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6화 〉 [265화]우리에게도 권리가 있다.
* * *
성좌들의 업데이트 프리뷰 방송은 가챠튜브의 알고리즘을 타고 많은 사람이 시청했다.
아스트로무스도 자기 방송 인생에서도 일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시청 인원이라며 깜짝 놀랄 정도였다.
미묘하게 손가락이 많은 것 같지만, 원래 성좌란 그런 존재가 아니던가.
물론 시청 인원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이 날 했던 방송의 내용이었다.
블랙 그룹 본사의 최상층에 위치한 회장실.
'그러니까 이제 무작위 요소를 최대한 줄이고, 남은 무작위 요소들도 최대한 천장을 낮춰 물가의 안정을 꾀한다는 뜻인가요?'
'기타 패치 사항에 들어갈 만한 요소긴 한데, 그렇다고 이렇게 한 줄로 퉁치기엔 좀 크지 않아요?'
"하아..."
블랙 그룹의 회장, 모르가나 블랙은 노트북을 덮었다.
이미 세 번은 돌려 본 탓에 내용을 거의 외우다시피 한 상황이었기에 더 이상의 시청은 불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모르가나 블랙은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기에 한 번 본 업데이트 내역은 다 기억할 수 있었으나,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업데이트에서 나온 단 한 줄.
단 한 줄의 임팩트가 너무 커 다른 내용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쉰 모르가나 회장은 비싸 보이는 리넨 의자에 털썩 주저앉더니, 머리를 부여잡고 단 한마디를 내뱉었다.
"망했네."
모르가나 회장은 잠시 머리를 부여잡은 자세 그대로 미동도 없이 있다가, 이내 갑자기 벌떡 일어나 창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커튼을 제치고 창문 너머, 저 아래에서 시위하는 수백, 수천 명의 인원을 바라보았다.
저 모두가 이번 업데이트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었다.
...
이번 업데이트에서 추가되는 것은 크게 3가지였다.
6성 장비와 전용 장비의 추가.
6성으로의 각성.
그리고 랜덤 요소에 대한 것.
도미닉 경도 이번 업데이트에 대한 건 알고 있었다.
가챠튜브의 알고리즘으로 인해 프리뷰 영상을 본 것이다.
도미닉 경은 평소에도 강아지나 고양이 영상을 자주 보았기에 가챠튜브에 익숙해도 크게 위화감은 없었다.
"이번 업데이트는 무시해도 좋겠군."
도미닉 경은 프리뷰 영상을 모두 시청하고는 그리 생각했다.
아직 기껏 해야 4성 장비인 도미닉 경은 언젠가 6성 장비를 얻기는 하겠지만, 아직 때가 아니었다.
창고에 쌓여 있는 보상들을 다 털어도 여전히 5성 장비 하나를 제련하기도 벅찬 상황이었으니, 도미닉 경은 장비 문제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다음으로 6성으로 각성.
도미닉 경은 꿈속에서 비슷한 내용을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있었다.
아마 마족에게 한 방 먹이기 전에 들었던 것 같은데...
도미닉 경은 잠시 6성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 명제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아직 도미닉 경은 3성이었고, 6성은 아직 먼 이야기였으니까.
마지막으로 랜덤 요소에 대한 것.
정확하게는 무작위 요소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무작위 요소를 줄이고 그만큼의 효과를 조정한다는 안이었는데, 여기엔 도미닉 경의 장비인 방패의 효과가 적용되었다.
기본적으로 방패로 공격 시 확률적으로 기절을 시키는 효과였으나, 패치 이후에는 무조건 기절 효과로 바뀌는 대신 지속시간이 짧아진다는 내용이었다.
이건 모두 다음 업데이트에 적용될 내용이었고, 아직는 적용되지 않은 상태.
도미닉 경은 뜻밖에 버프를 받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듯, 도미닉 경에게 있어서 이번 업데이트 내용은 그다지 손해를 볼 것이 없었다.
"그나저나..."
도미닉 경은 오늘도 아르쿠스의 꿈속에서 말한 그 장소에서 기다리며 캔 커피를 홀짝였다.
아르쿠스에게 여기서 만나자고 했으니, 언젠가 여기로 올 것이라 믿으면서.
그렇게 느긋하게 지나가던 사람들을 관찰하며 캔 커피를 홀짝이던 도미닉 경은, 문득 몇몇 사람들이 화가 난 채로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머리에 빨간 띠를 매거나 피켓을 들고 있었는데, 너무 빠르게 달려가는 바람에 피켓의 내용은 보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둘 보이던 화난 사람들은 이내 여럿이 되었고, 도미닉 경이 캔 커피를 다 마시고 재활용 쓰레기통에 빈 캔을 집어넣고 나왔을 때에는 거리의 절반이 화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무슨 일이지?"
도미닉 경은 갑자기 이렇게 한 방향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분명히 무슨 일이 일어났으리라 확신한 채로 말이다..
사실, 도미닉 경은 과장을 많이 보태서 너무나 많은 사건들을 한꺼번에 겪은 나머지 평온한 일상에 몸이 근질근질하던 터였다.
도대체 무슨 일로 사람들이 몰려가는 지 알아도 볼 겸, 도미닉 경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
"우리의 권리를 존중하라! 존중하라!"
"존중하라! 존중하라!"
"랜덤 철폐 웬 말이냐! 웬 말이냐!"
"웬 말이냐! 웬 말이냐!"
도미닉 경은 화가 난 사람들을 따라간 끝에 수 많은 사람이 시위하는 현장에 도착했다.
그들은 머리에 붉은 띠를 매고 구호를 외치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선창하면 모두가 떼로 후창했다.
이 기가 막힌 광경에 도미닉 경이 지나가는 사람 한 명을 붙잡고 도대체 무슨 일인지 물었다.
"이보시오, 말 좀 묻겠소."
"뭐요."
"혹시 무엇 때문에 여기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지 알 수 있겠소?"
"뭐야. 당신은 시위하러 온 사람이 아니오?"
"아니오. 지나가다가 이 광경을 보고 호기심이 들어서 한 번 와봤소."
"그렇다면 모를 수도 있지."
시위대의 일원은 도미닉 경의 말에 납득하며 뜻밖에 친절하게 대답해주기 시작했다.
"이 인원들은 다 이번 무작위 요소에 대한 문제로 모인 사람들이오."
"무작위 문제 때문에?"
도미닉 경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무작위 문제가 무엇이 문제가 된다는 말인가?
"자세히 들어 보면 알 거요. 잠시 구호를 들어 보시오."
시위대의 일원은 그렇게 말하고 도미닉 경이 구호를 잘 들을 수 있도록 입을 꾹 다물었다.
"무작위성 사라지면 소상공인 다 죽는다!"
"다 죽는다! 다 죽는다!"
"상업지구 먹여 살리던 무작위성 돌려내라!"
"돌려내라! 돌려내라!"
"아하."
도미닉 경은 그들의 외침에 왜 이들이 모였는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가챠를 돌리는 방식으로 물건을 팔던 사람들인 모양이구려. 가차랜드의 상인들 말이오."
도미닉 경의 추리는 예리했다.
모든 정황은 도미닉 경의 추리처럼 흘러 갔고,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았다.
"아쉽지만 틀렸소."
하지만 모두 알다시피, 가차랜드는 정상이 아니었다.
"저들은 상인들에게서 물건을 사던 시민들이오."
"시민들이?"
도미닉 경은 고개를 돌려 다시 시위대를 바라보았다.
"모두 무작위 가챠를 억압하는 저 업데이트에 항의합시다! 소상공인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을 응원합니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다시 눈앞에 있는 시위대 인원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상인들이 연합해 권리를 주장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상인들 같소만."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정말 여기엔 상인들이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상인들은 다 저기에 있지요."
도미닉 경은 시위대 인원이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시위대를 보며 부끄러워하는 또 하나의 무리가 있었다.
"여러분! 저는 어제도 사과를 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싱싱한 사과를 뽑을 수 있었지요! 그 싱싱함! 뽑았을 때의 짜릿함! 저는 잃을 수 없습니다. 그 짜릿함을!"
"...그만해."
"우리에겐 권리가 있습니다. 가차랜드에서의 의무를 다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권리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네. 바로 가챠를 돌릴 권리 말입니다!"
"그만해."
"여러분! 모두 같이 외칩시다! 소상공인들을 위해 한 푼이라도 더 벌 수 있도록, 더 극악한 확률로 물건을 팔 수 있도록 청원을 올립시다!"
"그만해!"
도미닉 경은 그제야 정말로 시위하는 인원들이 시민들이고, 그런 시민들을 말리는 쪽이 상인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인들은 무작위가 아니더라도 돈을 벌 방법은 많았기에 귀찮기는 했어도 법에 큰 반발은 없었다.
그러나 가차랜드의 소비자들은 뭐가 달라도 단단히 달랐다.
"무, 무작위가 없으면 우린 어떻게 살지?"
"정가를 주고 사야 한다고? 왜? 정가를 주고 사는 게 기대값이 더 비싸잖아!"
"모든 확률은 결국 뽑느냐 마느냐의 반반으로 귀결되고, 반반은 곧 사사오입을 통해 100%나 다름이 없는데 왜 그냥 사라고 하지?"
그렇다.
가차랜드의 사람들은 이미 가챠에 푹 절여진 오이 피클같은 사람들이었다.
도미닉 경처럼 평소에도 정가를 주고 물건을 사는 사람들은 큰 문제가 없었으나 이는 가차랜드에서도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가차랜드 사람들은 모든 일을 가챠로 돌리는 데 익숙했고, 가챠로 돌리려고 노력했고, 가챠가 아니면 살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업데이트와 관련된 것은 시스템 인더스트리의 소관이었으나, 이미 무작위 억제법의 발인... 이 아니라 업데이트로 인해 화가 잔뜩 난 상태에다가 가챠에 머리가 푹 절여진 이들은 그냥 아무 데서나 시위를 하고 있었다.
도미닉 경은 그 사실을 깨닫고 얼굴의 핏기가 싹 가셨다.
그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가차랜드의 진정한 광기를 직면하고야 말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