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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차랜드의 행복한 도미닉 경-272화 (272/528)

〈 272화 〉 [271화]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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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미스터 왕이라고 지칭한 노인과 도미닉 경의 기묘한 대치는 다시 불이 켜지며 끝났다.

미스터 왕은 슬쩍 미간을 찌푸리며 불이 들어온 형광등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조만간 사무실을 옮겨야겠구려. 세가 싸길래 바로 계약했더니 이렇게 정전이 자주 일어나서야..."

"꽤 자주 정전이 되나 보오?"

"한 달에 일곱 번 정도는 정전이 일어나더구려. 집주인 말로는 집주인 아들이 코인인가 뭔가를 캔다고 하던데..."

"흠."

미스터 왕은 꽤 느긋한 성격이었던지 잡다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빨리 일을 끝내고 싶었던 도미닉 경은 헛기침으로 미스터 왕의 말을 끊었다.

"알고 있겠지만, 빚을 상환하러 왔소."

"빚. 빚이라."

미스터 왕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자네에겐 돈을 빌려준 기억이 없소만."

"칸쿠 무사의 아들, 마간을 기억하시오?"

"마간...? 아. 무려 3억 가차석을 빌려갔던 그 청년 말이오? 당연히 기억하고 있소."

"그렇다면 말이 빠르겠구려. 여기 빚을 갚을 돈 3억 5000만 가차석이오. 이자까지 계산한 돈이오."

도미닉 경은 미스터 왕에게 가차석이 가득 든 주머니를 건넸다.

그러나 미스터 왕은 도미닉 경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그 돈을 지금 받을 수는 없을 것 같구려."

"...어째서요?"

도미닉 경은 은근슬쩍 왼손에 든 방패로 칼집을 가렸다.

그리고 오른손을 슬쩍 칼의 손잡이 위에 올려 두었다.

혹시라도 일이 틀어질 때를 대비한 자기방어의 일환이었다.

"우리는 현금으로 받지 않소. 인터넷 뱅킹으로 받지. 요즘 세상에 도대체 누가 아날로그식 감성으로 일을 처리한단 말이오?"

미스터 왕은 당연하다는 듯 도미닉 경에게 말했다.

"게다가 가차랜드의 시스템은 그 어떤 차원보다 정교하고 안전하니, 안 쓰는 사람이 손해지. 안 그렇소?"

도미닉 경은 뜻밖에 정론을 펼치는 미스터 왕의 논리에 벙찐 표정이 되었다.

"그래도 이렇게 고생하며 가져오셨으니, 이번만큼은 받아들이리다."

조금 있다가 은행에 들러야겠군. 미스터 왕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양산박의 사람이 가질 논리는 아니구려."

"양산박이라."

똑똑똑.

"저기, 커피 타 왔습니다."

문 너머에서 방금 전 어리바리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게."

미스터 왕이 그리 말하자, 어리바리한 남자는 사장실 가운데에 있는 탁자에 한 잔, 그리고 사장이 앉은 책상에 한 잔을 놓았다.

이후 둘을 향해 허리를 90도로 숙인 어리바리한 남자는, 바로 문을 열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더 있다가 실례라도 한다면, 선배들에게 한 소리를 들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미스터 왕은 그 남자가 타 온 커피를 슬쩍 맛보며 도미닉 경을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양산박과 꽤 악연인 모양이오. 그렇지 않소?"

"...?"

도미닉 경은 미스터 왕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미스터 왕은 양산박과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마간을 협박하던 이는 양산박의 사람이었다.

분명 둘 사이에는 무언가 연결고리가 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도미닉 경은 강하게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양산박과 관련이 없다는 말로 빠져나가려는 모양인데, 통하지 않소."

도미닉 경의 말에 미스터 왕은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틀리진 않소. 나는 양산박의 일원이오. 아니, 정확하게는 구 양산박의 일원이라고 해야겠지."

"구 양산박?"

도미닉 경은 미스터 왕의 말에 눈을 가느다랗게 좁혔다.

"알다시피 양산박은... 불법적인 일로 유명하오."

미스터 왕은 자조적으로 그리 말했다.

"그리고 불법적인 일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동업자의 뒤통수를 치려고 하는 법이지. 불법적인 일하는 사람들 치고 의리가 강한 사람을 본 적이 없소."

도미닉 경은 그 설득력이 가득한 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과거 페럴란트에서 산적들이 나타났을 때, 서로 살기 위해서 본채의 위치를 불던 일이 생각난 것이다.

"간부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소. 다들 간부가 되려고 옛 간부들을 담그고 모함하고... 뭐 그런 거요. 나는 운이 좋아서 뒷방 늙은이로 물러날 수 있었지만..."

미스터 왕은 살짝 말끝을 흐렸다.

"말이 길었군. 아무튼 지금 나는 양산박과 관련이 없소. 이미 손을 씻은지 오래요."

미스터 왕은 양산박과 자기 사이를 인정하면서도, 또 그 사이를 부정했다.

그리고 그 논리는 도미닉 경이 듣기에 빈틈이 없어 보였다.

도미닉 경은 다시 검집에서 손을 떼었다.

약간은 경계를 풀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했다.

도미닉 경은 더 이상 이들과 양산박의 관계를 추궁하는 대신, 마간을 겁박했던 그 간부에 대해서 물어보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마간을 겁박하던 이는 양산박의 간부더군."

"그럴 거요."

미스터 왕은 도미닉 경에게 숨기는 것이 없었다.

"사실, 양산박에는 내 아들이 있소."

미스터 왕은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제 완전히 바닥을 보인 종이컵을 씁쓸하게 바라보던 미스터 왕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어갔다.

"한 때, 내가 아직 간부일 때, 세상이 모두 내 것인 것 같았을 때, 내가 이룩한 모든 것이 영원할 것 같았을 때 가입시킨 아들이오."

미스터 왕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에 쥐고 있던 종이컵은 완전히 구겨져 본래의 형체를 찾아볼 수 없었다.

"사실, 내가 이룩한 걸 물려주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세상에는 영원한 것은 없고, 또 불법적인 일이라면 더 그런 법이지 않소?"

미스터 왕은 잠시 구겨진 종이컵을 바라보더니, 씁쓸하게 그 종이컵의 잔해를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미스터 왕도, 도미닉 경도 이다음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이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다시 미스터 왕이었다.

"그들이 내 아들을 인질로 잡았소."

"인질로?"

"그렇소. 아들을 인질로 채무 관계를 양산박에 팔라고 했지만, 이 바닥이 워낙 신용이 중요한 바닥이라 그리하지 못하겠다고 했소. 그럼 대신 추심이라도 자기들이 보낸 사람들이 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부탁하더군."

부탁이라고 해도 사실상 협박이나 다름없었지. 라고 말한 미스터 왕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처지에서는 그들의 제안을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지. 사실, 우리가 하는 것보다는 다른 전문적인 이들이 하는 것이 더 나은 때도 있었으니까."

도미닉 경은 미스터 왕의 말을 들으며 미스터 왕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혹시 특정한 일하면 빚을 반으로 줄여 준다거나 하는 것도 양산박의 짓이요?"

"빚을 반으로? 그럴 수는 없지. 우린 받지 못하거나 아주 오랜 기간 동안 받을지언정, 빚을 탕감해주거나 하는 일은 없소. 하는 일은 확실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도미닉 경은 미스터 왕의 말에서 어렴풋이 단서를 찾았다.

마간은 양산박의 간부에게서 일을 하나 하면 빚을 절반으로 줄여주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미스터 왕은 자신들은 그런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도미닉 경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들은 미끼다.

미스터 왕과 마간을 앞세워 희생양으로 삼고, 뒤에 숨어 실질적인 이득을 가져가려는 양산박의 계략이다.

세상에. 도미닉 경이 이토록 논리정연하게 생각한 적은 거의 없었으나, 도미닉 경의 추측은 대부분 옳은 것이었다.

"...아무래도 당신은 마간에게 돈을 빌려 줬을 뿐, 다른 생각은 없는 것 같군. 그렇소?"

"내 처지에서는 돈을 빌려주고 돈을 갚으면 그만이니까 말이오. 따로 무언가를 할 생각은 없었소. 실제로 이렇게 돈을 가져 왔으니 내 역할은 끝난 거요."

"그렇다면 나도 당신과 이렇게 마주할 이유가 사라진 셈이로구려."

"뭐, 담소를 더 나누고 싶다면 얼마든지 있어도 좋소. 사실 요즘 적적하던 참이라..."

미스터 왕은 사람 좋은 표정으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도미닉 경은 문득 미스터 왕이 구 양산박의 일원이라고 했던 말을 기억했다.

도미닉 경과 양산박은 꽤 악연이 깊었기에, 도미닉 경은 이참에 양산박에 대한 정보를 얻어볼 생각했다.

그러나 너무 직접 물어보기엔 아직 미스터 왕과 도미닉 경 사이의 관계가 그리 깊지 않았으니, 약간의 친분부터 다져볼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니 당신에게 아들이 있다고 했었지. 양산박에 있다고 했소?"

"그렇소. 내가 한창 잘 나가던 때에 가입했었으니, 지금쯤 수십 년은 일하고 있었겠구려."

수십 년. 도미닉 경은 강산이 변해도 몇 번은 변할 시간이라고 생각하며 황당해했다.

"그 정도면 신입으로 들어가도 간부나 그 이상이 되었을 시간이구려."

"글쎄. 모르는 일이오. 양산박은 실력 위주의 조직이라, 일을 잘하면 잘할 수록 간부가 되기 쉽고, 근무 평가가 나쁘면 이른바 잡몹, 자코, 미니언, 돌격병으로 소모품처럼 쓰여지는 것이 현실이라오. 혈기는 넘치지만, 머리가 모자라 운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했으니 어떻게 되었을지는..."

"아들은 양산박에 있고, 당신은 아들을 본 지 꽤 된 것 같은데 연락이 닿지는 않소?"

"그렇소이다. 애초에 양산박은 폐쇄적인 조직이라 가입한 순간 가족과 연락이 끊기는 경우가­"

도미닉 경과 미스터 왕은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갑자기 도미닉 경의 감각이 경고를 울렸다.

도미닉 경은 그 자리에서 방패를 들어 올리고 감각이 경고를 울리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자 유리창을 깨고 들어온 총알이 도미닉 경의 방패에 부딪쳐 천장에 구멍을 내었다.

밖은 천둥 번개가 치고 하늘이 무너진 듯 비가 쏟아지고 있었기에 총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이게 무슨­"

도미닉 경은 고개를 돌려 미스터 왕을 바라보았다.

시간을 끌어 이렇게 뒤통수를 치려고 그랬냐고 따지려고 했으나, 미스터 왕의 표정을 본 도미닉 경은 이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미스터 왕도 당황스러운 건 매한가지였기 때문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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