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2화 〉 [241화]데이터 마이너
* * *
도미닉 경은 잘 몰랐겠지만, 가차랜드에서는 가끔 상호작용이 불가능한 물체들이 나타난다.
대부분은 코더들이 만들어놓고 구석에 박아 놓은 더미 데이터들이지만, 가끔은 가차랜드의 미래를 엿볼 수 있는 미래의 유적과 유물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바로 도미닉 경의 눈앞에 갑자기 떨어진 검 하나처럼.
"...검?"
도미닉 경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져 도미닉 경과 고작 30cm 떨어진 곳에 박힌 검 하나를 보았다.
그 검의 검신에는 VI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는데, 그것을 본 아아아는 올 것이 왔다는 듯 작게 불만을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맙소사. 또 업데이트야? 지난 업데이트도 다 소화하지 못했는데?"
"그게 무슨 소리요? 업데이트라니? 이 검과 무슨 관련이 있소?"
도미닉 경이 아아아의 말에 의문을 가지고 물어볼 때, 하늘에서 창과 총, 방패, 활과 팔찌 등이 떨어져 내렸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어딘가에 VI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아무래도 저것이 업데이트와 관련이 된 모양이었다.
"별 건 아니에요. 저 VI라는 글자로 유추하는 겁니다."
아아아는 도미닉 경의 예상과 비슷한 말을 내뱉었다.
"가끔 이 가차랜드에는 상호작용이 불가능한 물체가 나타나곤 하죠. 이렇게 말이에요."
아아아는 성큼성큼 걸어가 팔찌 하나를 들어 올렸다.
그 잿빛 팔찌는 주변의 밝기와 상관없이 흐릿하게 보였는데, 아아아가 그 팔찌를 팔에 집어넣으려고 하자 갑자기 붉은 글자와 함께 강렬한 스파크가 튀었다.
[경고 : 이 물체는 아직 상호작용이 불가능합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렇게 상호작용을 하려면 경고나 오류가 일어납니다. 중앙 시스템은 이런 상태를 버그라고 인식하기에 이렇게 글리치부르크에 던져놓는 거예요. "
아아아는 다시 팔찌를 땅에 내려놓았다.
도미닉 경은 아아아가 내려놓은 팔찌를 유심히 바라보았으나, 여전히 그 팔찌는 흐릿한 잿빛이었다.
"여기에 적힌 VI는 로마 숫자로 6이라는 뜻이니까, 아마 다음 업데이트에 6성 장비가 나오겠네요."
아아아는 그렇게 말하며 주변의 장비들을 치웠다.
도미닉 경도 바로 앞에 있는 검을 뽑아 들었다.
흐릿한 잿빛의 검을 들어 올린 도미닉 경은 방금 전 아아아가 팔찌와 상호작용하려고 했듯이 검날에 손가락을 대어보았다.
역시나 검에서 파지직거리며 스파크가 튀더니, 붉은 경고문이 떠올랐다.
"신기하군."
도미닉 경은 마냥 이 물건들이 신기한지 그저 하염없이 흐릿한 잿빛 검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뭐, 지금으로선 아무 데도 쓸모가 없는 물건들이니, 관심 끊으셔도 됩니다. 저도 다음번 스피드 런때는 발에 걸리지 않게끔 조심해야겠네요. 그만 갑시다."
그런 도미닉 경을 상념에서 꺼낸 것은 아아아의 말이었다.
골치 아프게 외울게 또 늘었잖아. 라면서 투덜거리는 아아아는 이내 적당한 길을 만들어냈는지 다시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갑시다. 일단 당신 동료부터 구하자구요."
"알겠소."
아아아의 말에 도미닉 경은 다시 한번 잿빛 장비들을 바라보더니 이내 아아아의 뒤를 따라갔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방금 전, 잿빛 검을 만지며 일어난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도미닉 경의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스파크의 충격으로 인해 주머니에서 빠져나와 걸쳐져 있다가, 도미닉 경이 다시 걸음을 옮기며 땅바닥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게 땅에 떨어진 도미닉 경의 폰은 그 누구도 모르게 방치되고 말았다.
이 캄캄한 버그덩어리 어둠 속에서 말이다.
...
"전혀 모르겠네..."
횃불 하나에 의지한 채 어둠 속을 걷고 있던 히메가 한숨을 내쉬었다.
쿠노이치의 훈련 중 그 어떤 곳에서도 방향감각을 상실하지 않는 훈련마저 마스터한 히메였지만 글리치부르크에선 그런 감각도 소용이 없는 모양이었다.
"분명히 한 방향으로 가는데 왜 제자리인 기분이지?"
히메는 벌써 여덟 번째 마주친 그림을 바라보았다.
카드 팩 교환소에서 파는 카드 팩이 그려진 그림이었는데, 가까이서 누르면 개봉 애니메이션이 재생되는 이상한 그림이었다.
"...여기서 잠깐 쉬어야지. 너무 힘들어."
히메는 그림 앞에 놓여 있는 벤치에 앉아 잠시 숨을 골랐다.
"...다들 어디에 있는 걸까?"
히메는 주머니에 있는 것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물론 히메가 입은 쿠노이치 복장엔 주머니가 없었지만, 가차랜드에선 그런 건 사소한 일이었다.
아무튼 히메가 꺼낸 건 비상용 탈출 버튼이었는데, 가차랜드 내에서 길을 잃었을 때 누르면 반드시 히메사이고 성으로 이동되는 버튼이었다.
정신적으로 지쳐가는 히메는 그 버튼을 누를까 고민했지만, 이내 다시 주머니에 버튼을 집어넣었다.
글리치부르크는 가차랜드에서도 굉장히 이질적인 곳이었다.
그런 만큼 비상용 탈출 버튼이 제대로 작동할지도 의문이었다.
히메는 최후의 최후까지 이 버튼을 아껴두기로 마음먹었다.
"결국 원점이네. 도미닉 경을 찾아야 하는 건 똑같잖아."
히메가 복잡한 생각에 머리를 헝크러뜨리며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히메의 등 뒤에서 섬뜩한 목소리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꼼짝 마."
의문의 존재는 팔로 히메의 목을 감싸며 날카로운 주사 바늘을 들이밀었다.
히메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등줄기가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히메는 쿠노이치였기에 감각이 꽤 뛰어났다.
비록 히메의 머리가 복잡해 평소보다는 둔한 상태이기는 했으나 그런데도 이 의문의 존재는 히메의 감각을 뚫고 그녀의 뒤를 점한 것이다.
실력자다.
히메는 목에 닿은 주사바늘의 서늘함을 느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움직이면 바로 이 해킹툴을 네 목에다 꽂아버릴 거다."
"해킹 툴은 이제 쓸모가 없어요. 중앙 시스템이 무력화시켰거든요."
히메는 나름 침착하게 등 뒤에 있는 존재에게 말을 걸었다.
일단 히메를 바로 공격하지 않고 위협만 했다는 건, 충분히 대화와 협상을 진행할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적어도 히메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쳇."
히메의 등 뒤에 있던 존재가 손에 든 주사기를 뒤로 던졌다.
주사기는 유리로 되어 있었던지 쨍그랑 소리를 내며 어둠 속에서 박살 났다.
"하지만 내겐 아직 여러 가지 것들이 남아 있지. 예를 들면... 이런 거라던가."
의문의 존재가 다시금 히메의 목에다 무언가를 겨눴다.
히메는 그 존재가 주사기를 집어던지는 동안 팔을 풀고 피하려고 했으나, 민첩 수치만 높은 히메의 근력으로는 도저히 그 팔을 풀 수 없었다.
"이건 아주 오래되었지만, 그만큼 독한 거지. 바로 '해킹된 계정 아이디'다. 그것도... 초기의 양산박이 만든 거지."
"히, 히익!"
히메는 등 뒤의 존재가 말한 것을 듣고 자기 귀를 의심했다.
설마 그게 남아 있었단 말이야? 일괄적으로 처분된 거 아니었어?
히메는 그렇게 생각하며 패닉에 빠지고 말았다.
해킹된 계정 아이디.
이것의 위험함을 알기 위해선 아이디라는 개념을 알아야 했다.
아이디란 개척자들에게 부여된 넘버로, 개척자들이 뽑은 카드를 안드로이드에 이식해 움직이는 것부터 기지 건설과 개축, 성과와 업적의 기록 및 지나간 스토리를 다시 보는데에도 필요한 접근 코드였다.
이 아이디를 분실하거나 어떠한 이유로 이 아이디가 사라질 경우, 개척자는 지금까지 해온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릴 정도로 이 아이디라는 것은 중요했다.
그러나 개척자 중에서도 조금 더 편하게 시작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법.
그런 이들은 가끔 은퇴하는 개척자의 아이디를 사거나 양도받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이런 중요한 일에 양산박이 빠질 리 없었다.
양산박은 불법적으로 다른 이들의 아이디를 해킹해 빼앗거나 처음부터 해킹으로 쌓아 올린 아이디들을 개척자들에게 팔았는데, 당연하게도 이런 것들은 시스템의 제재를 받았다.
이후 개척자들의 평균적인 인식이 올라가고, 이런 불법 프로그램에 대한 시스템적 제재를 통해 해킹된 아이디를 사는 경우는 없어졌지만, 당연하게도 아직 쓰이지 않은 불법 아이디들은 남아 있었다.
해킹 툴이 카드 게임 도중 사기를 치는 거라면, 해킹된 계정 아이디는 카드 게임 전에 이미 성사된 사기.
그렇기에 해킹 툴과 달리 해킹된 계정 아이디는 여전히 밴의 대상이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히메는 울먹이며 의문의 존재에게 물었다.
왜 히메 자신이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도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하나만 물어볼 거야. 아니, 아니지. 두 개 물어볼 거야."
등 뒤에 있는 의문의 존재가 히메의 목덜미에 날카로운 것을 더욱 가까이 가져다 대며 말했다.
"제대로 대답하는 것이 좋을 거야. 아니면 바로 이 해킹된 계정 아이디를"
"알았어요! 알았다구요! 제대로 대답할게요!"
히메는 목에 닿는 서늘한 감각에 다급하게 외쳤다.
그녀의 귀와 꼬리가 그 위협적인 느낌에 놀라 모두 곤두섰다.
사실 히메의 목과 흉기는 제법 거리가 있었으나 그 서늘한 기세에 지레 놀란 것이다.
"좋아. 협조적이니까 얼마나 좋아."
의문의 존재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좋아. 첫 번째 질문이다. 무슨 일로 여기에 내려왔지?"
"그, 그게"
히메는 더듬더듬 의문의 존재의 말에 대답하기 시작했다.
...
그런 그들의 뒤.
검고 끈적한 무언가가 히메와 의문의 존재를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어둠을 통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무언가는 혼란을 틈타 카드 팩이 그려진 액자의 뒤로 스며들었다.
그 검고 끈적한 존재는 완전히 액자 뒤에 몸을 숨긴 뒤, 잠시 몸의 일부를 액자 밖으로 빼꼼 내밀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의문의 존재의 손에 들린 엉망진창인 데이터 조각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