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1화 〉 [280화]상환 후일담
* * *
"...라는 내용이다."
도미닉 경은 갑자가 찾아와 대본을 툭 던진 양산박의 간부, 왕이를 바라보았다.
"그게 다 뭐요?"
도미닉 경은 황당하다는 듯 왕이를 쳐다보았는데, 왕이는 당연하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어제 있었던 일이지. 기억 안 나나?"
아니, 그게 아니라... 도미닉 경은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그나저나, 이걸 왜들고 온 거요?"
도미닉 경은 대신 근본적인 것을 묻기로 했다.
"어제의 싸움으로 인해 우린 적대적인 관계가 된 것 아니었소?"
"비즈니스엔 적도, 아군도 없는 법이지. 그저 돈만 있을 뿐."
왕이는 거만하게 다리를 꼬았다.
"무엇보다도, 불법적인 돈 보다는 합법적인 돈이 더 나은 게 당연한 것 아닌가?"
도미닉 경은 왕이의 말에 다시금 왕이가 내민 종이를 바라보았다.
그곳엔 [양산박 필름]이라는 이름의 상표가 찍혀 있었다.
아무래도, 이들은 양지화 계획으로 영화를 선택한 모양이었다.
"좋소. 다 이해할 수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말이오..."
도미닉 경은 대본에 있는 몇몇 부분을 지적했다.
"여기, 여기, 여기. 이 세 부분은 붙어 있을 필요가 있소? 매스 프로덕션과 양산박의 관계는 그렇다고 칩시다. 그런데 이게 다큐멘터리 영화인지 액션 영화인지, 아니면 느와르 영화인지 명확하지가 않소."
도미닉 경은 뜻밖에 정론으로 찌르고 들어갔다.
"게다가 마지막은 진부하기 그지없군. 이런 영화가 잘 될 거라고 보시오?"
"마지막에 '이 이야기는 실화를 기반으로 제작되었습니다.'라고 적고 근황이나 넣으면 꽤 팔리지 않을까?"
왕이는 이 사업이 실패할 일이 없다고 여기는 듯 당당했다.
"망하오. 확실히 망하오. 이게 진짜 일어난 일이어서 망정이지, 영화로 만들면 개연성이 없다고 까일 거요."
도미닉 경은 있는 힘껏 왕이를 말렸다.
비록 도미닉 경과 양산박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고, 왕이와도 그다지 사이가 좋다고 말할 순 없었으나 사람 하나가 나락으로 간다는데 그냥 보내는 것도 찝찝한 일이 아니겠는가.
"무엇보다도, 당신 스스로 미화를 왜 이렇게나 많이 했소? 게다가 속편을 예고하는 듯한 떡밥들은 다 뭐고? 우리 어제 싸웠을 땐 이러지 않았잖소."
도미닉 경은 어제 있었던 왕이와의 싸움을 기억해냈다.
위성 병기가 있기는 했으나 땅을 녹일 정도는 아니었고, 시스템이 인정할 정도의 위력만 나왔으며, 마지막에 멋지게 도망간 영화 속 왕이와는 달리 그때의 왕이는 도미닉 경에게 세 대를 맞고 이건 아니겠다 싶었는지 그대로 도망가지 않았던가.
무엇보다도, 아직 지하에 자리한 비밀 기지도 멀쩡한 상태였고.
아무리 양산박이라지만, 그렇게 비싼 건물을 폭파하고 그러기엔 눈치가 보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찍으면 안 된다?"
"지금으로선 그렇소."
"흠, 아쉽군. 진짜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했는데."
왕이는 정말 아쉽다는 듯 말했다.
"뭐,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지. 용무는 끝났으니까. 아, 내 제안은 잊지 말길 바래. 마음 정하면 여기로 연락하고."
왕이는 도미닉 경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앞 면엔 [양산박 필름 사장, 왕이]라는 문구와 전화번호가 쓰여져 있었고, 뒷 면엔 간단한 약력이 소개되어 있었다.
도미닉 경은 그 명함을 버릴까 말까 생각하다가, 그래도 일단 가지고 있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인벤토리에 명함을 집어넣었다.
"이제 가보시오. 일 없소."
도미닉 경은 일어선 왕이에게 명백한 축객령을 내렸다.
도미닉 경과 왕이가 살갑게 굴기엔, 둘 사이가 그리 가깝지 않은 탓이었다.
"뭐, 또 보도록 하지. 도미닉 경."
그땐 양산박일지, 양산박 필름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왕이가 삼류 악당이나 할 법한 대사를 말했다.
영화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도미닉 경은 왕이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한숨을 푹 내쉬었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미화가 가득한 영화 대본을 본 탓일지도 몰랐다.
도미닉 경은 미화로 가득한 영화가 아닌, 진짜 어제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도미닉 경은 일련의 시위대를 만난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시위대의 일원 중 양산박의 협박을 받은 이가 있던 것도 사실이었고, 그 협박을 받은 이가 부유한 가문의 일원인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당연하게도 도미닉 경이 받은 타이쿤 시티의 건물도 진짜였고.
다만 이후는 조금 각색이 있었다.
...
도미닉 경은 타이쿤 시티의 건물을 보기 위해 오랜만에 게이트를 탔다.
아직 발견하지 못한 지역이라고 뜨긴 했으나, 지도 앱을 통해서 마커를 활성화 시키자 게이트도 같이 활성화 되었다.
그렇게 게이트를 통해 간 타이쿤 시티.
보답으로 받은 건물을 찾아간 도미닉 경은 그 건물을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던 양산박의 일원들을 발견했다.
"앙? 뭐야. 여긴 우리 구역이다."
"그래. 당장 꺼져!"
양산박의 졸개들은 도미닉 경을 보고는 갖은 위협을 가했다.
그러나 졸개들은 도미닉 경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두, 두고 보자!"
도미닉 경은 이동기가 없었기에 도망가는 졸개들을 잡지 못했다.
그나마 양산박의 졸개들을 쫓아냈다는 사실에 만족한 채 건물에 대한 정보를 이것저것 알아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곧 정보 수집을 방해받고 말았는데, 도망간 졸개들이 조금 더 위의 간부들을 불러온 것이다.
"영혼의 향연이 시작되리라."
"그래. 당장 꺼져."
나름 간부라는 듯 개성이 있는 양산박의 간부들은 도미닉 경을 혼쭐내주려고 달려들었다.
당연하게도 그들도 도미닉 경의 상대는 아니었다.
"두, 두고 봐라!"
이후는 위의 반복이었다.
도망간 이들이 더 강한 이들을 데려오고, 그들이 도미닉 경에게 처참하게 지면 도망가서 또 더 강한 간부를 데려오고...
그렇게 몇 번을 한 뒤, 도미닉 경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마침 방금 전에 습격이 있었기에, 도미닉 경은 도망가던 간부 하나를 붙잡았다.
"이러다간 끝이 나질 않겠군. 너희 본진은 어디지? 한 번에 소탕해야겠다."
도미닉 경은 간부가 본진을 불 때까지 방패로 마구 때렸다.
그만큼 도미닉 경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그, 그만! 그만하십쇼! 저희 기지는 북쪽에 있습니다! 만일 원하신다면 두세 개 정도는 더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압도적인 폭력에 굴복한 양산박의 간부는, 이내 도미닉 경에게 모든 것을 불고야 말았다.
"북쪽. 북쪽이란 말이지."
도미닉 경은 조금 더 간부를 심문해 정확한 주소를 알아낸 뒤, 양산박의 비밀 기지로 향했다.
...
"어서 오시오. 무슨 용무로 오시었소?"
양산박 비밀기지의 입구는 마치 유원지처럼 되어 있었다.
입구에는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 있었는데, 청나라의 복식을 입고 변발을 한 넉살 좋은 얼굴의 노인이었다.
"여긴... 유원지처럼 보이는군."
도미닉 경이 중얼거리자 노인은 그 소리를 들었는지, 사람 좋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설명했다.
"요즘 양산박에서 양지화를 진행하고 있어서 말이오. 비밀 기지를 공개해 어트랙션으로 활용 중이라오."
커플들에게 그리 인기요. 인기! 라고 말하며 엄지를 치켜든 노인.
"그나저나 여긴 무슨 용무로 오셨소? 처음 보는 사람 같은데..."
"아."
도미닉 경은 양산박의 인원들이 자기 건물에 자꾸 쳐들어온다는 것을 노인에게 말해주었다.
노인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알았다는 듯 손바닥을 치며 말했다.
"그건 내 아들에게 가면 해결해 줄 거요. 내 아들이 여기 관리자인데, 원래 양산박의 최고 간부 중 하나였다가 요즘 요양한다고 여기 내려와 있소. 그러니 그 애한테 가면 다 해결해 줄 거요."
노인은 미스터 왕이 보냈다고 하면 바로 들여보내줄 거라면서 관리자실로 가는 길을 설명해 주었다.
"...고맙소."
도미닉 경은 갑자기 술술 풀리는 일에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미스터 왕이라는 노인의 말을 따라 비밀 기지 안으로 들어섰다.
그렇게 복잡한 복도를 지나 관리자실 앞에 도착한 도미닉 경은, 관리자실 앞에 있는 비서가 하는 말에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로 왕이님께 찾아오셨... 도미닉 경?"
"조제프 준장?"
도미닉 경은 놀란 눈으로 그 비서... 아니, 조제프 준장을 쳐다보았다.
"...그, 세상에. 도미닉 경이 왜 여기에..."
조제프 준장은 도미닉 경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에 놀란 토끼처럼 눈을 부릅떴다.
조제프 준장은 어쩔 줄을 모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무슨 용무로 오셨나요?"
공은 공, 사는 사.
조제프 준장은 공과 사를 구분하자고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며 도미닉 경에게 물었다.
도미닉 경도 조제프 준장의 태도를 보며, 굳이 옛 일을 꺼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그, 자꾸 양산박의 인원들이 내 건물에 쳐들어오길래 항의를 하러 왔소."
"항의라. 네. 알겠습니다. 그럼"
조제프 준장이 간단한 메모와 함께 관리자실의 문을 두드렸다.
"왕이님, 조제프입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와."
안에서 들린 답변과 함께 조제프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밖으로 나오면서 도미닉 경을 불렀다.
"안으로 들어가세요. 왕이님께서 부르십니다."
도미닉 경은 그 말에 관리자실 안으로 들어갔다.
다소 호화롭기는 했으나 생각보다는 소박한 방 안을 구경하던 도미닉 경의 등 뒤로 문이 닫혔다.
"...여긴 왜 왔지? 아니, 어떻게 왔지?"
"다들 그렇게 묻는구려. 일단 미스터 왕이 길을 알려 줬소."
"아, 세상에. 아버지. 왜 또 오지랖을..."
왕이는 도미닉 경의 말을 듣고 짜증이 난다는 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래. 그래서? 날 찾아온 이유는?"
왕이는 최대한 빨리 도미닉 경을 여기서 내보내기 위해 빠르게 본론을 물었다.
"양산박의 인원들이 자꾸 내 건물을 쳐들어오더구려."
"그래. 아랫 놈들에게 말해 둘..."
왕이는 도미닉 경의 말에 대충 답변하려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눈앞에 도미닉 경이 있으니, 내기를 하는 것이 어떨까?
도미닉 경이 이기면 문제를 해결해 주고, 내가 이기면 문제를 해결해주되 내 아래로 들어오라고 하는 거지.
왕이는 좋은 생각이라며 자신을 대견해했다.
"너, 나랑 싸우자. 네가 이기면 그 문제, 해결해주지. 다만 내가 이기면 내 아래로 들어와라."
그리고 그 생각은 바로 급발진으로 이어졌다.
"자, 너에게 세 수를 양보하지."
왕이는 고작 3성에 탱커인 도미닉 경의 공격이 아파봤자 얼마나 아프겠냐고 생각했다.
물론, 이를 거절할 도미닉 경이 아니었다.
"자, 무엇을 망설이는 거지? 내가 이렇"
왕이는 눈을 감고 거만하게 도미닉 경을 도발했다.
물론, 눈을 감았기에 왕이의 앞에 엄청난 기세를 내뿜으며 미소를 짓는 도미닉 경을 보지 못했다.
왕이는 이 날, 세 대를 먼저 맞고 도망치다가 도미닉 경이 던진 방패에 맞고 구른 뒤, 마운트를 당한 채 처참하게 당했다.
이것이 바로 그날의 전말이었다.
...
도미닉 경은 어제 일어났던 일을 정리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왕이가 두고 간 영화 대본을 문득 바라보았다.
도미닉 경은 그 대본을 잠시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벽난로로 향했다.
벽난로의 불길 속으로 툭. 하고 종이 뭉치가 떨어진다.
[상환]이라는 제목의 영화 대본은, 그렇게 천천히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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