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3화 〉 [262화]깨어나기 위한 여정
* * *
도미닉 경은 어둠 속에서 계속해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여기가 꿈속이니, 아무래도 키가 좀 더 클 모양이로군.
이제 꿈속이라는 상황에 익숙해진 도미닉 경이 실없는 농담을 생각했다.
이름 모를 마족의 잔해와 함께 아래로 떨어지던 도미닉 경은 어느 순간부터 주변의 색이 검은색이 아니라 마치 오래된 양피지와 비슷한 색깔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미닉 경은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 공중에서 몸을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는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저 아래, 마치 양피지에 깃펜으로 그린 듯한 땅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땅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고, 도미닉 경은 꿈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찔한 감각에 무의식적으로 같이 떨어지던 마족의 시체에 검을 박아 넣었다.
마족의 시체에 검이 박히자 시체에서는 엄청난 양의 검은 피가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는데, 도미닉 경은 시야를 가릴 정도로 뿜어져 나오는 피를 애써 닦아내며 땅에 떨어질 충격에 대비했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정확하게는 잉크로 그린 듯한, 성화에서나 볼 법한 이펙트로 말이다.
도미닉 경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마족에게 검을 박아넣은 자세를 취하고 고개를 들어 올렸는데, 바람의 저항으로 인해 왼손에 든 방패가 등 뒤로 젖혀진 형국이었다.
엄청나게 뿜어져 나오던 검은 피는 공중에서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졌다.
그 모습이 마치 날개를 펼친 것처럼 보였는데,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도미닉 경과 거의 동시에 떨어지는 것 같았다.
도미닉 경은 해를 등지고 떨어졌는데, 마침 갑자기 시간이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
도미닉 경은 이 비현실적인 상황을 통해 아직 꿈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도미닉 경의 표정은 아직도 꿈이라는 짜증과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한 행복한 웃음이 공존하는 상태였는데, 그 모습이 마치 전장에서 광소하는 전사의 모습이었다.
그런 도미닉 경의 모습은 마치 전설에 나오는 영웅들처럼 보였다.
적어도 아르쿠스의 눈에는 말이다.
"하얀 까마귀 맙소사..."
아르쿠스는 조금 전 하늘에서 떨어진 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마족을 산산조각내며 하늘에서 떨어졌는데, 머리 뒤에는 후광이 비치고 있었고, 등 뒤에는 검은 날개가 펼쳐져 있었다.
그야말로 영웅적인 면모로 가득한 이였는데, 아르쿠스는 문득 그가 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아르쿠스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는데, 아무래도 눈앞에 있는 분이 바로 아르쿠스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도미닉 경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머리에 달린 삼색 깃털과 한쪽 눈을 가린 안대, 그리고 강인한 전사의 얼굴.
마족을 산산조각낸 무기는 검은 무언가가 잔뜩 발려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으나, 대략적인 형상으로는 검과 방패로 보였다.
모든 정황이 눈앞에 나타난 이가 페럴란트의 성인, 도미닉 경이라고 알려주는 상황.
"호, 혹시 도미닉 경이십니까?"
아르쿠스는 성인의 등장에 놀라 말까지 더듬으며 도미닉 경에게 정말 도미닉 경이냐고 물었다.
이미 질문을 입 밖으로 낸 아르쿠스는 문득 성인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 자체가 불경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패닉에 빠졌으나, 도미닉 경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렇소. 어떻게 내 이름을...?"
도미닉 경은 얼굴에 묻은 끈적한 마족의 피를 닦아내며 말을 걸어온 이를 바라보았다.
아직 완전히 피가 제거되지 않아 확신할 수 없었으나, 그는 하얀 까마귀를 섬기는 사제처럼 보였다.
그 말인 즉, 도미닉 경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페럴란트에서 온 손님들 중 하나라는 소리였다.
"오오, 하얀 까마귀시여..."
아르쿠스는 기대하고 기대하던, 그러나 언젠가부터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던 도미닉 경과 만남을 이뤘다는 사실에 그 자리에 주저앉아 신께 감사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아르쿠스는 실망하고 말았는데, 그렇게나 세게 무릎을 땅에 부딪쳤음에도 고통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여기가 꿈속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얼마나 도미닉 경이 보고 싶었으면, 이렇게 꿈에서까지 도미닉 경이 나왔겠는가..."
아르쿠스는 꿈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더욱 낙담했다.
꿈속의 도미닉 경은 아주 멋있었으나, 현실에서 만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인가.
아르쿠스가 좌절한 사이, 도미닉 경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페럴란트에서 온 손님들을 찾으려는 시도가 번번이 무산되어 이제는 거의 포기하고 있던 도미닉 경이었으나, 문득 꿈속에서 만난 아르쿠스를 보며 한 가지 계획을 세웠다.
잠시 머릿속에서 계획을 정리한 도미닉 경은 여전히 좌절하는 아르쿠스에게 말을 걸었다.
"보아하니 날 찾는 모양인데, 맞소?"
"그렇습니다. 그래도 꿈속에서라도 봤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서글프다고 해야 할지..."
아르쿠스는 도미닉 경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크게 상심한 나머지 지금 무언가 이상하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곳으로 오시오."
도미닉 경이 마족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바닥에 무언가를 적었다.
"...? 이건 대체?"
아르쿠스는 명확하게 떠오른 글자들을 바라보다가 다시금 도미닉 경을 올려다보았다.
아르쿠스도 꽤 키가 큰 편이었으나, 도미닉 경이 더 큰 탓이었다.
"내가 사는 곳 주소요. 이제 내게 이름을 알려주시오. 초대를 위해선 이름을 알아야 해서."
"...아르쿠스. 내 이름은 아르쿠스요, 도미닉 경."
아르쿠스는 어차피 꿈인데 무슨 소용일까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말하고 외워둔다고 해서 손해 볼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도미닉 경은 아르쿠스가 자기 본명을 밝히자, 몇 번 그 이름을 되뇌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라도 주소를 잊어 버렸다면, 여기로 가시오. 내가 자주 가는 곳이니 운이 좋다면 바로 마주칠 수 있을 거요."
도미닉 경은 집에서 시내로 나오는 포탈의 출구가 있는 곳 주변에 있는 편의점의 이름을 불렀다.
"...고맙소. 도미닉 경."
아르쿠스는 도미닉 경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별말씀을"
도미닉 경이 아르쿠스에게 답하려고 했으나, 도미닉 경은 갑자기 아르쿠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또다시 다른 곳으로 가 버린 것이다.
"...얼마나 내가 도미닉 경을 보고 싶었으면."
아르쿠스는 꿈속에서 혀를 쯧쯧차며 자기 비판을 시작했다.
"그나저나... 이건 꿈 치곤 너무 현실감이 넘치는데..."
아르쿠스는 손가락을 내밀어 산산조각이 난 마족을 쿡쿡 찔렀다.
"아!"
두어 번 마족을 손가락으로 건드린 아르쿠스는 갑자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아르쿠스는 조금 전 고통이 찾아온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손가락은 마족의 피가 가진 독성으로 인해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참 현실성이 넘치는군 그래. 라고 아르쿠스가 생각했을 때
아르쿠스는 잠에서 깨어났다.
...
도미닉 경은 다시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아니, 어쩌면 돌아왔다는 것이 정확할지도 몰랐다.
도미닉 경은 꿈속의 전장 한가운데 서 있었다.
바로 마지막 전투가 한창인 그때의 중심에.
"..."
"흐."
도미닉 경은 광인처럼 웃으며 싸우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 광인은 경로에 있는 모든 마족들을 처치하며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의 발걸음에는 방향성이 없었고, 그의 시선에는 목적이 없었다.
그저 마족이 보이면 그쪽으로 걸었고, 칼을 휘둘렀다.
그게 전부인 사람.
도미닉 경은 저 사람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참 어리석다고 느꼈다.
...그래. 나지.
도미닉 경은 은근슬쩍 검을 들고 꿈속의 마족들을 향해 휘둘러보았다.
그러나 꿈은 꿈이라는 듯 칼은 꿈속의 마족들을 무시하고 지나쳤다.
그 사실을 알아낸 도미닉 경은 언덕 위에 앉아 전장을 내려다보았다.
과거의 도미닉 경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며.
과거의 도미닉 경은 활짝 웃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웃음은 아니었지만, 환한 웃음이었다.
도미닉 경은 그 웃음 속에서 단 한 푼의 가식도 느껴지지 않았다.
도미닉 경은 그 모습을 보며
...
도미닉 경은 잠에서 깨어났다.
밖을 보니 어둑어둑한 것이 저녁인 모양이었다.
점심 쯤 자서 저녁 때 일어나다니.
심지어 조금 더 있으면 다시 잠들어야 할 시간 아닌가.
도미닉 경은 그렇게 생각하며 방을 나섰다.
"어라? 일어났네?"
도미닉 경이 거실로 나오자, 도미니카 경이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 잘 잤어?"
도미니카 경은 도미닉 경이 꽤 깊은 잠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본인이 느끼기에 괜찮은지 확인하고자 했다.
"글쎄. 잘 모르겠소."
도미닉 경은 고개를 갸웃했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정확한 몸 상태를 아직은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나저나 좋은 꿈이라도 꿨어?"
"꿈?"
도미니카 경은 도미닉 경을 향해 손가락을 뻗으며 빵 한 조각을 입에 물었다.
"입이 웃고 있잖아."
도미닉 경은 그 말에 손을 올려 자기 얼굴을 만져 보았다.
확실히 도미닉 경은 웃고 있었다.
"무슨 꿈을 꿨는지 말해 줄 수 있어?"
도미니카 경이 흥미가 있다는 듯 도미닉 경에게 말했다.
"좋은 꿈이라면 내가 사줄 수도 있고."
"글쎄."
도미니카 경의 말에 도미닉 경이 말을 흐렸다.
"좋은 꿈이긴 한데, 기억은 잘 나지 않소."
도미닉 경은 흐릿한 꿈속에서 몇몇 장면만 더듬더듬 기억해냈다.
"하지만 그게 꿈 아니겠소?"
"뭐, 그렇지. 꿈은 덧없다고들 하니까."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은 이후 저녁 식사에 집중했다.
고기와 내장을 으깨어 삶은 검은 덩어리와 콩, 골판지로 된 상자에 담겨져 있던 감자와 브로콜리.
후식으로는 바움쿠헨과 멜론맛 사탕이었다.
어쩌면, 그 꿈은 꿈이 아니었을지도.
도미닉 경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안에 멜론맛 사탕을 털어 넣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