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화 〉 [249화]탈출
* * *
도미닉 경은 자기를 내려다보는 검은 슬라임을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웬만한 아파트만큼이나 거대해진 검은 슬라임은 크기만 봐서는 거의 최종 보스급이었으나, 도미닉 경은 어째서인지 이 슬라임에게 방패를 겨누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슬라임에게서는 그 어떤 공격성도 보이지 않았기에 도미닉 경도 굳이 싸울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이었다.
"...!"
슬라임은 꾸물거리며 도미닉 경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세상에, 저게 뭐지?"
아아아는 새롭게 나타난 변수에 기겁했다.
아무리 봐도 저 슬라임은 적어도 필드 보스급, 아마 높은 확률로 레이드 보스나 혹은 그저 시나리오 진행을 위해 만들어 둔 처치 불가 판정의 보스일 것만 같았다.
아아아는 두 발자국 정도 뒤로 물러났다.
여차하면 포탈을 통해 바로 도망칠 생각으로 가득했다.
아아아는 스피드 런에 특화된 사람이었지, 보스 러쉬에 특화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보스를 눈앞에 두고 도망치는 건 스피드 러너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그런 아아아와는 다르게 세 발자국 정도 앞으로 나아갔다.
어째서인지 슬라임이 도미닉 경을 부른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모든 건 도미닉 경의 감일 뿐이었지만, 대체적으로 도미닉 경의 감은 잘 맞는 편이었다.
"도미닉 경?"
도미닉 경은 히메의 만류를 뿌리치고 슬라임에게 더 가까이 다가 갔다.
"먼저 가시오! 난 이 녀석과 볼일이 있어서!"
도미닉 경이 히메에게 그렇게 외치며 이 건물만큼이나 거대해진 슬라임에게 다가가자, 슬라임은 애교를 부리듯 그 큰 몸체를 꿀렁거렸다.
물론 덩치가 있다 보니 그런 사소한 동작도 위험할 수 있었으나, 슬라임에게는 공격 의사가 없었고, 도미닉 경에게는 공격 의사가 없는 우연찮은 타격엔 거의 피해를 보지 않을 방어력과 피해 감소 능력이 있었다.
마침내 슬라임에게 다가간 도미닉 경은 슬라임의 검은 피부를 매만졌다.
말랑말랑하고 쫀득쫀득한 느낌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
"...이건?"
슬라임은 도미닉 경의 손길에 반응하듯 무언가를 뱉어내었다.
도미닉 경은 거의 새 것이나 다름없는 물건을 집어 들었는데, 도미닉 경은 이 물건에 대해서 꽤 잘 아는 편이었다.
그건 도미닉 경이 떨어뜨렸던 휴대폰이었으니까.
꽤 잘 안다고 표현한 것은, 도미닉 경은 아직 폰 뱅킹이나 핫 스팟, 그리고 비행기 모드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이었다.
"설마 이걸 가지러 갔던 건가?"
도미닉 경은 히메를 구출했을 때 갑자기 어디론가 달려가던 슬라임을 기억했다.
아마 도미닉 경의 추측이 맞다면, 슬라임은 도미닉 경이 잃어버렸던 폰을 떠올리고 그 폰을 주으러 갔던 것이리라.
그리고 폰을 되찾은 슬라임은 도미닉 경에게 그 폰을 돌려주려고 이렇게 눈앞에 나타난 것일 테고.
그 사이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저것 아무거나 집어먹고 몸집을 불리며 지금과 같은 덩치가 됐으리라.
"찾아줘서 고맙다."
도미닉 경은 슬라임을 한 번 쓰다듬었다.
슬라임은 기쁘다는 듯 꿀렁거렸다.
얼마나 신나게 꿀렁거리던지, 뒤에 있던 히메가 소리칠 정도였다.
"도미닉 경? 도미닉 경은 탱커니까 버틸 수 있겠지만, 저희는 더 이상 못 버텨요!"
히메의 외침에 도미닉 경이 슬쩍 뒤를 돌아보자, 길쭉길쭉 늘어났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는 슬라임의 몸이 만든 크레이터들이 보였다.
아무래도 이렇게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건 도미닉 경 뿐인 모양이었다.
"어째서 먼저 나가지 않은 거요?"
"저 점액 때문에요!"
도미닉 경은 히메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바위에 박힌 점액이 보였는데, 그 점액이 히메와 아아아가 포탈로 나가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도미닉 경은 그제야 일단 슬라임을 진정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단 크기를 줄일 순 없을까? 크기가 너무 크니까 원하지 않아도 문제가 생기는 것 같으니."
도미닉 경이 슬라임을 향해 크게 외쳤다.
슬라임에게 귀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까지 도미닉 경의 말을 알아듣는 모습을 보여 왔기에 도미닉 경은 슬라임이 어떻게든 반응할 것이라고 믿었다.
"!"
슬라임은 알겠다는 듯 작게 꾸물거리더니, 이내 핵이 있는 작은 덩어리를 뱉어내었다.
그 작은 덩어리는 동그랗게 몸을 웅크리더니, 이내 도미닉 경의 다리를 타고 올라가 도미닉 경이 들고 있는 폰에 들어가 버렸다.
슬라임이 폰에 들어가자 자동으로 S.P.Y앱이 켜졌다.
[S.P.Y앱에 새로운 업데이트가 있습니다. 지금 업데이트 하시겠습니까?]
라는 시스템 창과 함께.
"일단 여기를 먼저 벗어나는 것이 좋겠군."
도미닉 경은 먼저 히메와 아아아의 상태을 확인했다.
히메와 아아아는 점점 사라지는 검은 점액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히메의 다리 사이에는 날뛰는 점액이 만들어낸 깊은 구멍이 하나 생겨나 있었다.
히메가 조금만 더 늦게 뒤로 뺐더라면 중상이었을지도 몰랐다.
다행스럽게도 히메와 아아아가 크게 다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도미닉 경은 힐끔 거대한 검은 점액을 바라보았다.
핵이 사라진 검은 슬라임의 점액은 구심점을 잃고 녹아내리듯 아래로 흘러내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공허의 저편으로 대부분 흩어져 버렸다.
약간의 잔해는 남아 있었으나,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그 잔해마저 사라지리라.
"주, 죽는 줄 알았네요."
히메가 엉거주춤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 위험한 건 없었소만."
"탱커랑은 달라요, 탱커랑은!"
히메는 도미닉 경의 말에 이래서 탱커들이란.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도미닉 경이 꽤 여유로웠던 것과는 달리, 히메는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사실 이는 체력이 약한 딜러들의 고질적인 문제였다.
한두 방은 물론 수십 방을 맞아도 여유로운 탱커와는 달리, 몸이 약한 딜러들은 한 방 한 방이 치명타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도미닉 경은 슬라임의 움직임을 애교라고 생각할 정도로 여유로웠지만, 히메는 그 한 방 한 방이 생사의 기로였다.
"아무튼."
히메는 슬쩍 바위 아래로 고개를 숙여 검은 슬라임이 있는지 확인했다.
"도대체 방금 그건 뭐였을까요? 다음 업데이트 때 나올 보스? 글리치부르크의 버그가 만들어낸 망령?"
검은 슬라임의 본체는 이미 도미닉 경의 폰에 들어간 상태였고, 겉 껍질이라고 할 수 있는 점액만 사라진 것이었지만 히메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랬기에 그녀는 방금 전 위협적으로 나타났다가 허무하게 사라진 검은 슬라임을 보스나 버그라고 여겼다.
"뭐, 별일 아니지 않겠소?"
도미닉 경은 히메에게 검은 슬라임에 대해서 설명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이내 검은 슬라임의 존재를 숨기기로 마음먹었다.
도미닉 경 혼자서 연루되어 있다면 몰랐으나, 이 검은 슬라임에 대해서 말하려면 도미니카 경의 폰에 있는 나머지 반쪽짜리 핵에 대해서도 설명해야 했으니까.
도미닉 경은 주머니에 넣어 둔 폰을 슬쩍 더 깊숙이 찔러 넣었다.
"어쨌든 일단 나가는 게 어떨까요?"
아아아가 도미닉 경과 히메의 대화 사이에 끼어들었다.
"더 이상 있다간 또 어떤 변수가 나타날 지 모르니까요."
"그렇구려. 당장 여기서 나가도록 합시다."
"동의해요."
도미닉 경과 히메, 그리고 아아아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포탈에 몸을 던졌다.
도미닉 경은 환한 빛이 잠시 눈앞을 하얗게 물들이는 경험과 함께 다시 서서히 시야가 회복되었다.
"...돌아왔군."
도미닉 경은 어째서인지 낯선 느낌의 익숙한 공간에 들어섰다.
바로 스토리 모드 로비였다.
[17 클리어!]
[404 Not found!]
[혹시나 우연히 17에 빠지셨다면, 행정부와 시스템 인더스트리에 문의해주세요.]
익숙한 시스템 창과 함께.
도미닉 경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 그리고 그 사이에서 환하게 세상을 비춰주는 밝은 해.
어둠 속, 좁은 시야에 익숙해져 있던 도미닉 경은 저 멀리까지 보이는 뻥 뚫린 시야에 마음마저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돌아왔나?"
"돌아왔네요."
돌아온 것은 도미닉 경만이 아니었다.
히메와 아아아도 로비에 도착해 가차랜드의 신선한 공기를 폐 속 가득 밀어 넣고 있었다.
"저기, 혹시 지금이 몇 년도죠?"
"...? 미친 사람 다 보겠네. 회귀자 코스프레요?"
히메가 지나가는 시민에게 괜히 엉뚱한 것을 물었다가 미친 사람 취급을 받긴 했으나, 히메는 개의치 않았다.
그만큼 글리치부르크는 굉장히 찜찜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제 가차랜드로 돌아오셨으니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스피드 런 연습하러 가야죠. 이번에 바뀐 17도 확인할 겸."
아아아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벗어났다.
글리치부르크에서 하던 버릇이 튀어나왔는지 지그재그로 통통 튀며 앞으로 전진했으나, 글리치부르크와는 다르게 속도 증가는 없었다.
아마 시스템적으로 막힌 거겠지.
그때, 도미닉 경의 주머니에서 폰이 마구 울려대기 시작했다.
도미닉 경이 폰을 꺼내서 왜 이리 울려대나 확인해보자, 거기엔 통화권 밖인 글리치부르크에 있는 동안 쌓인 메시지와 부재중 통화가 가득 쌓여 있었다.
그 엄청난 양의 메시지와 부재중 통화를 바라본 도미닉 경은, 그때가 되어서야 되돌아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