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5화 〉 [244화]탐욕스러운 것들
* * *
"?"
슬라임은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은 채 무언가 망가진 것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아니, 저걸 우물거린다고 표현하는 건 조금 애매한 표현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슬라임의 몸속에서 조각조각 부유하고 있다는 것이 정확하리라.
"그, 놔주면 안 될까...?"
히메는 자신을 꽉 잡고 놓아주질 않는 슬라임에게 거의 애원하듯 말했다.
도미닉 경은 그제야 히메를 잡은 것이 S.P.Y앱에서 서식하는 검은 슬라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슬라임은 어째서인지 횃불의 빛에 드러난 크기가 거의 도미닉 경의 거미전차만큼이나 거대했는데, 그렇다는 말은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나머지는 더 크다는 소리였다.
"도대체 왜 슬라임에 파묻혀 있는 거요?"
도미닉 경이 히메에게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히메가 슬라임에 박혀 있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모르겠어요. 갑자기 어둠 속에서 얘가 튀어나오더니, 갑자기 저를"
꿀꺽.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슬라임은 히메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정확하게는 꿈틀거리다가 우연히 히메가 빨려 들어갔다는 것이 정확하겠지만, 주변에서 보기엔 검은 슬라임이 히메를 잡아먹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히메를 삼킨 검은 슬라임은 더더욱 그 크기를 키워나가며 벽과 바닥, 그리고 천장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저건 대체 뭐요?"
아아아가 도미닉 경에게 물었다.
지금까지 온갖 종류의 스피드 런을 진행하면서 정말 다양한 종류의 몬스터나 지형, 그리고 버그와 오류들을 보아왔지만, 눈앞에 있는 검은 슬라임은 묘하게 친숙하면서도 새로운 느낌이었다.
"슬라임이오."
도미닉 경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 예전에 주웠소."
아아아는 도미닉 경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도미닉 경의 애완 동물입니까?"
"아마도."
분명히 슬라임은 도미닉 경의 폰 속에 있었을 텐데.
도미닉 경은 아아아의 말에 대충 대답하며 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 도미닉 경은 폰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평소라면 폰을 되찾기 위해 왔던 길을 되돌아갔겠지만, 여기는 글리치부르크였다.
도미닉 경은 도저히 이 어둡고 복잡한 공간에서 잃어버린 폰을 찾으러 갈 자신이 없었다.
그 자신만만한 도미닉 경마저 질리게 할 정도로 글리치부르크는 어둡고 복잡했다.
대신 도미닉 경은 아주 시원하게 약정과 할부가 남은 폰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눈앞에 마주한 의문에 집중했다.
이 슬라임은 도대체 뭘 어떻게 했길래 이 짧은 시간에 저렇게 커졌는가 하는 의문을.
도미닉 경은 잊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사실 이 슬라임은 버그로 인해 변이된 종이었다.
갈라지고 뒤틀리는 차원의 틈 사이에서 살아남은 이 슬라임은 처음부터 재생 능력이 뛰어난 종이었다.
그리고 뒤틀린 차원의 틈 사이에서 한 번 변이된 슬라임은,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슬라임에게 닿은 모든 것들을 복구하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도미닉 경은 슬라임의 능력이 S.P.Y앱을 통해 도미닉 경과 도미니카 경을 연결시킨다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 모든 것이 위의 성질과 관련되어 있었다.
차원의 틈 사이에서 둘로 갈라진 핵은, 차원을 넘어서 복구하려는 성질로 인해 두 차원의 매개체가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검은 슬라임은 박살 나고 뒤틀렸으며, 엉망이 되고 갈라진 것들을 복구하는 데 큰 효과가 있었다.
"!"
"아야!"
슬라임이 우물거리던 기계 장치를 뱉어내었다.
그와 동시에 히메도 그 틈 사이로 같이 탈출할 수 있었다.
"으. 세상에. 끈적거리...지 않아?"
히메는 슬라임의 몸속에서 느껴지던 물컹한 감각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묘하게 미끄럽고 말랑말랑해 기분 좋으면서도 미끌거리고 끈적거리는 느낌에 불쾌한 느낌을 동시에 받은 것이다.
히메는 뱉어진 이후 그 끈적거리는 감각에 몸서리를 쳤으나, 정작 끈적거림을 떼어내려고 뻗은 손에는 아무런 특이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피부가 더 뽀송하고 매끈하게 변한 것만 같았다.
"...도미닉 경?"
히메가 묘하게 잡티가 사라진 팔을 바라보며 귀를 팔랑거렸다.
"혹시, 이 슬라임 미용 효과도 있나요?"
"모르겠소.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지라..."
도미닉 경은 히메의 물음에 머쓱하게 대답했다.
물론, 미용도 슬라임의 회복력에서 파생된 부수적인 효과였다.
주변을 복구하려는 성질로 인해 피부의 상태를 가장 좋은 때로 복구하면서 우연히 아기처럼 뽀송한 피부로 돌아가는 것이다.
"♬"
"어?"
"어딜 가는 거지?"
슬라임은 지금, 이 상황 자체가 재밌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슬라임은 노래하듯 기쁜 울음소리를 내더니, 이내 갑자기 어디론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슬라임은 부정형의 생명체였기에 천장이나 바닥, 벽에 있는 틈 사이로 요리저리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도대체 슬라임이 어디로 가는 거지?"
도미닉 경은 갑자기 이동하기 시작한 슬라임을 바라보며 큰 의문을 가졌다.
마침 옆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아아아의 제지가 없었더라면, 도미닉 경은 목적을 다시 잃은 채 슬라임을 따라갔으리라.
"도미닉 경! 목표를 생각해요! 히메 씨를 구했으니 여길 탈출하는 것이 먼저잖습니까!"
"아."
도미닉 경이 아아아의 말에 멍청한 소리를 내었다.
"맞소. 또 잊을 뻔했군."
도미닉 경은 하나에 빠지면 그것을 해결할 때까지 몰두하는 성격이었으나, 이는 장점이면서도 단점이었다.
하나에 몰두한다는 것은 그만큼 집중력이 뛰어나다는 소리였지만, 반대로 본래 가지고 있던 목적을 잃고 다른 일에 몰두한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스스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도미닉 경이 아아아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맙소. 내가 가끔 이럴 때가 있어서..."
"뭐 어때요. 이제 다시 여길 빠져나갈 준비를 합시다. 여기서는... 그래. 조금 다른 루트로 가는 게 빠르겠군요."
아아아는 도미닉 경의 감사 인사를 받으며 지도를 꺼내 들었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여기서 빠져나갈 최단 경로가 그려지고 있었다.
...
"흐, 흐헤."
히메를 두고 도망치듯 사라진 광부는 마침내 그녀가 그토록 원하던 미래의 데이터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잿빛으로 물든 장비들을 손에 들고 바보처럼 웃은 그녀는, 이내 곡괭이를 내려놓고 외눈 안경을 꺼내 왼쪽 눈에 꼈는데, 그 외눈 안경을 통해 장비들의 설정과 스펙이 전달되고 있었다.
"이건 기존보다 공격 속도를 12% 올려주는 거고... 이건 탱커 전용이네? 또 탱커 우대야?"
당연하게도 이렇게 미래에 업데이트 될 장비들의 수치를 확인하는 일은 불법이었고, 그녀가 쓰는 장비인 외눈 안경도 불법적인 물건이었으나,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불법적인 일하는데, 추가적인 죄 한두 개가 더해진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으니까.
그녀는 최대한 많은 수치들을 머릿속에 기억했다.
예전에는 직접 수첩 등에 기록하고 다녔었지만, 한 번 불법 데이터 마이닝으로 걸린 이후 증거물이 될 만한 기록물 대신 그녀의 뛰어난 머리에 의존하는 편이었다.
"좋아. 모든 수치를 기억했으니까 이제 돌아가도 되겠지..."
마침내 모든 정보를 캐낸 광부는 외눈 안경을 다시 집어넣고 곡괭이를 들어 올렸다.
지금까지 얻은 정보만 해도 27만 크레딧은 되겠어. 라고 스스로 대견해하던 광부는 문득 보이는 무언가에 멈칫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린 그녀는 그녀의 발길을 멈추게 한 물건에 시선을 고정했다.
"...다음 업데이트에 저런 게 추가된다고?"
광부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만큼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은 대단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새로운 재료와 그 수급처의 지도...!"
광부의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지금까지 그녀가 보았던 장비들은 새롭게 업데이트되는 T6 장비들이었다.
당연하게도 그 장비들로 강화하기 위해선 새로운 강화 재료가 필요했고, 이미 시스템은 그 재료들을 수급할 수 있는 장소를 정한 모양이었다.
"저 정보를 알면 100만 가차석... 아니, 그 열 배도 꿈은 아니지."
광부가 탐욕스럽게 지도를 향해서 손을 뻗었다.
그러나 곧 이성을 일부 되찾은 광부는 순식간에 다시 손을 회수했다.
"아니, 아니야. 욕심을 내면 안 돼. 이미 빚을 갚기엔 충분한 정보를 모았잖아?"
광부가 지도가 있는 곳을 곁눈질로 힐끔 바라보았다.
아직 업데이트 전이었기에 지도는 그 어떤 이펙트도 없었으나 광부의 눈에는 휘황찬란한 황금빛과 무지개 빛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하, 하지만 돈은 많아서 나쁠 것이 없지. 조금만... 한두 군데만 확인한다면..."
광부의 손이 다시금 지도를 향해 나아갔다.
"아니, 아니야! 장비의 수치를 확인하는 것과 이런 기밀 정보를 엿보는 건 보안 레벨부터가 다르잖아!"
광부는 어떻게든 저 지도에서 시선을 돌리기 위해 몸을 홱 돌려 지도를 등졌다.
정말 저 지도가 새로운 재료들이 나오는 장소를 기록한 것이라면,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시스템의 경고를 받을지도 몰랐다.
불법적인 방식의 데이터 마이닝을 저지르는 상태에서, 과거에 범죄 기록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아니, 경고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추방을 각오해야 할지도...
그렇게 스스로에게 저 지도를 보면 안 되는 온갖 이유들을 쏟아 내었으나, 광부는 자기도 몰래 슬쩍 곁눈질로 지도를 다시 보았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그녀의 마음속에 차오른 탐욕은 이내 머리끝까지 차올라 이성과 감성을 모두 마비시키고야 말았다.
"그래, 어차피 불법인 거, 하나 더 추가된다고 더 나빠질 것이 있겠어...? 들키지만 않으면 되지!"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마친 광부는 마침내 지도를 향해 손을 뻗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