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0화 〉 [279화]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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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내 말을 이해하셨다면... 아버지, 지금 당장 이곳을 벗어나 다시는 내 앞에 보이지 마세요."
왕이는 미스터 왕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내뱉었다.
"저를 아비를 죽인 패륜아로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왕이와 미스터 왕은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한 사람은 죽일 듯이 날카롭게 노려보았고, 한 사람은 씁쓸하게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던 두 사람 중 먼저 눈을 뗀 사람은 왕이였다.
그는 다시 조종사에게 명해 방향을 돌려 도미닉 경을 바라보았다.
"다음번에 또 내게 대적하면 이렇게 쉽게 넘어가진 않을 거다, 도미닉 경!"
왕이는 다시금 거만하고 오만한 태도로 도미닉 경에게 외쳤다.
마치 자기가 피해자라는 듯 교묘한 말솜씨로 말이다.
"...물론, 이번에 일으킨 일을 그냥 넘어간다는 뜻은 아니지만 말이다."
미안해요, 아버지.
왕이는 자기 자신도 들을 수 없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왕이가 도미닉 경을 노려보며 중얼거리는 사이, 왕이를 태운 비행 물체는 하늘로 천천히 솟구치기 시작했다.
왕이가 몸을 드러냈던 격납고의 문이 닫히며 왕이의 모습이 천천히 가려지기 시작했는데, 문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 왕이는 소매에 숨겨두었던 빨간 버튼을 눌렀다.
"이번 일에 대한 대가를 치러라, 도미닉 경."
그리고 버튼을 누른 결과는 즉각적으로 반영되었다.
비밀 기지 전체에 자폭 시스템이 발동되었던 것이다.
[경고! 경고! 자폭 시스템이 가동되었습니다!]
"...뭐?"
도미닉 경은 갑자기 귀가 아픈 사이렌 소리와 함께 울려 퍼지는 경고 문구에 당황했다.
기지 전체에 존재하던 붉은 경고등이 점멸하며 지금 상황이 위급 상황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자폭 시스템 가동까지. 앞으로. 15. 분. 3. 초. 입니다.]
뚝뚝 끊겨서 들리는 경고 문구는 듣는 이로 하여금 등골이 서늘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도미닉 경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했으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미스터 왕에게 소리쳤다.
"여길 빠져나가야 하오!"
그러나 도미닉 경의 외침은 미스터 왕에게 닿지 않았다.
미스터 왕은 현재 왕이의 말에 큰 충격을 받아 도미닉 경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정신 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도대체.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멍하게 있을 시간이 없소! 빨리 여기를 빠져나가야"
도미닉 경은 다급하게 외치며 미스터 왕에게 달려가려고 했다.
그러다가 문득 소파에 웅크려 탱커에 대한 비평을 털어놓는 조제프 준장에 대해서 떠올렸다.
조제프 준장은 비록 적이 되었으나, 왕이가 그녀에 대해서 언급하지도 않은 것을 보아 버려진 것이 확실했다.
도미닉 경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조제프 준장을 들쳐메었다.
아무리 적이었다지만, 무방비 상태의 여성을 두고 가는 것도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미스터 왕에게 다가온 도미닉 경은 미스터 왕의 어깨를 잡고 크게 휘두르며 정신을 차리라고 소리쳤다.
"정신 차리시오! 가만히 있다간 폭발에 휘말릴 거요. 당신은 죽으면 추방이라면서! 일단 살아야 아들을 다시 볼 것 아니오!"
도미닉 경은 생각의 흐름대로 미스터 왕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생각의 흐름이 지나치게 빠른 탓에 중간중간 생략된 부분도 있었으나, 요지는 살아남아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도미닉 경의 말에 미스터 왕은 정신을 차렸는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지. 살아 있어야 아들에게 변명이라도 하지."
미스터 왕은 그렇게 정신을 추스르고는, 도미닉 경을 향해 외쳤다.
"나가는 길은 여기요! 15분이라고 했으니, 아마 충분히 나갈 수 있으리"
[3. 분. 22. 초. 남았습니다.]
"...?"
"맙소사. 배 속이 걸려 있었던가?"
도미닉 경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에 의문을 가졌고, 미스터 왕은 왜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지 이해한 듯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왕이는 참으로 영악했다.
비밀 기지를 유지하고 보수하는 비용보다 새로운 비밀 기지를 만드는 비용이 더 싸게 먹힐 거라고 생각한 왕이는 침입자들에게 한 방 먹일 겸 자폭 장치를 가동했다.
그리고 그 자폭장치는, 침입자들에게 추가타를 먹이기 위한 시간 가속 장치가 달려 있었다.
15분이라는 나름 넉넉할 수도 있는 시간에 안도의 한숨을 쉬는 이들을 단번에 당황하게 할 한 방을 집어넣은 것이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집어넣은 기만 한 스푼.
양산박의 최고 간부 다운 비열함이었다.
"이러면 곧 폭발하오! 도망치기에는 시간이 없소!"
미스터 왕의 외침에 도미닉 경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사이렌 소리가 같은 간격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으나, 도미닉 경의 심장은 점점 더 빠르게 뛰었다.
그리고
...
비밀 기지의 상공, 왕이가 탄 비행 물체 내부.
왕이는 와인잔을 입에 가져다 대며 와인의 맛과 향을 음미했다.
기분이 더러워진 탓에 우아하고 기품있는 취미 생활로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이내 다시 미스터 왕이 떠오른 왕이는, 바로 와인잔을 집어던져 버렸다.
막대한 분노가 왕이를 집어삼켰다.
"어떻게, 어떻게 뻔뻔하게도 내 눈앞에 나타날 수 있는 거지? 수십 년 동안 연락도 끊었으면서?"
왕이는 씩씩거리며 화를 삭이려고 노력하다가, 이내 리모컨을 들어 비행 물체 내부에 비치된 모니터의 전원을 켰다.
모니터에는 비밀 기지의 전경이 보였는데, 아무래도 비밀기지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찍는 듯 화질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왕이는 모니터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두 눈으로.
"아버지, 전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합니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던 왕이는, 이내 비행 물체 내부에 비치된 시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간이 되자, 왕이는 작게 중얼거렸다.
"잘 가세요. 아버지."
저 멀리서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왕이가 기다리던 소리였다.
모니터 속 비밀 기지는 아직 멀쩡한 상태였으나, 그 폭발 소리를 신호로 곧 모니터 속 비밀 기지가 폭발했다.
화질이 나빠서인지 제대로 구분은 가지 않았으나, 비밀 기지의 꼭대기에서 무언가가 퉁겨져 나갈 정도로 강한 폭발이었다.
비밀 기지는 폭발로 인한 불길 속에서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리듯 구덩이 속으로 녹아내렸다.
왕이는 그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고는 리모컨을 들어 다시 모니터를 껐다.
더 이상 볼 것이 없다고 여긴 것이다.
"...만일 그곳에서 살아남는다면."
왕이는 새로운 와인잔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새로운 와인을 따라내었다.
"그때는, 아버지를 용서하겠습니다."
왕이가 잔을 높이 들었다.
불길에 휩쌓였을 아버지를 위한 한 잔이었다.
...
불타오르는 기지의 외곽.
기지는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리듯 구덩이 아래로 사라졌다.
레미의 특수 기술이 만든 구덩이를 메우고도 남아 하나의 거대한 금속 덩어리로 변해 버렸다.
외부가 저런데, 내부는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당연하게도 안에 있던 이들은 갇혀서 죽음만을 기다리거나, 아니면 이미 죽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도미닉 경은 어떻게 되었을까?
건물 안에 갇혀 있을까?
아니면 죽고 부활을 했을까?
도미닉 경의 스탯과 방어도, 그리고 피해 감소를 생각하면 도미닉 경이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면 건물 안에 갇혀 있는 것일까?
물론, 그것도 아니었다.
도미닉 경은 지금 녹아내리는 비밀 기지가 있는 구덩이 위에서 녹아내리는 비밀 기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스터 왕과, 조제프 준장과 함께.
"...고구마 구워 먹고 싶네요."
도미닉 경의 왼편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있던 조제프 준장이 조금은 충격에서 벗어난 듯 도미닉 경에게 말했다.
여전히 헛소리를 하는 것은 똑같았으나, 그나마 현실을 부정하고 있지는 않았다.
"이해를 못하겠소."
도미닉 경의 오른편에서 가부좌를 튼 채 한숨을 내쉰 미스터 왕이 말했다.
"어째서 오랜만에 만난 아들이 이렇게 나를 적대하는지 아직도 이해를 못하겠소."
미스터 왕도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듯, 한숨만 계속 내쉴 뿐이었다.
도미닉 경은 두 사람의 푸념을 듣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몸을 돌려 고개를 숙였다.
"고맙소, 둘 다."
그리고 그 자리엔, 도미니카 경과 히메가 있었다.
...
방금 전, 자폭으로 인해 곧 무너질 개인실에서 도미닉 경은 사실상 탈출을 포기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도미닉 경 혼자서 둘을 들쳐메고 가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60. 초. 남았습니다.]
도미닉 경은 고작 1분이란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죽음을 맞이할 마음가짐을 준비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저 위에서 비행정이 나타나기 전까진.
도미닉 경은 멍하게 뚤려 있는 구멍을 통해 비행정을 바라보았다.
비행정? 여기에?
그때, 도미닉 경의 전화가 울렸다.
도미닉 경은 순식간에 전화를 받았다.
"지금 구하러 가니까 준비해!"
도미닉 경은 전화 속의 목소리가 도미니카 경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비행정에서 엄청난 길이의 밧줄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 밧줄들을 타고 한 그림자가 날렵하게 내려오기 시작하더니, 도미닉 경의 눈앞에 멈춰 서서 손을 내밀었다.
"도미닉 경, 구하러 왔어요."
그것은, 히메였다.
...
히메는 밧줄마다 한 사람씩 묶고는, 마지막 밧줄을 당겨 신호를 보냈다.
너무 긴 밧줄이었기에 어설프게 당겨선 신호가 전달되지 않을 것이었으나, 쿠노이치의 비전을 배운 히메의 비법으로 신호는 정상적으로 전달되었다.
그렇게 밧줄이 끌어올려지며 구출되는 도미닉 경의 일행들.
"구하러 와 줘서 고맙소, 히메 공."
밧줄에 묶인 채 끌어올려지던 도미닉 경은 바로 옆 밧줄을 잡은 히메를 바라보았다.
"뭘요. 우리 사이에 도와주는 것이 당연하잖아요?"
도미닉 경은 우리 사이라는 말이 조금 신경 쓰였으나, 이내 도미닉 경은 그 말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자폭 시스템, 가동합니다.]
마침내, 자폭 시스템이 가동된 것이다.
지하 깊숙한 곳, 비밀 기지의 지반에 숨겨져 있던 엄청난 양의 폭발물과 인화물이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그 폭발은 좁은 구덩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레미의 궤도 폭격이 뚫어놓은 구멍을 따라 솟구치기 시작했다.
"...!"
"더, 더 빨리 올라가야 해요!"
히메는 더 빨리 끌어올리라는 듯 밧줄을 더 힘차게 흔들었다.
쿠노이치의 비술로 인해 신호는 제대로 전달되어 밧줄이 끌어올려지는 속도가 빨라졌다.
그런데도 아래에서 일어난 폭발은 도미닉 경의 콧잔등을 간지럽히며 어른 거리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도미닉 경의 일행이 폭발에 휩쓸릴 일은 없었다.
폭발이 구멍을 통해 완전히 터져 나오기 전, 도미닉 경의 일행은 비행선에 탑승할 수 있었다.
비행선에 타고 있던 도미니카 경은 모두가 다 타자마자 곧바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왕이가 모니터로 보던 폭발의 잔해는, 사실 도미니카 경이 몰고 있던 비행선이었다.
...
도미닉 경은 여전히 불타오르는 구덩이를 씁쓸하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몸을 돌려 어디론가 향했다.
그런 도미닉 경을 향해 도미니카 경과 히메가 다가왔다.
"어딜 가는 거야?"
"더 이상 여기에 볼일은 없소. 양산박에게 한 방 먹이겠다는 내 목표도 달성했으니 말이오. 그러나"
도미닉 경은 저 멀리 노을이 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도미닉 경이 걸어가던 방향이었다.
"아직 문제가 남아 있으니 대비해야 하지 않겠소."
도미닉 경은 다시금 몸을 돌렸다.
"양산박에게 진 빚을 상환했지만, 아직 남은 게 많소."
그렇게 말한 도미닉 경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도미니카 경과 히메는 말없이 도미닉 경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도미닉 경이 걸어가는 방향으로 같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저 멀리 저녁노을이 하늘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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