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4화 〉 [263화]꿈 후일담
* * *
"헛...!"
"뭐요? 무슨 일이오?"
아르쿠스는 여관 방의 책상에 엎드려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그의 아래에는 침과 잉크로 엉망이 된 양피지가 있었는데, 이는 그가 가차랜드에 대해 기록 하기 위해 산 것들이었다.
"아니, 아닐세. 그냥 꿈자리가 좀 신기해서..."
"신기하다니, 보통 뒤숭숭하다거나 좋다거나지 그런 단어를 쓰진 않잖소. 그나저나 피곤하면 침대에서 자지, 왜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소?"
오그레손은 잠에서 깬 아르쿠스를 위해 머그컵에 차를 한 잔 탔다.
이 티백이라는 것은 맛은 좀 덜하지만 굉장히 편리한 물건이었다.
"그게... 꿈속에서 도미닉 경을 보았네."
"도미닉 경을? 축하하오. 어떤 꿈이었소?"
오그레손은 아르쿠스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
마침내 커피포트의 물이 끓고 머그컵에 가득 뜨거운 물이 채워지자, 오그레손은 아르쿠스의 앞에 차 한 잔을 내려다 놓고 그 옆에 앉았다.
페럴란트에서는 성인이 나오는 꿈은 길몽이라며 축하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꿈의 내용이 궁금한 것은 순전히 오그레손의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게, 성인께서 마족을 산산조각내며 하늘에서 내려오셨 아얏!"
아르쿠스는 꿈 이야기를 하려다가 문득 손가락에서 고통을 느꼈다.
"너무 뜨겁지 않은가. 조금 식혀서 주지 그랬나."
"주의하지 않은 잘못 아니오. 그나저나... 이건 뜨거워서 데인 게 아닌 것 같은데...?"
오그레손은 아르쿠스의 타박에 슬쩍 상처를 보았다.
상처 부위 주변은 검게 물들어 있었는데, 마치 독에 중독된 듯한 모습이었다.
아르쿠스는 깜짝 놀라 신성력을 통해 정화를 시켰는데, 신성력에 강렬하게 반발하며 소멸하는 검은 연기를 바라보며 아르쿠스는 문득 꿈속의 내용을 떠올렸다.
마족을 처치한 도미닉 경. 흘러내린 마족의 피. 그 피를 만진 아르쿠스...
그 모든 것을 종합한 아르쿠스는 한 가지 사실에 도달할 수 있었다.
"당장, 당장 꿈에서 본 글귀를 적어야 해!"
아르쿠스는 바로 깃펜을 들어 꿈에서 본 것들을 적어 내리기 시작했다.
물론, 몇 시간도 되지 않아 대부분의 꿈을 까먹고 말았지만.
...
"으, 잘 잤다. 웬일로 개운하다니. 인간형으로 잤는데 말이야."
왈록은 숙직실에서 일어나 배를 벅벅 긁으며 옷을 갈아입었다.
커피포트에 물을 올려 끌인 뒤 어제 남겨뒀던 도넛과 헤이즐넛 커피를 마신 왈록.
어제가 당직이었기에 이제 내일은 하루 쉬는 날이었다.
"이제 몇 시간 안 남았다. 오랜만에 제대로 쉴 수 있겠네."
왈록은 시계를 보며 간만에 집에 돌아가 원래의 모습으로 방바닥을 뒹구는 상상했다.
이미 제법 많은 돈을 번 왈록은 제법 큰 집에서 생활하고 있었기에 본 모습으로 돌아다녀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나저나 어제는 참 이상했지."
왈록은 어젯밤, 숙직실에서 졸면서 꿨던 꿈을 떠올렸다.
분명히 퇴근해서 맛있는 것을 먹고 잠을 자는 꿈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거기서 꿈이 끊기더니, 마치 악몽을 꾼 것처럼 식은땀에 절은 채로 잠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무서울 거 하나도 없는데 왜 갑자기 그랬을까?"
왈록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별로 중요한 건 아니라며 이내 머릿속에서 그 일을 잊었다.
대신 왈록의 머릿속에는 집에 가서 놀고먹을 생각이 가득 차올랐다.
물론 10분 뒤, 버그 발생으로 퇴근 시간이 조금 늦어지는 건 다른 문제였다.
...
"어제는 이상하게 잘 잤어."
"?"
레미가 청소기를 돌리고 있는 팬텀 박사에게 말했다.
"평소엔 딸기 우유가 없으면 잠을 잘 수가 없었단 말이지. 그 끔찍한 악몽 때문에."
"아, 맞아. 나도 그랬어."
"그런데 어제는 꿈을 안 꿨어. 매일 꾸던 그 꿈을."
레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언제나 악몽을 꾸고는 한다.
그녀의 악몽은 언제나 똑같은 내용이었다.
골판지로 가득한 세상에서 골판지 광대가 나와 그때의 모습을 인형극으로 보여주는 것.
처음에는 더 적나라하고 잔혹한 꿈이었으나, 꿈에 대한 그녀의 심정이 무뎌질 때마다 꿈의 수위도 낮아져만 갔다.
산산조각이 난 신체가 붉은색종이로 보이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도 그 표현은 레미에게 있어서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기엔 충분했다.
"알다시피, 딸기 우유를 마시면 좀 덜해서 매일 딸기 우유를 마시는데, 어제는 갑자기 딸기 우유가 품절이었잖아."
"초코 우유도 말이지."
"그래서 잠을 자기가 두려웠는데, 이상하게 잠이 잘 오더라. 꿈도 꾸지 않았... 아니다."
레미는 꿈을 꾸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려다 말을 바꿨다.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꿈속에서 골판지로 된 기사가 나 대신 의자에 앉아주더라고."
"그리고?"
"그게 전부야. 거기까지가 꿈의 끝이었..."
레미가 말을 하다 말고 잠시 멈췄다.
"것 봐. 생각하면 또 나온다니까."
팬텀 박사가 레미의 앞에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내주었다.
팬텀 박사는 저번에 좋아하던 양말을 잃어버렸다는 말에 침대 밑에서 찾아낸 사건을 들먹이며 레미는 항상 뭔가를 까먹는다고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미는 잠시 고민하더니 팬텀 박사에게 말했다.
"그 기사를 봤을 때, 오늘은 운이 좋다고 하더라고. 그 광대가."
"꿈인데 말이 들렸어?"
"꿈이니까 자막처럼 보였지."
레미는 조용히 팬텀박사가 준 따뜻한 우유를 홀짝였다.
"개꿈이네."
"개꿈이지."
레미와 팬텀 박사는 서로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이과적인 마인드로 가득한 두 박사에게 있어서, 꿈과 같은 오컬트적인 이야기는 잡담거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
마왕성의 내부, 마왕의 옥좌가 있는 알현실.
오늘 용사 뽀 르 작은 행정관이 돈가스를 사준다고 해서 나간 상태였기에 이 알현실에는 마왕 뚜 르 방 만이 있었다.
마왕 뚜 르 방은 초조하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뽀작뽀작 바닥을 뱅글뱅글 돌면서 걷고 있었다.
마왕의 인내심이 바닥이 날 때쯤...
"마왕님! 기뻐하십시오!"
문이 벌컥 열리면서 참모장이 들어왔다.
"!"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을 다 듣고 기뻐하시라는 뜻이었습니다."
"!"
"어, 어어? 마왕님? 이건 조금 있다가"
마왕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참모장 위에 올라타 참모장의 손에 들려진 검은 봉투를 강탈했다.
3등신의 마왕은 육체적으로 참모장보다 약했으나, 검은 봉투에 대한 집착으로 일시적인 능력치 향상이 일어났다.
"마왕님! 그건 조금 있다가 점심 드신 다음에"
참모장이 절규하며 마왕의 손에 들린 검은 봉투를 뺏어가려고 했으나, 마왕 뚜 르 방은 매우 탐욕스럽고 사악하며, 그녀보다 약한 사람의 말은 듣지 않는 이였다.
마왕은 탐욕스럽게 그 말랑말랑한 손으로 안에 들어 있는 바움쿠헨을 꺼내 들었다.
그 바움쿠헨은 참모장이 특별히 최고의 제과제빵사에게 부탁해 만든 수제였는데, 그 크기가 마왕만큼이나 컸다.
"!"
마왕은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바움쿠헨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그 맛에 빠져들어 무아지경으로 바움쿠헨을 마구마구 오물거렸다.
물론, 한 일곱 입 까지만.
일곱 번 바움쿠헨을 씹어먹은 마왕 뚜 르 방은 이내 바움쿠헨이 너무 큰 나머지 배가 부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기에다가 한 가지 음식만 잔뜩 먹으면서 조금은 질려 버리고 말았다.
마왕은 남은 바움쿠헨을 조심스럽게 다시 포장지에 담에 봉투에 집어넣었다.
나중에 또 먹으려고 한 것이다.
"마왕님...!"
흠칫. 하고 마왕이 놀랐다.
그러나 마왕은 참으로 처세술이 뛰어난 이였기에 바로 봉투를 참모장에게 돌려주었다.
참모장은 제멋대로 행동한 마왕에게 화가 난 모습이었으나,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마왕에게 치명적인 말을 내뱉었다.
그것도 아주 치명적인 말을.
"오늘 점심은 함박 스테이크입니다만, 이렇게나 많이 드셨으니 배가 불러 못 드시겠지요."
"!"
마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쩔 수 없이 점심때 먹으려던 함박 스테이크는 취소해야겠습니다."
마왕이 더욱 격렬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게 제 말을 끝까지 들으셨어야 이런 일이 없지 않습니까."
마왕이 매우 격렬히 고개를 젓다가 참모장의 말에 시무룩해졌다.
오늘도 평화로운 마왕성이었다.
...
도미닉 경은 아침 일찍부터 시내에 나와 있었다.
도미닉 경은 꿈속에서 아르쿠스에게 주소와 한 장소를 전했던 사실을 기억했고, 그 장소에서 기다려보기로 한 것이다.
도미닉 경은 하염없이 그 자리에 서서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라? 도미닉 경?"
도미닉 경은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히메가 있었다.
"아, 히메 공. 그 상처는...?"
히메는 어째서인지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는데, 대개 검에 베인 상처같았다.
히메의 손에는 가챠약국이라는 상표의 흰 봉투가 들려져 있었는데, 아무래도 연고와 반창고를 산 모양이었다.
"어제 아버지와 대련해서 말이에요. 훈련은 실전같이, 실전은 훈련같이 하시는 분이시다 보니..."
히메는 살짝 말끝을 흐렸다.
아무래도 아버지에 대한 언동이니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도미닉 경과 히메 사이에 어색한 적막이 흘렀다.
도미닉 경은 히메와 대화할 거리를 생각하다가 문득 어제 꾼 꿈에 대해서 주제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이상한 꿈을 꾸었소."
"꿈이요?"
"그렇소. 참 다양한 꿈을 꾸었는데... 몇 가지 외에는 기억이 나질 않는구려."
"혹시 저도 나왔나요?"
히메는 장난처럼 도미닉 경에게 말했다.
설마 도미닉 경의 꿈속에 히메가 나왔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미닉 경의 대답은 히메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물론이오."
"네?"
"어제 꿈속에서 내가 침대에서 깨어났는데, 문이 열리면서 히메 공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겠소? 그러면서 아침을 먹으라고 하는데"
도미닉 경은 별일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그러나 히메는 그 말에 도저히 집중할 수 없었는데, 소름 돋게도 히메도 같은 꿈을 꿨던 것이다.
히메의 귀에서 도미닉 경의 말소리가 점점 멀어져간다.
히메 자기 심상 세계로 들어가는 신호였다.
점점 스스로에게 몰입하며, 도미닉 경과 히메 자신이 똑같은 꿈을 꾸었다는 사실을 되뇌이던 히메는, 그 순간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도미닉 경과 나는, 천생연분이 아닐까? 그래서 같은 꿈을 꾼 것이 아닐까?
물론, 이는 히메의 망상이었지만 히메의 사랑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여름은 아니지만, 여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