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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차랜드의 행복한 도미닉 경-267화 (267/528)

〈 267화 〉 [266화]우리에게도 권리가 있다.

* * *

도미닉 경은 수많은 사건들을 마주해왔지만, 지금처럼 두려움을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페럴란트에서 마족들과 싸울 때도, 그 싸움에서 열세에 몰렸을 때에도 도미닉 경은 웃었다.

가차랜드에 도착한 이후 처음으로 버그를 마주했을 때에도, 전장에서 홀로 수십 대 일로 싸웠을 때에도, 청문회에서 수백의 시선을 마주했을 때에도 도미닉 경은 당당했다.

카드 팩 거래소에 카드를 등록한 뒤 몰려오는 사람들을 보았을 때에도, 양산박의 인간 파도를 마주했을 때에도 도미닉 경의 정신은 버텼다.

도미닉 경의 강인한 정신력은 그 모든 것을 견뎌낼 수 있을 만큼 단단했다.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도미닉 경의 정신은 명확하고 그의 태도는 당당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지만...

"1+1보단 10+1이 더 좋은 걸 아냐? 2보단 11이 더 크잖아!"

"저, 정가로 팔면 도대체 뭐가 남는 거지?"

"정정당당히 가챠해서 먹고살아야지, 어딜 비겁하게 피땀 흘려 일을 하려고!"

반대로 도미닉 경은 지금 눈앞에 보이는 광경이 지옥보다 더 끔찍할 거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적어도 지옥은 아직 도미닉 경의 굳건한 정신을 흔들지 못했지만 눈앞의 광경은 그 어려운 걸 해냈으니까.

도미닉 경은 이 무시무시한 광경에 넋이 나간 상태로 근처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아무래도 이 정신적인 충격은 쉽게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멍하게 있는 도미닉 경의 옆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그는 원통형의 화려한 모자를 쓰고 두르고 비단으로 된 겹옷을 입고 있었는데, 양손에 총 열여섯 개의 반지를 끼고 있었다.

멋들어지게 말려 멋을 더한 검은 수염을 쓰다듬던 그는 한숨을 내쉬며 도미닉 경의 옆에 앉았다.

"...?"

도미닉 경은 갑자기 나타난 검은 수염의 사내를 쳐다보았다.

검은 수염의 사내도 도미닉 경처럼 패닉에 빠졌는지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었는데, 문득 도미닉 경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도미닉 경과 시선을 마주쳤다.

"...아! 미안하외다. 선객이 있었구려."

검은 수염의 사내는 옛스런 말투를 썼는데, 어째서인지 고풍스럽다기보다는 힘이 넘치는 목소리였다.

"혹시 당신도 저 시위대와 관련이 있소이까?"

검은 수염의 사내는 대뜸 도미닉 경에게 그리 물었다.

도미닉 경은 고개를 저었다.

그저 사람이 모이길래 구경을 왔을 뿐, 도미닉 경은 시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외다."

검은 수염의 남자는 오른손으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의 오른손에 끼워진 여덟 개의 보석 반지가 마치 빗처럼 수염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도미닉 경과 검은 수염의 남자는 서로 벤치에 앉아 있는 상태로 말이 없었다.

도미닉 경은 눈앞의 광경에 충격을 먹어 할 말을 잃어버린 것이었고, 검은 수염의 남자도 비슷한 상황인 것 같았다.

굉장히 어색한 침묵의 시간.

이 침묵의 시간을 깬 것은 검은 수염의 남자였다.

"그,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하지 않겠소이까? 나는 칸쿠 무사라고 하외다."

"...페럴란트의 도미닉 경이오."

칸쿠 무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가 손을 내밀자, 도미닉 경도 자기 이름을 말하며 그 손을 마주 잡고 악수했다.

"페럴란트의 도미닉 경이라.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 아. 혹시 카드 팩 대란을 일으킨 바로 그 사람이외까?"

"대란이라고 부를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법 많이 팔린 건 맞소."

칸쿠 무사의 말에 도미닉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칸쿠 무사는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기뻐했다.

"이야, 내가 가차랜드의 유명인을 볼 줄이야!"

"유명인?"

"스펙도 준수하고, 돈도 많으며 인기도 많으니 유명인이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겠소이까! 혹시 싸인을 부탁해도 되겠소?"

칸쿠 무사는 도미닉 경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무심코 종이를 집어 든 도미닉 경은 문득 종이에 무언가 적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모델 계약서잖소."

"이런! 들켜 버리고 말았구려."

칸쿠 무사가 호탕하게 웃으며 새로운 종이를 건넸다.

도미닉 경은 계약서를 다시 칸쿠 무사에게 돌려주기 전에 몇 가지 단어를 보았는데, 말리 상사라고 적힌 부분이 눈에 확 들어왔다.

"혹시 말리 상사에서 일하오?"

"이런. 거기까지 알아보시다니. 역시 우린 운명이 아닐까 싶소이다."

칸쿠 무사는 너스레를 떨며 도미닉 경에게 좀 더 자세히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말리 상사의 주인, 칸쿠 무사요. 바로 저기 보이는 큰 건물들이 다 내 것 이외다."

칸쿠 무사는 손가락으로 시위대가 있는 쪽의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을 쭈욱 가리켰다.

도미닉 경은 칸쿠 무사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칸쿠 무사가 가리킨 곳은 거의 수십채는 될 법한 빌딩들이 제각기 키를 경쟁하듯 서 있었는데, 겉면이 황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블랙 그룹에 비하면 세발의 피지만, 그래도 나름 가차랜드에선 자수성가한 부자라고 자부하는 사람이외다."

칸쿠 무사는 가슴을 넓게 펴고 오른 주먹으로 왼 가슴을 퉁퉁 쳤다.

그만큼 그는 자기가 이룬 업적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왜 한숨을 내쉬고 있소?"

도미닉 경은 방금 전까지 계속해서 한숨을 내쉬던 칸쿠 무사를 기억해냈다.

"세상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데."

"그야, 당연히 저 시위대 때문이외다. 정확한 관련이 있다고만 해야겠소이다만..."

칸쿠 무사는 도미닉 경의 말에 한숨을 푹 내쉬며 시위대에게 손가락질 했다.

여전히 시위대는 이성을 잃고 날뛰고 있었다.

"혹시 영업 방해해서 그런 거요?"

도미닉 경이 나름의 결론을 도출해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건 극히 일부에 불과하외다."

칸쿠 무사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사실, 저 시위대에 아들이 있소."

"아들이?"

칸쿠 무사는 아련한 눈으로 시위대 쪽을 쳐다보았다.

"사실, 내 아들은 성실하고 인자한 성격이었소. 나를 닮아 상재에 능했고, 다른 이들에게 베풀 줄 아는 사람이었지."

"혹시 뉴비들에게 포션을 베푸는 이들에 대해서 아시외까? 그 원조격의 인물이 바로 우리 아들이라오. 그만큼 착하고 여린 성격이었지."

칸쿠 무사는 과거의 아들을 기억하며 어렴풋이 미소 지었다.

그러나 곧 그 미소는 한숨이 되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놈의 가챠가 문제였소. 언제부터인가 가챠에 손을 대기 시작하더 이다. 뭐라고 하더라. 개척자가 되고 싶다고 했던가? 처음엔 그래도 목적이라도 있었소. 그냥 날 닮아 모험심이 강한가 보다 싶었지. 그게 실수였소."

칸쿠 무사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아들은 개척자로서 첫발을 내디뎠소. 여기까진 문제가 없소이다. 허나 이 다음이 문제였지. 바로 개척자 지원 팩에서... 5성 짜리 카드를 뽑아버린 거외다. 그것도 엄청난 미녀를!"

"처음엔 운이 좋다며 기뻐했지만, 그 이후에 아들은 변하기 시작했소. 안드로이드에 설치된 5성 미소녀 카드를 위해 돈을 아끼지 않더니, 나중에는 세상의 모든 옷을 입혀보겠다며 스킨 가챠에 손을 대고 말았소이다. 그 비싼 스킨을! 내가 그 사실을 알았을 땐, 이미 270여 개의 스킨을 보유하고 있었소."

저런. 도미닉 경이 안타까움에 탄식을 내뱉었다.

정가로 사도 거의 2,000 가차석이 넘어가는 스킨을 그렇게나 많이 뽑다니.

심지어 가챠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고 했으니, 정가로 산 것도 아니리라.

그런 도미닉 경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칸쿠 무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예상했겠지만 그 녀석은 스킨 가챠에 손을 댔소. 처음엔 2,000가차석이 아까워서 10연차, 1,880가차석 짜리를 스킨 가챠를 질렀더랬지. 그런데 멀쩡한 옷이 하나도 안 뜨자, 본전이라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또 돌리고, 또 돌리고... 나중에 가서는 완전히 본전에서 멀어지니까, 어차피 많은 돈을 여기다 투자했으니 조금만 더 질러도 상관없겠지라고 생각했다고 하외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아차린 내가 따끔하게 한 소리 하려고 찾아갔을 때는 이미 수억이 넘는 가차석을 쓴 뒤였지. 그것도 어디선가 수상한 돈까지 빌려서는..."

칸쿠 무사가 씁쓸한 눈으로 시위대를 바라보았다.

"사실 오늘은 아들을 집으로 데려와 설득을 하던 중이었소. '내가 대신 갚아줄 테니, 내 아래서 다시 일하거라.'라고. 겉으로는 알겠다고 했지만, 업데이트에서 가챠가 줄어든다는 말에 저렇게 난동을 부리는 것을 보면 아마 나 몰래 가챠를 돌리려던 생각이었겠지."

칸쿠 무사가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본 다른 이들 중 아들의 사상에 동조하는 이들이 모이기 시작한 거요. 그렇게 하나둘 모이더니, 저렇게 대규모 시위로 번지기 시작했지."

칸쿠 무사는 손가락으로 시위대의 가장 앞, 검은 피부를 가진 이를 가리켰다.

"저기 앞에서 확성기를 들고 있는 이가 바로 내 아들이오."

도미닉 경은 칸쿠 무사를 바라보았다.

칸쿠 무사는 씁쓸한 표정으로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아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소이다. 때려서라도 말을 들으면 좋을 텐데..."

칸쿠 무사는 여전히 아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도미닉 경에게 읇조리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난 마음이 여려 아들을 때릴 수 없었소이다. 너무 오냐오냐해서 저리된 걸지도 모르지. 정말 매가 필요할지도 모르겠소."

칸쿠 무사가 도미닉 경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씁쓸한 표정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어떠한 의지가 담겨져 있었다.

"혹시, 내 아들을 복날 개 패듯 패줄 수 있겠소?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말이오."

도미닉 경은 말없이 칸쿠 무사를 바라보았다.

칸쿠 무사의 눈에 비친 의지는 여전히 곧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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