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6화 〉 [275화]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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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닉 경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개인실로 향하는 마지막 보안인 자물쇠로 잠긴 문을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 문에 달린 자물쇠를 바라보았다.
자물쇠는 열쇠로 여는 방식의 심플한 구조였다.
약간 구식이긴 했으나, 일반적인 자물쇠와는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이건...어째서 가장 큰 보안이라고 했는지 알 것 같군."
그러나 도미닉 경은 그 자물쇠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도미닉 경이 보고 있는 문은 무려 높이가 20미터에 달하는 성문이었고, 그 문에 잠긴 자물쇠는 크기가 웬만한 집채만큼이나 컸던 것이다.
그야말로 물리적으로 가장 큰 보안이었다.
"도대체 이런 자물쇠는 어디서 구한 건지 모르겠구려."
도미닉 경이 미스터 왕에게 자물쇠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어쩔 수 없소. 당시에는 저게 정말 좋은 생각인 줄 알았으니."
"설마 당신이 이 보안을...?"
미스터 왕은 머쓱한 듯 수염을 쓸어내렸다.
아무래도 이 보안 장치를 생각했던 사람은 미스터 왕이었던 모양이었다.
도미닉 경은 이 황당한 보안을 책잡기보다는 미스터 왕이 이 보안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잘되었군. 보안을 만든 당사자이니 보안을 푸는 방법도 알고 있겠구려."
"그것이..."
미스터 왕은 도미닉 경의 말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 문을 열기 위해선 열쇠가 필요하오. 자물쇠를 열고 옆으로 치우지 않으면 문이 열리지 않소."
당기는 문이라서 그렇소. 라며 미스터 왕이 자물쇠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본래 저 보안의 열쇠는 이 기지의 관리자가 하나, 기지 내부에 여벌로 하나가 있었소."
"당신은? 보안을 만든 당사자니 여분의 열쇠를 가지고 있었을 것 같소만."
미스터 왕은 도미닉 경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알았느냐는 눈빛이었으나, 이내 자기가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도미닉 경은 그 모습을 보며 오늘따라 촉이 좋다고 생각했다.
분명 미스터 왕이 이 보안을 만들었으니, 보안을 뚫을 여분의 열쇠를 복제하지 않았겠는가?
"자, 이제 보안을 푸시오. 혹시라도 시간이 걸린다면 내가 도와주겠소."
"..."
미스터 왕은 도미닉 경의 재촉에도 그저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지 의문을 가진 도미닉 경은, 이내 어떤 머릿속에 한 가지 가정이 지나갔다.
"혹시... 열쇠를 잃어버렸다거나?"
움찔. 하고 미스터 왕의 몸이 떨렸다.
"양산박에서 나올 때, 혹시나 해서 가지고 나왔는데 너무 오랫동안 방치한 나머지 어디에 둔 지도 모르겠고, 찾을 수도 없어서 그냥 포기하고 있다던가?"
움찔. 하고 미스터 왕의 몸이 또 떨렸다.
아무래도 도미닉 경의 추측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도미닉 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는 말은, 이 엄청난 자물쇠를 풀기 위해선 기지 관리자를 찾거나, 혹은 여분의 열쇠를 찾아야 한다는 소리였다.
지금 도미닉 경과 미스터 왕은 기지 관리자인 최고 간부를 찾기 위해 개인실로 가는 중이었기에, 사실상 여분의 열쇠를 찾는 것 외에는 답이 없었다.
"이거 큰일이군. 여분의 열쇠는 어디에 있소?"
"모르오. 여분의 열쇠는 기지를 관리하는 행정관이 대대로 비밀을 지키며 숨겼다고는 하는데..."
아. 도미닉 경은 미스터 왕의 말에 긴 탄식을 내뱉었다.
그야말로 더 이상 진행이 막혀 버린 상황.
힌트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무언가 과금을 할 요소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물쇠는 존재했고, 그 자물쇠를 열려면 기지 관리자의 열쇠나 여분의 열쇠를 얻어야 했으며, 그 열쇠는 기지 관리자와 비밀의 공간에 있다. 그리고 그 비밀의 공간은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야말로 8비트, 16비트 시대의 RPG 게임을 보는 듯한 답답함.
"어쩔 수 없군. 일단 여기서 다음 수를 생각해 봅시다..."
미스터 왕은 그 자리에 가부좌를 튼 채 주저앉아 명상에 잠겼다.
아무래도 이 상황을 타개할 계획을 세우려는 모양이었다.
도미닉 경은 그런 미스터 왕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고는, 다시 저 거대한 자물쇠를 바라보았다.
"정말 무지막지하게 큰 자물쇠로군."
도미닉 경은 집채만 한 자물쇠를 보며 감탄을 터뜨렸다.
문의 높이만 해도 20미터에, 문 한 짝의 가로 길이만 해도 스무 걸음 가까이 되었다.
자물쇠는 투박한 무쇠로 만들어진 것 같았는데, 일부분의 코팅이 벗겨졌는지 살짝 녹이 슨 부분들이 보였다.
혹시 저 녹이 슨 부분을 공략한다면?
도미닉 경의 머릿속에서 전구가 반짝였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이내 그 아이디어를 버릴 수밖에 없었는데, 미스터 왕과 도미닉 경은 저 두꺼운 무쇠 기둥을 끊을 만큼의 장비를 가지고 오지 못해서였다.
그 이후에도 도미닉 경은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으나, 현실적인 문제로 모든 아이디어들이 좌초된 배들처럼 생각의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도미닉 경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너무 생각을 많이 한 모양이었다.
잠시 머리를 식힐 겸 자리에서 일어난 도미닉 경은, 잠시 미스터 왕을 바라보았다.
혹시 그가 좋은 생각을 했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나 미스터 왕도 도미닉 경과 마찬가지였는지, 얼굴이 시시각각 변하고는 있었지만 명쾌한 표정은 나오지 않았다.
도미닉 경은 미스터 왕에게 말을 걸어볼까 했으나, 미스터 왕이 너무나도 집중하고 있었기에 이내 도미닉 경은 말을 거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도미닉 경은 산책이라도 할 생각으로 이 거대한 자물쇠 주변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다른 각도에서 보면 해결책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때, 도미닉 경은 문득 자물쇠 아래에 거대한 러그가 깔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멀리서 볼 때에는 자물쇠의 존재감에 묻혀 몰랐으나, 문 앞에 러그가 깔렸었다.
도미닉 경은 혹시나 이런 것들이 더 있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몇 개의 화분과 러그 하나.
도미닉 경이 자물쇠로 인해 놓치고 있던 전부였다.
문과 자물쇠에 비해 화분과 러그는 너무나도 평범한 크기였기에 눈에 띠지 않았다.
도미닉 경은 문득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건 일급 보안인데,예비용 열쇠는 항상 화분 아래. 거기 없으면 카페트 구석을 들춰 보면 나오니까 기억해 둬.'
도미닉 경이 가차랜드에 도착해 우연히 시스템 인더스트리에 취직했을 때, 그의 선배 왈록이 가르쳐 준 말이었다.
도미닉 경은 그 말을 따라 화분들을 들춰 보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화분들 아래에는 5레벨 보안 카드, 리듬 게임용 어뮤즈먼트 카드, 락픽과 자물쇠 따기용 드릴이 있었으나 도미닉 경이 원하는 열쇠는 없었다.
도미닉 경은 다시 화분들을 원래의 자리에 돌려 두고 이번엔 러그 아래를 들춰 보았다.
네 귀퉁이를 한 번씩 확인한 도미닉 경은 이내 마지막 귀퉁이에서 열쇠를 찾을 수 있었는데, 어떻게 그 작은 러그 아래에 숨을 수 있었는지 궁금할 정도로 커다란 열쇠였다.
물론 자물쇠에 비하면 작은 열쇠였으나, 자물쇠의 열쇠 구멍을 생각하면 이 정도 크기가 맞아떨어질 것 같았다.
"좋아. 한번 해 보자고."
도미닉 경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열쇠를 양손으로 껴안았다.
그리고 자물쇠의 구멍과 열쇠의 끝을 맞춘 뒤, 있는 힘껏 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내부가 조금 녹슨 것인지 열쇠는 어렵게 구멍에 들어갔는데, 도미닉 경은 이내 철컥하는 소리를 들었다.
아무래도 이 열쇠가 맞는 모양이었다.
도미닉 경은 이제 완전히 들어간 열쇠의 손잡이 부분을 돌려야 했다.
양손을 비비고 제자리에서 도약한 도미닉 경은, 열쇠 손잡이 고리의 윗부분을 잡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몸무게와 반동을 이용해 열쇠를 서서히 돌리자, 덜컹하고 갑자기 몸이 떨어지는 느낌과 함께 자물쇠가 풀렸다.
"되었군."
도미닉 경은 자물쇠가 풀린 충격으로 열쇠고리를 놓치는 바람에 먼지투성이 바닥에 구르고 말았다.
몸에 묻은 먼지를 탈탈 털어낸 도미닉 경은 이내 앞으로 고꾸라지는 자물쇠를 피해 미스터 왕의 옆으로 다가왔다.
"건드리지 마시오. 생각중이니 건드리면 주화입마를"
미스터 왕은 아직도 자물쇠를 풀 궁리를 하느라 몰두하는 바람에 도미닉 경이 자물쇠를 풀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도미닉 경이 가까이 다가가자 그제야 도미닉 경을 인식하고 한 마디 하려던 미스터 왕은, 갑자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흙먼지를 피워올리며 쓰러진 자물쇠에 놀라 펄쩍 뛰어올랐다.
미스터 왕은 도미닉 경이 자물쇠를 풀었다는 것을 잠깐 인지하지 못해 눈만 껌뻑이다가, 이내 도미닉 경이 자물쇠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럴 수가. 어떻게 깼소? 아무리 생각해도 수가 없었는데!"
"러그 아래에 있었소."
도미닉 경은 러그가 있던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으나, 이미 그 자리는 자물쇠가 넘어지며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비밀 열쇠가 집 열쇠 여분처럼 놓여져 있었다고?"
미스터 왕은 어이가 없다는 듯 쓰러진 자물쇠를 바라보았다.
"뭐, 그래도 확실히 여러 의미로 큰 보안이기는 했소."
도미닉 경은 어깨를 으쓱했다.
문제를 풀었다는 약간의 뿌듯함이 있었다.
"아무튼, 빨리 다음으로 넘어가도록 합시다."
도미닉 경은 먼지가 가라앉으며 보이기 시작한 열린 문을 바라보았다.
"저 너머가 개인실이란 말이지."
정확하게는, 그 문 너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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