은 검은 양복을 바라보았다.

검은 양복은 이번엔 정말 숨기는 것이 없다는 듯, 다시 한번 양손을 들어 올렸다.

"...사실 그렇소."

그리고 그 모습에, 도미닉 경은 진실된 답을 내뱉었다.

검은 양복이 미소를 지은 것 같았다.

물론, 그의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자, 대략적인 내용을 이해하셨다면... 여기에 서명하시면 됩니다."

검은 양복이 타블렛을 도미닉 경에게 건넸다.

도미닉 경은 이 상황 자체에 기시감을 느꼈다.

가차랜드에 처음 왔을 때에도 이랬던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한 도미닉 경이 피식 웃었다.

그때도 이렇게 서명했었지.

점 두 개, 그리고 웃는 입. 행복함의 표시다.

"좋습니다."

검은 양복이 다시 전자기기를 거둬갔다.

이 또한 전에 있었던 일이다.

"베타 테스트에 참여한 것을 환영합니다, 도미닉 경. 부디 행복한 하루 되시길."

도미닉 경은 이마저 그때가 생각나 크게 웃었다.

여기 와서 가장 마음에 든 시각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두 번째로 마음에 드는 시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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