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4화 〉 [243화]탐욕스러운 것들
* * *
"그나저나, 도미닉 경은 어째서 그 사람을 구하려고 하는 겁니까?"
걸음을 옮기던 아아아가 도미닉 경에게 물었다.
"어떤 관계길래 이렇게 도우려고 노력하시는 거죠?"
도미닉 경은 아아아의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아아아의 말은 그만큼 도미닉 경의 폐부를 찌르는 화살 같은 말이었다.
도미닉 경은 아아아의 말을 듣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나와 히메 공은 어떤 관계지?
도미닉 경이 생각했다.
우선, 친구 사이거나, 그 이상인 것은 확실했다.
히메는 도미닉 경이 가차랜드에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 중 하나였고, 이후에도 자주 마주친 사이였으니까.
심지어 제법 여러 가지 난관들을 같이 헤쳐오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전우인가?
도미닉 경은 진지하게 그렇게 생각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히메와 있을 때의 느낌은 그런 종류의 우정과는 다른 느낌이었으니까.
도미닉 경은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혼란에 빠졌다.
도저히 도미닉 경과 히메 사이의 관계를 명확히 정의할 수 없었다.
"히메 공은 내... 친구요. 가장 친한 친구."
가차랜드에서는 BFF라고 하더군. 이라며 엉뚱한 말을 내뱉은 도미닉 경은 찜찜한 표정으로 아아아를 쳐다보았다.
"뭐, 그렇군요."
아아아는 도미닉 경이 얼마나 생각이 복잡한지는 관심이 없다는 듯, 도미닉 경의 대답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아아아에게 있어선 그냥 물어본 질문이었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은 것이다.
"친구 사이의 우정은 중요하지요. 더 이상 우정을 시험받기 전에 그 아가씨를 구합시다."
아아아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목구멍을 1자로 만든 아아아는 갑자기 손가락을 입 안으로 집어넣더니, 목구멍에 숨겨져 있던 돌돌 말린 종이를 빼냈다.
"이크, 혹시 역겨웠다면 죄송합니다. 가끔 이 지도를 노리는 데이터 마이너들이 있어서요. 자기들 꺼 쓸 것이지 왜 스피드 러너들 꺼를 탐내는지..."
괜히 민망함에 헛기침을 한 아아아는 종이를 감싼 비닐 재질의 물질을 벗겨 내고 종이를 펼쳤다.
그 종이는 가로로 18만 칸, 세로로 12만 칸으로 된 거대한 모눈종이였는데, 각 눈마다 다양한 색깔이 칠해져 있었다.
"이게 바로 아까 제가 말했던 지도입니다. 스피드 러너들의 땀과 희생이 담긴 종이죠."
도미닉 경은 그 말에 지도라고 불린 모눈 종이 눈금들을 좀 더 자세히 바라보았다.
종이에는 반짝이는 점이 하나가 있고 그 점의 뒤로 긴 형광색 선이 그어져 있었는데, 도미닉 경은 본능적으로 반짝이는 점이 바로 도미닉 경과 아아아가 있는 곳이고, 형광색 선은 지금껏 이동한 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아아는 그 지도를 한참 바라보더니, 도미닉 경을 향해 지도를 살짝 돌려 손가락으로 세 군데를 가리켰다.
"제 생각에는 북쪽 방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10시 방향부터 1시 방향까지 있는 여기, 여기, 여기 있을 확률이 높지요."
도미닉 경은 이 모눈종이에 그려진 지도를 통해 아아아가 짚은 곳의 지형을 알아차릴 수 있었는데, 아아아가 짚은 부분들은 대개 강아지 모양이나 별 모양, 혹은 형용할 수 없이 빛나는 부등 다면체의 모양으로 벽이 세워져 있었다.
어째서 이렇게 엉망진창인 구조로 벽을 세워둔 것일까?
"글리치부르크는 애초에 사람들의 접근을 가정하고 만든 곳이 아니라서요. 이렇게 엉망인 구조물들이 제법 있습니다."
도미닉 경이 채 입을 열기도 전에 아아아가 도미닉 경의 의문을 풀어 주었다.
도미닉 경이 어떻게 알았냐는 듯 고개를 들어 올려 아아아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도미닉 경의 입이 들썩거리자, 도미닉 경의 말보다 빠르게 아아아가 답변했다.
"스피드 러너에게 있어서 동체시력은 중요하니까요. 무엇보다도 도미닉 경의 표정이 풍부해서 알아차리기 쉽습니다."
아아아는 자기 눈을 가리키며 도미닉 경에게 당당히 말했다.
도미닉 경은 아아아의 말에 그 정도로 표정에 생각이 드러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런 건 중요한 것이 아니죠. 지금은 동료를 구하는 것이 먼저 아닙니까?"
"아."
도미닉 경은 아아아의 말을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잠시 원래의 목적들을 잃었던 도미닉 경은 다시금 목표를 확고히 다졌다.
일단 히메를 구한 뒤, 이곳을 벗어나 가차랜드로 돌아간다.
그렇게 목표를 명확히 잡은 도미닉 경은 아아아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고맙소. 덕분에 잊었던 것을 떠올릴 수 있었소."
"별말씀을. 그럼 일단 가장 가까운 곳부터 가보죠. 사실 지도 상으로는 1시 방향이 가장 가까워 보이지만, 거기까지 가는데 좀 복잡하게 꼬인 길이 있어서요. 여기 12시부터 갑시다."
아아아는 지도의 12시 부분에 있는 강아지 모양의 공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도미닉 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합시다. 이왕이면 당장."
도미닉 경의 동의를 받자마자 아아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말없이 도미닉 경의 시야에 닿는 범위 내에서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도미닉 경은 말없이 아아아의 뒤를 따랐다.
...
"...갔나?"
히메는 의문의 존재... 그러니까 광부의 기척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자 슬쩍 고개를 들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처음에는 잠시 정신이 흐트러진 상태였기에 뒤를 잡혀 제압당했으나, 쿠노이치로서 수련을 받은 히메의 기감은 온전히 정신을 집중한다는 가정하에 대부분의 기척을 잡아낼 수 있었다.
히메는 자기를 제압한 이가 더 이상 주변에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이미 풀어놓은 밧줄을 내려놓았다.
"빨리 여기서 빠져나가고 싶은데..."
히메가 손목을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히메는 애초에 이 공간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방금 전 괴한의 습격으로 인해 더더욱 이 공간이 싫어졌다.
필요하다면 당장에라도 긴급 탈출 버튼을 써서 여기를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히메는 그럴 수 없었다.
"...고장 났네."
히메는 주머니에서 긴급 탈출 버튼을 꺼냈다.
아니, 긴급 탈출 버튼이었던 것을 꺼냈다.
사실, 이젠 이름은 상관없었다.
이제는 고철 덩어리라고 불러야하나 고민이 될 정도로 망가진 긴급 탈출 버튼은 아무래도 방금 전 괴한의 습격으로 인해 완전히 망가져 버린 것 같았다.
"이제 어쩌지..."
히메는 마음속 가득 절망감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히메가 당당하게 이 공간을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긴급 탈출 버튼의 존재 덕분이었다.
여차하면 마지막 수단으로 쓰려고 했던 비장의 수단은, 써 보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고만 것이다.
"이제 남은 건 도미닉 경이 날 찾아내는 것뿐인데..."
히메는 다시 자리에 주저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도미닉 경이 히메를 찾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글리치부르크는 끝이 없어 보였다.
이 넓은 공간에서, 그것도 어둡고 버그가 가득한 공간에서 도미닉 경이 히메를 찾아낼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 희박한 확률을 뚫고 찾았다고 한들, 여기서 나가는 것도 문제였다.
"차라리 거기서 있을걸..."
히메는 처음 길을 잃었을 때 그 자리에서 기다렸어야 했다며 자책했다.
히메는 점점 자기 심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때 그러지 말걸. 가만히 있었으면 지금쯤 도미닉 경이 구하러 오지 않았을까?
히메의 생각은 늪에 빠진 것처럼 점점 더 비관적인 쪽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히메의 나쁜 습관이었다.
이제 히메는 완전히 고장 난 긴급 탈출 버튼을 옆에 던지고 자기만의 세상에 갇힌 듯 온몸을 웅크렸다.
그런 히메의 등 뒤에서, 검고 끈적한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
도미닉 경과 아아아는 처음에 예상했던 세 군데의 공간을 모두 확인했으나 그 어떤 곳에서도 히메는 없었다.
이제 4번째 공간에 도착한 도미닉 경과 아아아.
그곳은 근처에 카드팩이 그려진 그림이 있는 곳이었는데, 그림을 건드리면 카드팩이 개봉되는 이펙트가 재생되는 곳이었다.
아아아는 조심스럽게 눈을 감고 벽면을 손가락으로 쓸더니, 이내 갑자기 거친 벽의 감촉이 느껴지지 않는 부분에서 눈을 떴다.
그곳엔 벽이 있었는데, 아아아의 손가락이 그 벽을 뚫고 손목까지 들어가 있었다.
"여깁니다, 도미닉 경. 여기가 바로 입구군요."
도미닉 경은 아아아의 말에 벽에 가까이 다가 갔다.
그리고 아아아가 했던 것처럼 벽에 손을 내밀어보았다.
다른 곳에는 벽의 단단한 감촉이 느껴졌으나, 이 부분만 유독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도미닉 경의 손을 받아들였다.
"내가 먼저 진입하겠소."
도미닉 경은 방패를 들고 허상의 벽을 향해 당당하게 전진했다.
당연하게도 도미닉 경은 그 어떤 방해도 없이 숨겨져 있는 공간에 진입할 수 있었다.
처음 도미닉 경이 이곳에 진입했을 때, 도미닉 경은 크게 실망했다.
여타 다른 공간들처럼 이곳도 검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도미닉 경은 혹시나 해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역시나 이 공간은 어둠 뿐이었다.
도미닉 경은 실망감에 눈을 감았다.
도대체 히메 공은 어디에 있을까.
다음 장소에 희망을 걸어봐야 하나?
"저기, 도미닉 경이에요?"
어디선가 히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마나 도미닉 경이 히메를 생각하고 있었으면, 이렇게 환청을 듣겠는가.
"저기, 도미닉 경? 도미닉 경 맞죠? 환각 아니죠?"
지금 바로 옆에 있는 것만 같은데, 도대체 히메 공은 어디서 무슨 고생을 하는지
"뭐야, 환각인가? 분명 내 눈앞에는 도미닉 경이 있는데...?"
도미닉 경은 히메에 대해서 걱정하다가 문득 귀에 들리는 소리가 환청치고는 너무 생생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도미닉 경? 눈을 떠봐야 할 것 같은데요? 저 사람이 히메 씨 아닙니까?"
도미닉 경의 뒤를 따라 들어온 아아아가 도미닉 경에게 작게 속삭였다.
도미닉 경은 아아아의 말에 눈을 번쩍 떴다.
"...히메 공?"
"아, 반응했네. 환영은 아닌가 보네요. 저, 구해주실 수 있나요?"
도미닉 경은 멋쩍게 웃는 히메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반가움보다는 황당함이 더 앞선 탓이다.
도대체 왜 도미닉 경이 히메를 보고도 반가움보다 황당함이 앞섰을까?
그건 도미닉 경이 바라보는 광경에 정답이 있었다.
"어째서... 그, 슬라임에 파묻혀 있는 거요?"
"?"
히메의 아래에 있는 슬라임이 자기 이름이 들렸다는 듯 흔들거렸다.
히메는 지금, 거대한 푸딩에 꽃은 깃발처럼 슬라임에 박혀 있는 상태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