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8화 〉 [247화]탐욕스러운 것들
* * *
"황무지 H3, 설원 A2, 고성 D11..."
광부는 장갑을 낀 채 지도를 들고 최대한 많은 파밍 지역을 머리에 집어넣었다.
그 과정은 굉장히 지루하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이었으나, 광부는 핏발 선 눈으로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 장소 하나하나가 정보였고, 그 정보들은 매우 값진 것이었다.
흥정에 따라서 다소 가격이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지역 하나 당 3만 가차석 이상은 받을 수 있는 가치가 여기에 기록되어 있었다.
이 지도에 표시된 것만 해도 대략 40개 정도의 파밍 지역이 기록되어 있었으니 적게 잡아 120만 가차석.
그 정도면 빚을 갚고도 몇 년은 놀고먹을 수 있는 거금이었다.
이번만, 딱 한 번만 불법을 저지르고 입을 싹 닦아버리면 누가 알겠어?
광부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지도를 내려놓았다.
이제 모든 재료 파밍 장소를 외웠으니, 자기가 봤다는 증거를 없애야했다.
장갑을 낀 채 봤으니 지문도 없을 것이고, 여기까지 와서 단속을 할 만큼 맛이 간 경찰도 없을 것이다.
이 지도를 제자리에 가져다 두기만 한다면, 사실상 완전 범죄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광부는원래의 자리로 지도를 되돌려 놓은 뒤 조심스럽게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제 비밀 통로로 나가기만 하면"
스피드 러너들이 자기들만의 지도를 가지고 있듯, 데이터 마이너들 사이에서도 알음알음 지도에 대한 정보가 퍼져 있었다.
데이터 마이너들의 지도는 글리치부르크의 일부만 그려져 있었는데, 스피드 러너의 지도보다 뛰어난 것이 딱 하나가 있었다.
바로 백도어의 존재가 표시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데이터 마이너들은 이 백도어들을 통해 가차랜드와 글리치부르크 사이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다.
당연히 데이터 마이닝은 불법이었기에 코더들과 경찰들이 눈에 불을 켜고 이 백도어를 찾으러 돌아다니곤 했으나, 데이터 마이너들은 추방되는 한이 있어도 절대 백도어의 존재를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광부도 자기만의 백도어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 있는 곳에서 조금 멀기는 했으나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한 그녀는 의외의 소득에 기분이 좋아져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검고 말랑한 벽에 부딪치기 전까지.
"...뭐지, 이게?"
광부는 방금 전까지 없었던 말랑말랑한 검은 벽에 얼굴을 부딪쳤다.
굉장히 말랑말랑했기에 다친 곳은 없었으나, 광부는 갑자기 나타난 검은 벽의 존재에 눈살을 찌푸렸다.
검은 벽이 있는 방향이 백도어를 향한 가장 빠른 길이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지. 돌아가야겠네."
광부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돌아서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내 광부는 위화감을 느꼈다.
고개를 돌린 곳에서도 보이지 않던 검은 벽이 보이는 것이다.
"...갑자기 지형이 변했다고?"
광부가 이상하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딜 보더라도 검고 말랑말랑한 벽이 보였다.
주변을 세 바퀴 정도 돌아본 그녀는, 마침내 자기 처지를 깨달았다.
그녀는 지금, 이 말랑말랑한 검은 벽에 둘러싸여 갇힌 것이다.
"나, 나갈 길을 찾아야 해."
그녀가 곡괭이를 들어 올려 말랑말랑한 벽을 내리찍었다.
그러나 벽은 말랑말랑할 뿐, 깨지거나 균열이 가지는 않았다.
"바, 바닥은? 아직 바닥은 괜찮을 거야."
광부가 패닉에 빠져 곡괭이로 바닥을 마구 강타했다.
물론 바닥이 뚫리더라도 광부가 빠져나갈 길은 없었다.
글리치부르크의 바닥 아래엔 온갖 종류의 버그와 오류가 매설되어 있었다.
그 버그와 오류를 뚫고 가기엔, 광부의 장비는 너무 빈약했다.
그러나 당장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광부는 인정사정 없이 바닥을 찍었다.
그리고 마침내 바닥의 타일이 깨지고 바닥 아래가 드러났을 때, 광부는 놀라 나자빠질 수밖에 없었다.
바닥의 아래마저 말랑말랑한 검은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던 것이다.
"도,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나처럼 착하게 산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녀는 머리에 쓰고 있던 안전모를 땅바닥에 내팽개치며 화를 냈다.
그녀가 시도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이 막히자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른 것이다.
물론 바닥에 내팽겨쳐진 안전모는 말랑말랑한 검은 것에 맞고 튕겨 나와 다시 그녀의 손에 잡혔다.
마치 묘기와도 같은 장면이었지만, 광부는 그 놀라운 경험에 신경 쓰지 못했다.
"...잠깐, 이거 점점 다가오는 거야?"
광부는 재빠르게 말랑거리는 벽을 만져 보았다.
분명히 방금 전에는 광부와 벽 사이에 반걸음 정도의 거리가 있었지만, 지금은 확실히 그 거리가 줄어든 것이다.
"이, 이러다가 압사당하겠는데...?"
그제야 광부는 겁에 질렸다.
가차랜드에서 죽음은 그다지 큰 가치가 없지만, 글리치부르크에서라면 달랐다.
여기에서 죽음을 경험한다는 것은 부활 시스템이 글리치부르크의 오류와 버그에 노출된다는 것이었다.
부활 시스템에 이상이 생기면 영구적인 장애가 생길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까딱 잘못하면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영원한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할 수도 있었다.
물론 아주 낮은 확률로 부활 시스템이 멀쩡하게 작동해 정상적으로 부활할 수도 있었지만, 그 낮은 확률에 미래를 걸고 싶지는 않았다.
"시, 싫어."
광부는 이제 이 검은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겨우 10㎡ 정도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물론, 바닥에 난 구멍을 넓히며 솟아오르는 검은 것이 있었기에 실제로는 더 좁을 수도 있었다.
점점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에, 광부는 완전히 이성을 잃고 원숭이처럼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시이이잃어어어어어어!"
물론, 그녀의 비명이 글리치부르크에 울려 퍼질 일은 없었다.
...
"이거 짜증이 나는군."
도미닉 경이 이 거대한 나선 징검다리의 중간쯤 위치한 바위에 매달린 채 힐끗 옆을 보았다.
그곳엔 공허에 잠식된 원숭이가 무언가를 던지고 있었는데, 주변이 어두워서 그런지, 아니면 도미닉 경의 시력이 그다지 좋지 않아서인지 투사체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투사체는 맞으면 엄청난 충격파와 함께 맞은 사람을 뒤로 밀어냈는데, 얼마나 밀어내는 힘이 강한지 빗맞아도 반드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정도였다.
도미닉 경은 이미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벌써 13번째 여기를 도전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앞선 12번의 시도 동안 원숭이의 패턴을 알아차린 도미닉 경은 눈을 감고 속으로 타이밍을 세었다.
하나, 둘, 던지고, 하나, 둘, 셋, 던지고,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던지고, 하나, 던지고.
지금.
도미닉 경은 순식간에 바위 위로 올라가 다음 바위를 향해 달렸다.
유독 바위와 바위 사이가 넓은 곳이었기에, 도미닉 경은 최대한 집중한 채 있는 힘껏 바위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도미닉 경은 앞선 12번의 시도 중 여기를 넘어가려는 시도를 3번 정도 했다.
그때마다 도미닉 경의 점프 실력으로는 아슬아슬하게 닿지 못하는 것을 알아차린 후, 도미닉 경은 정석적인 뜀뛰기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도미닉 경은 대신 이곳을 뛰어넘을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새로운 방법을 시도할 때였다.
공허에 잠식당한 원숭이가 무언가를 던졌다.
도미닉 경은 바위에서 뛰어오른 상태로 힐끗 그 무언가의 궤적을 확인했다.
가까운 곳에서 봐도 아주 미세하게 보이는 궤적을 확인한 도미닉 경은 갑자기 앞으로 양팔과 양다리를 쭉 뻗었다.
마치 멀리뛰기를 하는 선수처럼 말이다.
아슬아슬하게 도미닉 경의 등 뒤로 그 무언가가 지나간다.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아슬아슬하게 등에 닿지 않고 지나갔을 타이밍.
그러나 하필이면 도미닉 경은 등에 방패를 메고 있었고, 그 무언가는 방패에 닿아 충격파를 발산해냈다.
충격파에 몸을 실은 도미닉 경은, 착지가 조금 불안정하긴 했지만 다음 바위로 넘어올 수 있었다.
도미닉 경이 생각해낸 새로운 방법이 성공한 것이다.
"축하해요, 도미닉 경. 이제 절반 남았네요. 힘내죠!"
민첩한 쿠노이치답게 도미닉 경보다 먼저 저 구간을 통과한 히메가 도미닉 경을 격려했다.
"지금까지 했던 그 어떤 것보다도 힘든 것 같소."
도미닉 경이 한숨을 내쉬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까마득한 높이 아래에 시작 지점이 보였다.
도미닉 경은 이번엔 위를 쳐다보았다.
시작 지점보다는 살짝 가까워 보였지만, 여전히 높은 곳에 출구가 있었다.
"정말,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군."
도미닉 경의 말에 히메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쾌한 가차랜드와는 달리, 글리치부르크는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는 것만 같았다.
"먼저 가시오. 난 잠깐 숨을 돌렸다가"
도미닉 경은 히메에게 먼저 올라가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말을 끝마칠 수 없었는데, 갑자기 생긴 진동 때문이었다.
"무, 무슨 일이죠?"
히메가 바위 위에서 간신히 중심을 잡으며 도미닉 경에게 말했다.
"모르겠소. 일단 진동이 멈출 때까지 기다립시다!"
도미닉 경은 더욱 커진 진동에 바닥에 납작 엎드려 진동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진동은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