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6화 〉 [255화]평화로운 일상
* * *
"가는 길에 꼭 처방전대로 사시구요, 총 27,000크레딧 나왔습니다. 영수증 드려요?"
도미닉 경은 무언가에 홀린 듯 간호사가 한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영수증을 받아 무심코 반으로 접어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뒤 병원을 나온 도미닉 경은 처방전에 나온 대로 1리터짜리 저지방 우유 하나와 곰돌이 모양 젤리, 수면 양말 한 켤레를 샀다.
처방전을 내밀길래 약이라도 타야하나 싶었던 도미닉 경에게 있어선 의외의 물건들이었지만, 의사의 말을 들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일단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
도미닉 경은 여기서 조금 고민하기 시작했다.
처방전엔 될 수 있으면 오늘 하루는 푹 쉬고 가능하면 10시 쯤 잠이 들어 9시간 정도 수면을 취하라고 적혀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 처방전이 무엇이 문제냐고 할 수 있겠지만, 도미닉 경은 지금껏 이만큼 오랫동안 쉬어본 적이 없었다.
농노일 때엔 온종일 논과 밭에서 일해야 했고, 징집병일 당시엔 하루 내내 훈련과 실전의 연속이었다.
물론 밤에는 기름과 초가 아깝다는 이유로 일찍 잘 수는 있었으나, 이후 기사가 되면서 초와 기름을 쓸 정도의 주급이 나오면서 밤새 수련하는 것은 일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평생을 억눌린 채 살아왔건만, 도미닉 경은 스스로 그렇다는 자각이 없었다.
"...산책이나 조금 해볼까."
도미닉 경은 비닐 봉투에 담긴 물품들을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햇볕이 따뜻해서, 바람이 선선해서... 이유는 많았으나, 도미닉 경은 그냥 걷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냥 걷기엔 공원이 제격이었고.
도미닉 경은 상업 지구 입구에서 그다지 머지 않은 곳에 있는 공원에 들어섰다.
그리고 바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는 호수와 나뭇잎와 나뭇가지가 서로 부딪치며 내는 파도 같은 소리와 따뜻한 햇볕에 데워진 따뜻한 흙길을 천천히 음미했다.
"...잠시 여기서 있다가 갈까."
도미닉 경은 호수 주변을 한 바퀴 도는 흙길옆에 설치된 벤치에 앉았다.
호수가 잘 보이는 벤치였는데, 해를 등지도록 설치되어 있어 눈이 부시거나 할 일은 없었다.
대신 도미닉 경은 호수에 이는 잔잔한 파문에 흩어지듯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햇볕을 가득 눈에 담았다.
이게 바로 힐링인가?
도미닉 경은 그렇게 생각하며 멍하게 반짝거리는 호수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
도미닉 경은 문득 졸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날씨가 너무 좋은데다가, 자연이 가져다주는 편안함에 고질적으로 뭉쳐 있던 도미닉 경의 경계심이 눈 녹듯이 풀린 것이다.
여기서 자고 싶지만, 그럴 순 없지.
일단 집으로 가자.
도미닉 경은 잠시 안대를 들어 올려 눈을 비볐다.
비벼야 할 눈을 잘못 찾은 것 같지만, 졸린 도미닉 경에게 있어서 그런 건 상관없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벤치에서 일어난 도미닉 경.
"...!"
그때, 도미닉 경의 등 뒤로 서늘한 감각이 벌레처럼 기어올랐다.
도미닉 경은 언제 나른했냐는 듯 바로 눈빛이 매서워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그의 손에는 검과 방패가 쥐어진 상태였다.
"뭐, 뭐야. 도미닉 경이잖아."
"..."
도미닉 경은 목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도미닉 경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는 둘을 보았다.
"...악독한 박춘배와 비열한 말레이로군."
도미닉 경이 방패를 더욱 끌어올리며 검을 내밀었다.
언제나 검은 최상의 상태로 손질되어 있었기에 날이 서슬 퍼렇게 서 있었으나, 도미닉 경의 눈매는 그보다도 더 날카로웠다.
"무슨 일로 접근한 거지? 기습인가?"
도미닉 경은 여차하면 방패를 휘두를 생각으로 허리를 살짝 비틀었다.
박춘배와 말레이는 서로를 바라보더니,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이마를 탁 쳤다.
"그러고 보니 우리 도미닉 경에게 그거 말 안 했지 않나?"
"난 네가 한 줄 알았는데!"
박춘배와 말레이의 태도에 도미닉 경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뭘 말 안 했다는 거지?"
이제 도미닉 경의 말투마저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아마 방금 전, 자기 직전까지 노곤노곤하던 평화가 깨진 것도 한몫했으리라.
"별 건 아냐."
"우리 주 5일제로 하기로 했지."
"주 4일 아니었냐?"
"그래도 지금 빡세게 일해야지. 주 5일."
"주 5일?"
박춘배와 말레이의 말에 도미닉 경이 반문했다.
"뭐, 사실 마음 같아선 일주일 내내 적대하고 싶지만, 1성의 체력이라고 해봤자 뻔하잖아. 게다가 우린 딜러고."
"그래. 게다가 난 이제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이 있다고. 맞선을 봤다가 결혼까지 해 버리는 바람에..."
벌써 자식도 생겼어. 예정일은 6달 뒤래. 라고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는 말레이.
"아무튼, 그러니까 우리의 '라이벌' 관계는 주말 제외하고 5일 동안만. 오케이?"
박춘배가 그렇게 말하며 양손을 위로 올렸다.
마치 항복이라도 한다는 느낌의 제스쳐였다.
도미닉 경은 박춘배와 말레이의 말에도 경계를 풀지 않았다.
저렇게 안심시키고 나서 뒤통수를 치려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곧 자신이 너무 과하게 예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전 같았으면 그저 이 상황 자체가 재미있었을 텐데, 즐기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도미닉 경은 슬쩍 박춘배와 말레이를 보았다.
그들은 공원의 잡상인에게서 산 아이스크림과 솜사탕을 들고 있었고, 무기는커녕 방어구조차 제대로 입지 않은 상태였다.
완벽하게 비무장 상태인 것을 확인한 도미닉 경은 그때가 되어서야 그들이 한 말이 진심임을 알았다.
"여보? 뭐 해요?"
"아, 벨루카! 힘들 텐데 뭐하러 이렇게 빨리 걸어요? 갑시다. 아이스크림 사 왔어."
저 멀리 한 여성이 박춘배와 말레이를 향해 소리쳤다.
그녀는 편한 드레스를 입고 다리를 절듯 걸어오고 있었는데, 말레이는 그 모습을 보고 여성에게 날아가듯 뛰어갔다.
아무래도 저 여성이 말레이와 결혼한 사람인 모양이었다.
"...불렀으면 축의금이라도 냈을 텐데 말이오."
도미닉 경은 다소 경계심을 풀고 검과 방패를 수납했다.
그리고 이 상황이 멋쩍은 듯 아직 남아 있는 박춘배에게 농담을 건넸다.
"뭐, 속도 위반에 따로 식을 올리지는 않았으니까. 알다시피 우리 1성들은 좀... 벌이가 시원찮거든."
박춘배가 씁쓸하다는 듯 솜사탕을 뜯어 게걸스럽게 입에 쑤셔 넣었다.
"뭐, 내가 결혼하면 청첩장 정도는 보내주지. 그 유명한 도미닉 경이 온다고 하면 다들 놀랄걸? 내 인맥이 이 정도라고? 하면서 말이야."
박춘배는 그렇게 말하며 폭소를 터뜨렸다.
한참을 웃던 박춘배는 조금씩 웃음을 멈췄다.
진정된 것이 아니라, 웃다가 살짝 지쳐 버린 바람에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난 것이다.
그렇게 어떻게든 웃음을 진정시키는 데 성공한 박춘배는 이내 도미닉 경에게 말을 건넸다.
"그나저나 피곤해 보이는군. 꽤 날이 서 있는데 말이야."
"수면 부족이라고 하더군."
"수면 부족...? 아, 하긴."
박춘배는 도미닉 경이 수면 부족이라는 말에 잠깐 놀랐으나, 이내 도미닉 경과 연관된 사건들을 생각하며 그럴 만 하다고 생각했다.
박춘배가 아는 사건만 해도 수십 건이었고, 큰 건만 골라내도 3~4개 정도는 되었으니까.
"건강 관리 잘하라고. 우린 이제 적이 아니라 라이벌이니까. 라이벌끼리는 언제나 최고의 상태로 싸워야만 하지."
"...명심하지."
도미닉 경은 어째서인지 정론을 말하는 박춘배를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보고는 피식 웃었다.
사실 박춘배와 말레이는 도미닉 경과 라이벌이라고 하기에는 그 격이 너무 차이가 나는 상황이었다.
라이벌 효과로 인해 도미닉 경에게 추가 피해를 입히는 것이 아니었다면, 박춘배와 말레이는 그저 그런 1성 시민이었겠지.
"아무튼, 모레 아침 11시부터 우린 다시 라이벌 관계로 돌아갈 거니까 그리 알아."
그렇게 말한 박춘배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문득 할 말이 더 생각났다는 듯 어깨너머로 도미닉 경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더 이상 대화하기엔 피곤할 테니, 푹 쉬어두라고."
그렇게 말한 박춘배는 천천히 말레이 부부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크, 무지 멋있었다. 라며 스스로에게 뿌듯해 하면서 말이다.
도미닉 경은 그런 박춘배의 뒷모습을 보더니, 그 역시 그 자리를 벗어났다.
박춘배의 말대로, 좀 쉬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적대적인 관계의 사람에게 걱정받을 정도면 정말 상태가 심각하다는 뜻이었으니까.
...
"어서 와. 일은 다 처리했나?"
"와! 스승님! 이거 봐요! 와! 감탄사를 참을 수 없어요!"
도미닉 경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앨리스와 놀고 있는 도미니카 경을 보았다.
도미닉 경이 시계를 보자 앨리스의 훈련 시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할 건 다 했소. 이제 좀 쉬려고 하오."
"그래. 쉬어... 쉰, 다고?"
도미니카 경은 도미닉 경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앨리스가 보여주는 푸른 눈의 백골룡을 바라보았다.
꽤 정교한 장난감이네. 라고 생각하던 도미니카 경은 문득 도미닉 경이 '쉰다'라는 말을 꺼냈다는 걸 깨달았다.
"뭐, 라고?"
"쉰다고 그랬소. 병원에 들렀더니 수면 부족이라더군."
도미니카 경은 도미닉 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확실히 피부가 거칠고 눈이 퀭한 것이 휴식이 필요해 보이기도 했다.
"정말 사건을 몰고 다니는 모양이네."
도미니카 경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도미닉 경을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니 최근에 얼마나 많은 사건들이 있었던가.
하나하나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사건들이었다.
그리고 도미닉 경은, 놀랍게도 그 사건들의 대부분에 관련이 있었다.
직접든, 간접적으로든.
"그래. 푹 쉬어."
"그래야겠소."
도미닉 경은 어제 산 새 티셔츠를 하나 꺼냈다.
'엘렐렐레' 라는 문구와 함께 혀를 내민 해츨링의 모습이 그려진 티셔츠였다.
"아, 그렇지."
도미닉 경은 티셔츠를 들고 욕실로 향하던 와중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도미니카 경을 불렀다.
"이것 좀 데워 주시겠소? 심신을 안정시킨다더군."
"그래. 씻고 나오면 바로 마실 수 있도록 준비해줄게."
도미닉 경은 도미니카 경에게 방금 산 물건들 중 하나를 건네주었다.
1L짜리 저지방 우유를 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