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9화 〉 [248화]탈출
* * *
도미닉 경은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고개만 살짝 들어 주변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의 큰 진동만큼은 아니지만, 아직 여진이 남아 있던 탓이다.
"다 끝난 건가?"
도미닉 경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도미닉 경의 위로 마른 흙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아마 위에 있는 바위에 묻어 있던 흙이 진동으로 인해 떨어져 나온 모양이었다.
"도미닉 경, 괜찮아요?"
그나마 이 진동 속에서도 넘어지거나 쓰러지지 않고 자세를 유지했던 히메가 곧바로 도미닉 경에게 다가왔다.
옷에 묻은 흙먼지를 탈탈 털어내던 도미닉 경은 히메의 걱정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살짝 어지러운 것 빼면 문제 없소. 그나저나 히메 공은... 음?"
도미닉 경은 히메도 괜찮은지 물어보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도미닉 경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는데, 히메의 뒤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낀 것이다.
"저기, 히메 공?"
"네?"
"저기 있는 바위가 원래 저기에 있었소?"
도미닉 경은 히메의 등 뒤에 있었던 바위를 가리켰다.
진동이 있기 전까지는 히메의 어깨 정도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 같지만, 지금은 히메의 명치 부근에 있었다.
진동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자리가 바뀌었다고 하기엔 바위의 상태가 너무 안정적이었다.
"바위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 어라? 왜 바위 위치가 낮아졌죠?"
히메는 도미닉 경이 가리킨 방향에 있는 바위를 보더니 역시 바위가 조금 낮아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히메의 반응을 보고 바위의 위치가 조금씩 낮아졌다는 걸 확신한 도미닉 경은 지금까지 올라온 방향을 내려다보았는데, 방금 전에 보았던 것보다 확실히 가까워진 상태였다.
"설마 전체적으로 맵이 가라앉은 건가?"
도미닉 경은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위를 바라보았다.
만일 이 맵이 전체적으로 내려앉은 거라면, 어쩌면 출구에 닿을 수 없을지도 몰랐으니까.
그러나 도미닉 경의 걱정은 기우였다.
"출구가... 가까워졌군."
도미닉 경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작게 중얼거렸다.
방금 전까지 저 멀리서 반짝이는 별처럼 보이던 출구는, 이제 문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뭘 보는 거예요? 어라?"
도미닉 경이 멍하게 하늘만 쳐다보고 있자 히메도 그 시선을 따라 출구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는데, 그녀 역시도 출구가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들 괜찮으십니까?"
그때, 먼저 이 징검다리를 건너던 아아아가 재빠르게 내려왔다.
올라갈 때와는 다르게 조금 불안불안한 모습이었으나, 순식간에 도미닉 경과 히메 앞에 선 아아아는 가장 먼저 도미닉 경과 히메의 상태를 살폈다.
"휴. 다행이군요. 갑자기 변수가 나타나는 바람에 또 다른 버그나 오류가 생겼을까 봐 걱정했습니다."
"출구가 가까워졌소. 혹시 길이 끊기거나 하지는 않았소?"
도미닉 경은 마침 잘되었다는 듯 아아아에게 위쪽의 상황을 물었다.
"출구는 멀쩡합니다. 다만 바위들의 위치가 조금 달라져서 말이죠. 다음번 스피드 런 때 참고를 해야겠습니다."
지형이 바뀌었으니, 기존 정석 루트와 비교해서 확인해 봐야죠. 라고 말한 아아아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도미닉 경에겐 다행이겠군요. 아무래도 올라갈수록 어려워지는 구조다 보니, 도미닉 경에게는 조금 어려운 것이 아닐까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그렇게 말한 아아아는 슬쩍 위를 쳐다보았다.
"이 정도면 정말 극한의 상황이라고 하기보다는 어렵지만 할 만하다 정도입니"
아아아가 난이도가 하향 조정되었다는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다시금 진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방금 전처럼 그렇게 큰 진동은 아니었는데, 도미닉 경도 다리에 힘을 주면 충분히 서서 버틸 수 있을 만큼밖에 되지 않았다.
"또 진동이로군."
도미닉 경이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전보다 더 시작 지점과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참 이상하군요. 제가 여기를 몇십 년 동안 수백 번은 와 봤는데, 이렇게 갑자기 변수가 일어난 적은 없었는데 말입니다."
아아아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그래도 저희에게 유리한 변수니까 다행입니다. 도미닉 경은 운이 좋으시군요."
마치 누군가가 도미닉 경을 도우려는 것만 같습니다. 라고 말한 아아아는 다시금 울리는 진동에 살짝 휘청거렸다.
진동은 계속해서 이어졌으나, 가면 갈수록 점점 그 위력이 약해지고 있었고, 진동이 이어질 때마다 바위와 바위 사이의 간격은 더욱 좁아지고 있었다.
"이젠 그냥 산책하듯 걸어도 올라갈 수 있겠군."
도미닉 경은 이제 계단 수준으로 변한 징검다리를 바라보았다.
아직 공허에 잠식된 원숭이들이 문제이기는 했으나 진동이 이어질 때마다 원숭이들이 던지는 투사체도 점점 더 명확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제는 보고 피할 수 있게 되었다.
도미닉 경은 어째서 여기가 이렇게 쉬워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글리치부르크에서 정신적으로 지쳐가던 도미닉 경은 이내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자신을 납득시켰다.
...
잠깐의 시간이 지난 뒤, 도미닉 경은 아주 간단하게 출구 앞에 설 수 있었다.
"여기를 지나면 스토리 모드 로비로 나갈 겁니다."
아아아는 석제 구조물이 인상적인 포탈 문을 가리켰다.
"지금 가차랜드에서 사용하는 것과는 조금 달라 보이는군."
도미닉 경은 가차랜드의 포탈과 워프 게이트를 생각하며 그렇게 말했다.
"뭐, 옛날 방식이니까요."
아아아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하, 너무 피곤한 하루였네요."
히메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긴장이 풀렸는지, 피곤한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레트로한 도트 상태로 변하지 않나, 도트 상태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더니 갑자기 땅으로 쑥 꺼지질 않나, 글리치부르크에 떨어져 괴한에게 습격을 당하질 않나..."
히메는 오늘 있었던 일을 하나씩 손가락을 꼽아가며 말했다.
"그래도 이제 돌아갈 수 있으니 됐어요. 까딱 잘못했으면 영원히 여기에 갇혀 있었을 수도 있던 걸잖아요."
히메의 말에 도미닉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정신력이 강한 도미닉 경이라지만, 글리치부르크는 사람이 있을 만한 데가 못 되었다.
그런 곳에서 평생을 갇혀 있어야 한다?
도미닉 경은 그 사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진절머리가 났다.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은 곳이오."
그렇게 몸을 부르르 떤 도미닉 경은, 이내 몸을 돌려 아아아를 바라보았다.
"고맙소. 덕분에 이렇게 여기를 빠져나갈 수 있게 되었으니."
"뭘요. 전 살짝 도와드린 거 뿐이니까요. 그래도 고마우시다면, 가차튜브에서 [세상에서 가장 빠를 사나이 아아아TV]를 검색해서 구독과 좋아요 한 번만 부탁할게요."
"...가차튜버였소?"
"요즘 가차튜브 안 하는 사람이 드물죠."
아아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무튼, 여기까지 왔으니 포탈이 잘 작동되는지 확인을 좀 해 보겠습니다. 아까 진동 때문에 좀 불안하니까"
아아아는 말을 하다 말고 도미닉 경의 뒤를 바라보았다.
도미닉 경은 어째서 아아아가 굳은 표정으로 점점 시선이 올라가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으나, 이내 도미닉 경은 꿀럭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고 나서야 왜 그런지 알게 되었다.
"...!"
거기엔, 커다란 검은 슬라임이 도미닉 경과 히메, 그리고 아아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글리치부르크의 내부.
"끙. 비정상적인 접근이 감지되었다니 이게 무슨 소리람."
"또 데이터 마이너들의 소행이겠지, 뭐. 빨리 해결하고 가자고. 나 저녁에 가챠큐어 봐야 한단 말이야."
글리치부르크에서 비정상적인 데이터 접근이 감지된 탓에 시스템 인더스트리의 코더들은 각자 랜턴을 들고 글리치부르크 내부를 걷고 있었다.
시스템에 의해서 좌표는 찍혔으나, 글리치부르크 내부에는 감시카메라같은 보안 시설이 없었기에 이렇게 코더들이 출동해야만 했다.
"으, 진짜 여긴 소름이 끼쳐. 끔찍하단 말이지."
"왜? 어둡고 무서워?"
"아니. 버그 투성이니까."
키가 작은 코더는 키가 큰 코더에게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옛날엔 호환, 마마가 가장 큰 재앙이랬잖아. 그게 뭐겠어? 되지도 않는데 어떻게든 해야만하는 신구 데이터 호환과 호환하다가 터진 버그에 엄마 찾으며 울어제끼는 관리자 놈이 가장 큰 재앙이라는 소리지. 호랑이랑 귀신이 어딜 버그와 비교되려고 말이야."
"푸하하하핫! 그거 맞는 말이네. 아, 다 왔다."
두 코더는 불법적인 데이터 접근이 일어난 지역에 도착했다.
"아, 다음 업데이트 지도구나. 망했네."
키가 큰 코더가 가장 먼저 지도의 존재를 알아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지도를 작성한 것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었다.
정확하게는 그가 속한 팀이 만들어낸 지도라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었으나, 키가 큰 코더는 본능적으로 미래의 정보가 유출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멀리 못 갔을 테니 지금이라도 쫓아가면... 응?"
키가 작은 코더는 한숨을 내쉬며 키 큰 코더를 격려했다.
자기도 두어 번 미래를 유출당한 적이 있었기에 키 큰 코더의 심정을 공감할 수 있었다.
그때, 키가 작은 코더는 갑자기 발아래에 무언가가 채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처음엔 다음 업데이트에 있을 장비를 차버렸나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감촉이 딱딱한 것이 아니라 말랑말랑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발에 채인 것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좋은 밤이에요. 실례지만, 제가 다른 사람에게 팔아넘길 목적으로 이 데이터를 몰래 보는 불법을 저질렀습니다만,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를 경찰서까지 데려다 주시겠어요? 자수하려구요."
그곳에는 해맑은 미소를 짓는 여성이 있었다.
어째서인지 개운한 표정을 지으며 머릿속에 꽃밭만 가득해진 한 광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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