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3화 〉 [282화]타이쿤 시티
* * *
도미닉 경이 선택한 것은 농장이었다.
사실 도미닉 경은 본디 농노 출신이기도 했거니와 이 작은 건물에서 농사를 지으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현실에선 엄청난 돈과 시간이 드는 일이겠지만, 여기는 가차랜드... 아니, 타이쿤 시티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농장이라니, 꽤 재밌네요. 보통 이런 건 도시 외곽에서 하는 법이니까요."
시내에서 하는 사람은 아직 본 적이 없네요. 라고 최진미가 덧붙였다.
"아무튼, 농장을 선택하셨으니 이제 첫 발걸음을 훌륭히 떼셨어요. 다음으로 넘어갈까요?"
도미닉 경은 최진미의 말에 괜찮다고 말할 뻔했으나, 이내 이 건물을 관리하던 사람의 조언이니 들어서 나쁠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미닉 경은 최진미에게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가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한 것으로 알게요. 그럼 다음은 농장답게 농장을 지어야겠죠?"
최진미의 말에 도미닉 경의 카드에 변화가 일어났다.
허공에 3D로 건물의 조감도가 나타난 것이다.
지금은 2층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아직은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이었다.
옆에는 각 층으로 바로 갈 수 있는 버튼이 있었고, 그 버튼을 누르면 다른 층으로 이동했다.
도미닉 경은 이 광경이 꽤 신기해 몇 번이고 버튼을 누르며 즐거워했다.
"보아하니 제대로 보이는 모양이네요."
"...?"
도미닉 경은 최진미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마치 안 보인다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 의문은 최진미의 다음 말에 바로 풀렸다.
"건물의 소유주가 아니면 볼 수 없거든요, 그거."
"아."
"원래는 누구라도 보였지만, 다른 회사에 다니는 스파이가 몰래 훔쳐보고 구조를 베끼거나 개조하는 경우도 많아서..."
도미닉 경은 최진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타이쿤 시티는 조금만 실수해도 도태되는 마경이었다.
그런 곳에서 다른 이들에게 물어뜯길 빌미를 제공하는 건 그야말로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도미닉 경은 이후에도 몇 번을 더 다른 층을 눌러보다가, 문득 1층이 아직 눌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층이 눌리지 않는군. 어떻게 된 거요?"
도미닉 경의 말에 최진미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곧 이렇게 말했다.
"아마 구조적으로 중요한 것이 1층에 들어설 모양이네요."
"중요한 것?"
"카운터라던가, 혹은 농산물을 직접 판매할 직거래장이라던가 겠죠."
최진미의 말은 꽤 그럴듯하게 들렸다.
"아무튼, 이제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 보세요. 허공에 뜬 조감도를 손가락으로 짚은 채 상하좌우로 움직이면"
최진미는 간단한 조작법을 설명해주었다.
모든 기초적인 조작법이 끝나자, 최진미는 도미닉 경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요. 이렇게나 제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 주신 분은 칸쿠 무사님 이후로 처음이어서 조금 말이 많아졌죠? 그 대신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최진미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죽도를 꺼냈다.
낡았지만, 꽤 고풍스러워 보이는 죽도였다.
"이건 저희 집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죽도예요. 이걸 팔아서 자금에 보태어 쓰세요."
"...! 그럴 순 없소. 가보라니."
도미닉 경은 최진미의 말에 한사코 죽도를 받지 않으려고 했다.
"괜찮아요. 저희 집에 이런 거 수백 개는 더 있으니까요. 하나 정도 판다고 해서 다를 건 없어요. 무엇보다 고작 10만 크레딧 정도니까요."
"...그럼 감사히 받겠소."
도미닉 경은 최진미에게서 죽도를 받아 인벤토리에 넣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칸쿠 무사 아래에 있으면서 다른 이들에게 통 크게 베푸는 일이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자, 그럼 이제 저는 가보도록 할게요. 칸쿠 무사님께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다른 일을 알아봐야 하거든요."
"살펴가시오."
도미닉 경은 모든 설명을 마치고 떠나려는 최진미에게 손을 흔들었다.
최진미는 그런 도미닉 경에게 공손하게 인사하고는, 도미닉 경이 눈을 한 번 깜빡이자마자 사라지고 말았다.
도미닉 경은 갑자기 최진미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크게 놀랐으나, 아무래도 포탈이나 워프 쪽인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납득시켰다.
"그나저나 농장이라..."
도미닉 경은 건물의 외관을 올려다보더니, 이내 1층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갔다.
1층은 아직 쓸 수 없는 건지 어둠만이 가득했다.
"...흠."
2층에 도착한 도미닉 경은 올라오자마자 놀라 몸이 굳고 말았다.
그리고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는데, 그 이유는 도미닉 경 앞에 엄청난 크기의 밀밭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건물의 크기를 생각하면 겉보다 안이 더 큰 상황이었으나, 도미닉 경은 이런 경우를 자주 보았기에 그 부분에 대해선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도미닉 경이 가장 크게 놀란 부분은 바로 여기에 하늘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는데, 하늘에선 바깥처럼 태양이 떠 있어 밀밭에 햇빛을 공급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하나의 농장 세계로군."
도미닉 경은 이 놀라운 광경에 혀를 내두르며 이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았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밀들을 살랑살랑 흔들자, 밀 밭에 투명한 늑대가 지나가듯 자국이 남았다.
도미닉 경은 그 자국에 가까이 다가가 밀알 몇 개를 손바닥으로 비며 입에 털어 넣었다.
곡물 특유의 은은한 단맛이 혀끝에 느껴지는 듯했다.
[★☆☆☆☆ 밀]
[빵을 만드는 재료입니다. 제분소를 거쳐 밀가루를 만들 수 있습니다.]
도미닉 경은 눈앞에 떠오르는 상태창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놀랐다.
이렇게나 맛있는 밀이 고작 1성일 뿐이라고?
그렇다면 5성이 되면 얼마나 맛있는 것일까?
도미닉 경은 점점 더 타이쿤 시티에 대해서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
"...헛."
도미닉 경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황급하게 시계를 바라보자, 벌써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다.
도대체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여기에서 일을 한 거지?
도미닉 경은 심각한 얼굴로 팔로 한 아름 끌어안은 밀짚들을 창고에 집어넣었다.
그냥 바닥에 내려놓는 수도 있었으나, 이미 몸에 배어 버린 습관은 어쩔 수가 없었다.
도미닉 경은 고개를 흔들며 더 이상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러다가는 페럴란트의 기사 도미닉 경이 아니라, 페럴란트의 농부 도미닉 씨가 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건, 도미닉 경의 근본을 짓밟는 행위와도 같았다.
물론 도미닉 경의 진정한 근본은 농노지만, 도미닉 경 스스로는 기사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이 부분에 대해선 넘어가자.
"이래선 안 되겠어. 차라리 대리인을 찾는 것이 더 낫겠군."
도미닉 경은 자신 대신 이 회사를 경영할 전문 경영인을 찾았다.
전문 경영인을 구인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는데, 고용 탭을 누르면 자동으로 지금 크레딧으로 고용 가능한 피고용인들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도미닉 경은 그다지 돈에 연연하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적당히 괜찮아 보이는 사람을 고용했다.
"반갑습니다, Sir. 당신이 내 새로운 고용인입니까?"
"그렇소. 혹시 당신이 페드로요?"
"그렇습니다. CEO로 지원한 페드로입니다, Sir."
페드로라고 불린 전문 경영인은 턱이 굉장히 발달된 남자였는데, 서글서글한 인상이 꽤 괜찮은 남자였다.
무엇보다도 적당한 주급에, 적당한 능력치가 마음에 들었던 도미닉 경은 그 자리에서 바로 페드로를 고용했다.
"좋습니다. 이제 당신은 제 상사가 되었군요. 제가 당신을 어떻게 불러야겠습니까, Sir?"
"그냥 도미닉 경이라고 부르시오. 왠지 다른 칭호로 불리기엔 어색할 것 같으니."
"알겠습니다, 도미닉 경. 이해했습니다."
페드로는 도미닉 경과의 호칭 문제를 정리한 뒤, 곧바로 도미닉 경과 함께 회사를 한 번 둘러보았다.
"대단하군요. 이틀이나 한 것 치곤 꽤 진척도가 빠릅니다, Sir."
"...? 하루요. 이틀이 아니라."
"데이터는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Sir. 도미닉 경, 당신은 이틀 동안 이 일을 붙잡고 있던 게 맞습니다."
페드로는 도미닉 경든 건축 카드의 좌측 하단을 톡톡쳤다.
페드로가 도미닉 경의 피고용인이 되면서 도미닉 경의 건축 카드를 공유할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무려 24시간 하고 8시간입니다. 그러니 이틀이 맞습니다, Sir."
"그, 그런..."
도미닉 경은 이례적으로 당황하며 주춤거렸다.
8시간했다고 생각했으나, 사실 무려 32시간이나 쉬지 않고 일에 몰두했다.
"이런 상황에서 저를 고용했다? 아주 훌륭한 선택이었습니다. 받은만큼 일한다. 내 철칙입니다."
페드로는 도미닉 경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주시는 금액으론 하루 12시간 일합니다. 여기에 1.5배를 더 주시면 24시간 동안 일할 수 있습니다. 도미닉 경,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도미닉 경은 페드로의 말에 순간 혹하기는 했으나, 그래도 24시각은 너무한 것 아닌가 싶어 고개를 가로저었다.
"원한다면 추가로 일해도 좋소. 시간당 1.5배로 계산해서 보너스로 드리리다."
"Oh."
페드로는 도미닉 경의 제안이 꽤 마음에 든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이토록 노동자를 생각하는 고용인은 드물지요. 열심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Sir."
만일 호감도가 눈에 보인다면, 도미닉 경에 대한 페드로의 호감도가 1 오르지 않았을까?
도미닉 경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이제부터 제가 몇 가지 질문을 해도 괜찮겠습니까?"
페드로는 도미닉 경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무슨 질문말이오? 가능한 선에서 모두 대답해 드리리다."
도미닉 경은 페드로가 제법 마음에 들었기에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별 건 아닙니다, 도미닉 경. 앞으로 우리 회사가 갈 길에 대한 질문입니다."
도미닉 경은 페드로의 말을 듣고 아차싶었다.
페드로를 고용만 했을 뿐, 회사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선 전혀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래. 이야기해 보시오."
도미닉 경은 마침 페드로가 그것을 물어본 것이 퍽 반가웠다.
제법 똑 부러지는 성격이란 소리였으니까.
그렇게 허락받은 페드로는 잠시 머릿속으로 내뱉을 말을 정리하고는, 도미닉 경에게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
"첫 번째로, 무슨 생각으로 이 도시 중간에 농장을 지으셨습니까?"
그리고 페드로의 말은, 꽤 묵직하게 도미닉 경에게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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