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4화 〉 [283화]타이쿤 시티
* * *
"첫 번째로, 무슨 생각으로 이 도시 중간에 농장을 지으셨습니까?"
첫 번째 질문은 도미닉 경이 느끼기에 굉장히... 공격적이었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콧잔등이 살짝 움찔했을 뿐, 당당하게 이렇게 말했다.
"옛날부터 농장을 가지는 것이 소원이었소. 장원에서 살 정도로 대지주가 되어 내 이름을 가진 농원을 가지는 것이 꿈이었지."
도미닉 경은 농노 시절에 꾸었던 꿈을 이야기했다.
물론 그 꿈은 징집병으로 끌려가며 사라졌다.
그런 꿈을 꾸는 것보다는 살아남는 것이 먼저였으니까.
물론 기사가 된 이후에 다시 이 꿈은 고개를 들어 전쟁 후에 장원 하나를 요구해 평온히 살까도 생각해 본 적 있었다.
그만큼 도미닉 경에게 있어서 부유함의 상징은 바로 이 농장이었다.
무의식적으로나, 의식적으로나.
"애초에 나는 농노 출신 기사요. 할 줄 아는 거라곤 건초더미를 옮기거나 적의 수급을 옮기는 일만 할 줄 아는 사람이니, 생각나는 것이 농장밖에 없었소."
"잘하셨습니다."
"?"
페드로는 그 커다란 주걱턱을 이죽거리며 박수를 쳤다.
도미닉 경은 갑자기 칭찬을 하기 시작한 페드로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고용되기 전에도 도미닉 경께서 이곳에 농장을 지었다라는 기사에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습니다. 힐링. 이 삭막한 도시 내부에서 사람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오아시스 같은 곳이구나라고 생각했지요."
"잠깐, 잠깐. 어제 농장으로 등록했는데, 어떻게 당신이 그 사실을 알았소?"
"타이쿤 시티의 신문사들은 정말 엄청나게 빠르지요, Sir. 도미닉 경께서 저녁에 뭐 먹을지 고민하는 순간, 그들은 예지에 가까울 정도로 빠르게 도미닉 경이 먹은 저녁에 대해 떠들 겁니다."
도미닉 경은 그건 기사 보도가 아니라 그냥 예언이나 예측이 아닌가 싶었으나, 도미닉 경이 농장을 선택했다는 문구를 보면 꽤 잘 맞는 모양이었다.
"도미닉 경도 가끔 신문을 보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거기엔 주가의 폭등과 폭락 외에도 농산물의 가격 변동 같은 것들도 있으니까요. 개인적으로는 타이쿤 타임즈, 데일리 타이쿤을 봅니다만, 도미닉 경께선 농사를 지으시니 이걸 보시는 것도 좋을 겁니다."
페드로는 도미닉 경에게 'Agri.컬쳐'라는 신문을 건넸다.
"원래 문화 산업에 대해서 취재하던 데일리 컬쳐라는 곳에서 새롭게 런칭한 신문입니다만, 보자마자 딱 도미닉 경이 생각나더군요."
도미닉 경은 페드로에게서 신문을 받아들고 내용을 읽어보았다.
'귀신 헬리콥터 삽니다.', '경운기 대여', '만득이 시리즈'같이 사소한 글들도 있었으나, '3성 밀을 수확하는 방법'이나 '우리나라는 밀 부족 국가?'와 같은 유용한 정보도 많았다.
"도미닉 경?"
"아, 미안하오. 꽤 재밌는 이야기가 많아서 잠시 집중해 버렸소."
도미닉 경이 얼마나 이 신문을 집중해서 읽었던지, 페드로가 몇 번을 불러서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도미닉 경은 이 신문을 구독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신문을 접어 뒷면이 잘 보이도록 해 눈에 잘 보이는 곳에 치워뒀다.
뒷면엔 구독을 위한 주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방금 전의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도미닉 경은 그저 스스로가 농사를 짓고 싶은 마음에 그리하셨다고 했지만, 비단 도미닉 경만의 일이 아닙니다."
페드로는 조금 답답했던지 넥타이를 조금 풀었다.
그리고 이어진 말들을 통해 페드로가 왜 넥타이를 풀었는지 알 수 있었다.
더 많은 말을 쏟아 내기 위해서였다.
페드로는 품에서 그래프 하나를 꺼내어 도미닉 경에게 보여 주었다.
"여길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현재 타이쿤 시티의 사람들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지에 대한 그래프입니다. 다른 도시와 비교해서 얼마나 스트레스가 높은지에 대한 통계지요."
페드로가 손가락으로 빨간 줄을 가리켰다.
"가차랜드의 사람들은 가장 스트레스가 적습니다. 그들이 가진 스트레스의 대부분은 고작 가챠가 잘 안 풀릴 때 뿐입니다. 그마저도 다음번 가챠에서 잘 풀리면 그 작은 스트레스마저 없지요."
처음부터 열변을 토한 페드로는 잠깐 도미닉 경의 눈치를 살피더니, 사족을 덧붙였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이건 통계고, 그런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지 꼭 그렇다는 뜻이 아니니까요."
물론 도미닉 경은 그런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지만, 페드로는 고용인의 눈치를 살펴야하는 입장이었기에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다음은 레트로그라드군요. 여기 사람들은 게임의 난이도에 대해 불평합니다. 어떤 이는 너무 쉽다고 불평하고, 어떤 이들은 너무 어렵다고 불평하지요. 대개 게임 난이도는 쉽다고 하는 반면, 조작법이 어렵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걷고 뛰기만 하면 되었지, 왜 구르고 피하고 해야 하냐는 거지요. 여기는 평균적인 스트레스 지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노란색 선으로 그려진 레트로그라드의 스트레스 지수는 그래프의 중간보다 약간 아래였다.
"하지만 이걸 보십시오! 이게 바로 타이쿤 시티의 현 주소입니다!"
페드로는 그래프가 그려진 종이를 쾅 내려치며 파란색 그래프를 가리켰다.
파란색 그래프는 무려 차트의 최상단에 위치해 있었는데, 옆에는 폭발하는 모양의 도형과 함께 '당장 미쳐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라거나 '정신병원 의사들이 과로사할 정도!'라고 적혀 있었다.
"타이쿤 시티는 겉으로는 번영했지만, 속으로는 이미 썩어 버렸습니다. 부정과 부패요? 그건 여유가 있어야 할 수 있는 겁니다. 여기선 부정도, 부패도 할 수 없어요. 부정도 부패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살아야만 하는 도시가 바로 타이쿤 시티입니다. 그런 타이쿤 시티에서 잠깐의 힐링을 위해 외곽의 농장을 찾는다? 허, 있을 수 없지요. 당장 그렇게 쉬는 동안 경쟁자들은 저 위, 두 계단은 더 올라가 있을 텐데요."
페드로의 말은 타이쿤 시티의 성실함을 돌려까는 말이기도 했다.
너무나도 사람들이 성실한 나머지, 일만 있을 뿐 개인적인 시간도, 취미와 휴식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다.
물론, 페드로도 그런 타이쿤 시티의 사람들 중 하나였다.
이렇게나 '열심히', '열정적으로' 일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아무튼, 그런 도시에서, 아니, 바로 옆 몇 걸음만 가면 농장이 있다? 이건 아주 대단한 거지요. 거리가 가까우니 쉬어도 두 계단 밀릴 거 한 계단 밀릴 거라고 생각할 테고, 잠깐의 휴식이 능률을 높이니 그 정도는 따라잡을 수 있다고 여기겠지요. 전 여기서 도미닉 경의 대단함을 엿보았습니다. 그 미묘한 심리가 바로 소비로 이어지니까요."
도미닉 경은 페드로가 너무 나간 것은 아닌지 걱정했으나, 이내 페드로의 말에 다시금 빠져들었다.
페드로의 말은 도미닉 경이 들어도 그럴싸했기 때문이다.
물론, 도미닉 경의 의사에는 상관없이 말이다.
"유기농! 힐링! 타이쿤 시티의 지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지요. 그런 사람들의 니즈,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아주 좋은 사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이 사업을 생각하지 못했다라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물론 도시에서 농사를 짓지 않는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같은 규모의 농사를 짓는다고 할 때, 도시에서 짓는 비용이 엄청나게 비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타이쿤 시티에서는 달랐다.
타이쿤 시티에서는 그 어떤 업종도 시작 비용은 똑같았다.
도시에서 농장을 짓던, 아니면 낚시터를 짓던 그 비용은 무역 회사나 공장, 게임 개발사, 전자기기 개발사등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면 어째서 타이쿤 시티의 사람들은 도시에 농장을 짓겠다는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건 바로, 타이쿤 시티의 사람들이 도시 사람들이라는 점이었다.
당연히 타이쿤 시티는 도시가 맞지만, 도미닉 경이 가차랜드에 초대되어 온 것처럼, 타이쿤 시티의 사람들도 각 차원에서 꽤 이름 날리던 CEO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었기에 오히려 생각의 틀이 갇혀 버리는 바람에 도시에 농장을 짓는다는 엉뚱한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우연찮게 블루 오션을 찾게 된 도미닉 경.
도미닉 경은 그저 자기만의 농원을 가지고 싶었을 뿐이었으나, 페드로의 말을 듣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자, 그럼 다른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도미닉 경은 이 회사를 어떻게 운영하길 원하십니까?"
도미닉 경은 곰곰이 페드로의 말을 고민했다.
회사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짧은 시간 동안 저렇게 많은 것을 생각하는 페드로가 자기에게 저런 질문을 던졌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방금 전 질문에는 별생각 없이 대답했던 것과는 다르게, 도미닉 경은 이번 질문에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그러나 오래 생각한다고 해서 정답이라는 법은 없는 법.
도미닉 경은 깊게 생각하기보단, 그냥 말 그대로 회사의 운영 방침에 대해서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느긋하게. 느긋하게 가는 것이 좋겠소. 다른 사람들이 바쁘다고 해서, 우리가 바쁠 필요는 없지. 천천히 갑시다. 시각은 많지 않소?"
도미닉 경은 농사가 재촉한다고 잘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가차랜드와 타이쿤 시티에서는 가치만 있다면 얼마든지 되살아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시간도 넉넉한데다가 굳이 급하게 할 필요가 없다면, 느긋하게 가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한 도미닉 경.
페드로는 그런 도미닉 경을 향해 웃었다.
"좋군요. 참 독특하고 재밌는 회사가 될 것 같습니다."
도미닉 경의 답은, 적어도 페드로에게는 정답이었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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