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5화 〉 [314화]클랜전 후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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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랜전은 참으로 허망하게 끝났다.
도미닉 경이 하늘의 용을 잡아 땅으로 그 오만함을 끄집어내렸을 때 칭원 클랜은 패배하고 말았다.
물론, 도미닉 경이 칭원 클랜의 패배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아니었다.
이번 클랜전의 승리 조건은 상대 본진에 있는 클랜 코어를 박살 내는 것이었고, 클랜 코어만 살아 있다면 클랜장이 죽든, 클랜원이나 간부가 죽든 부활하면 그만이었으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칭원 클랜이 패배했다는 건 칭원 클랜의 클랜 코어가 박살 났다는 의미였다.
도대체 누가?
"과연 연맹이로군요. 저격수와 초능력자의 시너지라..."
칭원 클랜의 후방이라고 할 수 있는 클랜 본부 근처 언덕.
근처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무려 2km나 떨어진 거리에서 티파티 테이블 앞에 앉은 한 남자가 감탄사를 터뜨리고 있었다.
"거대 길드라고 부르기도 부끄러울 정도군. 안 그런가, 머슬만?"
감탄을 터뜨리는 남자는 탱커 노조의 클랜장 머슬만 의원이었는데, 그의 반대편에는 깔끔하게 다려진 제복을 입은 장교가 있었다.
그는 바로 연맹 클랜의 클랜장이자 딕 스테이시의 아버지, 스테이시 사령관이었다.
"이거라면 우리 탱커들도 속수무책일 것 같습니다, 사령관."
"물론이지. 괜히 우리의 비밀병기가 아니니까."
머슬만 의원은 방금 전 칭원 클랜의 클랜 코어를 박살 내버린 놀라운 콤보를 생각하며 다시 한번 혀를 내둘렀다.
초능력자의 특성 중 하나인 [투시]를 통한 클랜 코어 탐색과 저격수의 특성 [관통탄]을 이용한 일격 필살의 기술.
특히나 관통 관련 특성은 방어력과 피해 감소마저 일부, 혹은 전체를 무시할 수 있었다.
클랜 코어에도 자체적인 높은 방어력이 있었지만, 저격수는 일격에 코어를 박살 내버리지 않았던가.
"이거 분명 버그 픽스 당할 겁니다. 제가 장담하지요."
"행정부의 의원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확실하게 고쳐지겠군. 뭐, 당연한 일이겠지."
사령관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것은 버그성 플레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저격수의 공격은 구조물에 반감되거나, 거의 피해를 입히지 못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관통] 및 [관통탄] 특성을 가진 저격수들은 구조물에 걸린 피해 감소를 무시할 수 있었고,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인 것이다.
"아무튼..."
머슬만 의원은 우아하게 캐모마일 티를 마셨다.
"이걸로, 클랜과 관련된 일들은 다 정리가 되었겠군요."
"베타 테스트로 갈 준비가 다 끝난 셈이야."
연맹 클랜의 클랜장, 스테이시 사령관은 한쪽 눈썹을 치켜뜨며 찻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
마치 살아남은 이들의 찬란한 미래에 대해 축하라도 하려는 듯이.
머슬만 의원도 그런 사령관을 바라보며 마주 잔을 들어 올렸다.
완벽한 파멸의 길에 들어서 무너지기 시작한 칭원 클랜의 본부를 배경으로.
그렇게 서로의 잔을 부딪친 둘은, 이내 마지막 한 모금을 주욱 들이켰다.
"약속은 지키길 바라지, 머슬만 의원."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신 사령관은 무엇이 그리 급한지 찻잔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목적은 이루었으니, 더 남아 있을 이유는 없긴 했다.
"물론입니다, 사령관."
머슬만 의원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언제든지 연락만 해주시죠."
머슬만 의원의 말에 사령관은 머슬만 의원을 잠시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는데, 곧 사령관의 몸이 데이터화되어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그 자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머슬만 의원은 사령관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다가, 문득 세상이 조금 어두워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머슬만 의원이 어두워진 이유를 찾기 위해 하늘을 바라보자, 거기엔 수백 미터급의 거대한 우주 전함이 하늘에 떠 있었다.
우주 전함은 머슬만 의원에게 인사라도 하듯 하부에 달린 전조등들을 깜빡거리더니, 이내 차원을 도약하여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시금 세상이 밝아지자, 머슬만 의원은 빈 잔에 새롭게 캐모마일 티를 채워 천천히 그 맛을 음미했다.
캐모마일을 많이 마셔서 그런지, 오늘 밤엔 잠이 잘 오겠다고 생각하면서.
...
'자네들은 꽤 흥미로운 이들이군.'
'당신은 누구요?'
'글쎄. 모르겠군. 신비주의가 컨셉이라.'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알려줄 수 있지.'
'자네들은, 언젠가 다시 여기에 돌아오게 될 거야.'
'그때가 된다면, 내 친히 자네들을 반겨 주도록 하지.'
'그때까진 이만 헤어질 시간이네.'
...
헛.
아르쿠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부릅떴다.
흐린 하늘, 앙상한 나뭇가지, 그리고 메마른 흙먼지.
"여긴..."
"아무래도 우린 페럴란트로 돌아온 것 같소."
아르쿠스와 오그레손은 그들이 길을 잃었던 숲의 어귀에서 정신을 찾았다.
분명히 방금 전까지 그들은 전장의 한가운데에서 세상을 삼키는 뱀을 단죄하는 도미닉 경을 보고 있었던 것 같았으나, 그 모든 것이 꿈이라는 듯 숲은 고요하기만 했다.
물론 아르쿠스는 어째서인지 전사들의 전당 외에도 다른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까마귀의 얼굴을 한 하얀 노인... 어린아이... 아무튼, 그런 꿈을.
사람들의 고함 소리와 천둥번개가 치는 소리 대신 나뭇가지들이 스산하게 스치는 소리가 잔잔한 파도 소리처럼 들려오고, 폭우와 번개 대신 척박한 흙먼지가 반기는 곳.
계속해서 자리에서 누워 있던 아르쿠스는 전사들의 전당과 이곳의 공통점은 흐린 하늘 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내가 꿈을 꾼 거요?"
오그레손이 비몽사몽 한 상태로 아르쿠스에게 물었다.
"전사들의 전장을 엿본 것 같았는데, 혹시 이 모든 게 숲이 보여 준 환상이었던 거요?"
오그레손은 아르쿠스에게 확답을 들어야겠다는 듯, 절박한 소리로 말했다.
"꿈이 아닐세. 만일 꿈이라면, 우린 같은 꿈을 꾼 셈이겠지."
아무래도 우린 전사들의 전당에서 망령이 되기 전에 추방당한 것일지도 모르네. 라고 아르쿠스가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우린 도미닉 경을 직접 알현한 것이 되겠구려."
오그레손의 말에 아르쿠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모든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한다는 말이오?"
오그레손은 낙담했다.
전사들의 전당에서 겪은 일들은 많았으나, 그 일들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아르쿠스는 그런 오그레손의 말을 듣고도 담담했다.
"증거라면 있네."
아르쿠스는 품속에서 종이를 한 움큼 꺼냈다.
그 종이들은 페럴란트에서 가장 좋은 종이 보다도... 아니, 전 세계를 모두 통틀어서도 가장 좋은 종이였는데, 그 종이가 얼마나 새하얗던지 일견 신성해 보일 정도였다.
그 하얀 종이들에는 빼곡하게 글자가 쓰여져 있었는데, 이는 페럴란트어로 적혀 있었으나, 전 세계의 모든 언어로도 읽을 수 있는 신비한 언어로 번역되었다.
오그레손은 그 종이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지금까지 기록했던 것들이..."
"그래. 여기에 있네."
아르쿠스는 종이를 하나씩 넘기며 혹시라도 빠진 페이지가 없는지 확인했다.
대부분의 페이지는 전사들의 전당이 어떤 곳인지에 대한 문구였으나, 도미닉 경에 대한 문구도 만만치 않게 많았다.
아르쿠스는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뒤, 그 페이지 뒤에 있던 빈 종이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허리춤에 차고 있던 깃펜과 잉크를 꺼낸 뒤, 선 자세 그대로 무언가를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뭐, 뭐 하는 거요?"
"마지막에 본 것들을 기록하고 있네. 잊어버리기 전에."
오그레손은 그런 자세로 글이 제대로 적히기나 할지 걱정이었으나, 아르쿠스는 어째서인지 신들린 듯 글을 적어나갔다.
20분쯤 되었을까?
무아지경으로 무언가를 휘갈기던 아르쿠스가 제정신을 되찾았다.
아르쿠스는 무언가에 홀렸던 것처럼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는데, 그 탓에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떨어뜨릴 뻔했다.
"조, 조심 좀 하시오! 이런 귀한걸"
오그레손은 아르쿠스가 쓰러지려는 걸 부축하려다가 종이를 먼저 잡아챘다.
아르쿠스는 털썩 바닥에 쓰러져 어이가 없다는 듯 오그레손을 바라보았지만, 아르쿠스보다는 성유물이 될 수도 있는 기록물이 먼저였다.
"아니, 그래도 사람이 먼저 아닌가? 하얀 까마귀 님께서도 그리 말씀하시지 않던가."
"아이고, 주교님은 살 만큼 살지 않았소. 그보다는 앞으로 살아갈 날이 창창한 이 기록물이 더 중요한 거 아니겠소?"
오그레손은 그렇게 말하며 잠시 아르쿠스가 적은 글귀를 보았다.
초반부는 아직 전사들의 전당의 신묘함이 남아 있는지 다른 언어로도 읽혔으나, 뒤로 갈수록 신성함은 사라지고 평범한 페럴란트어로만 읽혔다.
아무래도 아르쿠스에게 깃든 신성력이 쇠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오그레손은 아르쿠스의 기록물에 아무런 토를 달 수 없었다.
그건 아르쿠스의 글씨가 놀랍도록 읽기 좋았더라는 점도 있지만, 종이에 그려진 한 삽화 때문이었다.
그 삽화는 사악한 뱀을 처단하는 도미닉 경의 성화였는데, 도미닉 경과 두 명의 여성 천사들이 함께 뱀을 땅으로 끌어내리는 모습이었다.
그 삽화의 아래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져 있었다.
[Et ait Santus Dominicus ad Serpentem, "morte morieries"]
"성 도미닉 경이 뱀에게 말하길...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오그레손은 제국어로 적혀 있음에도 페럴란트어로 읽히는 신비한 글자를 더듬더듬 읽었다.
후반부로 갈수록 신성함이 떨어져 읽을 수 없을 정도였지만, 마지막에 그려진 그 삽화와 문구 만큼은 그 어떤 글자들 보다도 신성하게 다가왔다.
오그레손은 괜히 그 성화에 감동해 말문을 잃었다가, 이내 그 종이를 고이 말아 아르쿠스에게 넘겨주었다.
이런 신성한 종이는 자기 같은 무지렁이가 만져서는 안 될 물건처럼 여겨졌으니까.
"이제 어떻게 할 거요?"
오그레손이 아르쿠스의 손에 종이를 넘기며 말했다.
"원래 목적은 도미닉 경을 위한 순례였잖소. 아무래도 그 건 이룬 것 같은데."
"그야 그렇지."
아르쿠스는 오그레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턱을 쓰다듬으며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이내 결정을 내렸다는 듯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페럴란트 성으로 가세."
"페럴란트 성으로? 설마?"
"그래. 그 설마일세."
아르쿠스는 오그레손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영주님과 대주교님께, 이것들을 보여드려야 하지 않겠나."
아르쿠스는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의 걸음걸이는 경쾌하기 그지없어서, 마치 십 년은 젊어진 것만 같았다.
"...길은 알고 그리 가는 거요?"
"모르겠네! 하지만 걷다 보면 언젠가 마을이 나오지 않겠나!"
"아이고, 저 길치를 어찌할고."
오그레손은 대책없이 걸어가는 아르쿠스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같이 갑시다!"
오그레손은 아르쿠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적어도 저 양반은 혼자서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과 함께.
하얀 까마귀의 가호가 둘에게 깃든 것일까?
신기하게도 둘이 걷는 방향엔, 페럴란트 성이 있었다.
물론, 조금 멀리 걸어가야 하긴 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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