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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차랜드의 행복한 도미닉 경-240화 (240/528)

〈 240화 〉 [239화]스피드 러너

* * *

도미닉 경과 히메는 또다시 한참을 걸음을 옮겼다.

몇 보를 걸었는지는 굳이 세지 않았다.

그저 계속해서 왼발과 오른발을 번갈아 가며 내디딜 뿐이었다.

"정말 여기는 불친절하구려."

도미닉 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넓기만 하고 무언가 흥미로운 요소가 없소."

"글리치부르크니까요. 그저 버그의 격리만 생각한 구조라 그럴 거예요."

아마도. 히메는 마지막 말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래도 제법 걸어왔으니 어느 정도는­"

"잠시."

앞서 걸어가던 도미닉 경이 손을 뻗어 히메의 입을 막았다.

히메는 갑자기 입을 막은 도미닉 경의 행동에 놀라 여우 귀를 쫑긋거렸으나, 이내 도미닉 경의 큰 손이 안심이 된다는 듯 귀가 축 늘어졌다.

"무슨 소리가 들리오."

히메가 그러거나 말거나 도미닉 경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소리는 탁. 탁. 탁 하며 바닥을 박차는 소리였는데, 일반적으로 걷는 템포가 아니라 마치 땅을 박차고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가 다시 내려오는 듯 그 주기가 제법 길었다.

"아무래도 근처에 있는 것 같소."

도미닉 경은 히메의 입을 막았던 손을 떼어내며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방패를 들어 올린 채 주변을 살피기 시작한 도미닉 경.

탁. 탁. 탁하며 땅을 박차는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도미닉 경은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방패를 땅에 내려찍듯 고정하고, 한쪽 무릎을 꿇어 혹시나 모를 충격에 대비했다.

그 모습은 그야말로 하나의 요새와도 같았다.

"내 뒤로 오시오, 히메 공!"

도미닉 경은 여전히 소리가 나는 어둠 속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히메에게 외쳤다.

"아, 네!"

도미닉 경의 손이 닿았던 입 주변을 쓰다듬으며 참 안심이 되는 크기의 손이라고 생각하던 히메는 도미닉 경의 경고에 문득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바로 재빠르게 몸을 던져 도미닉 경의 등 뒤에 안착했다.

...은근슬쩍 도미닉 경과 등을 맞대면서 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미닉 경은 마침내 저 멀리서 달려오는 실루엣을 포착했다.

그 실루엣은 지그재그로 뛰어오르며 대각선으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탓.하고 땅을 가볍게 박찰 때마다 점점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빨랐던지 도미닉 경은 과거 운전 면허 시험장에서 본 수많은 탈 것들 중에서도 이보다 빠른 속도는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도미닉 경은 더더욱 방패를 굳세게 쥐고 다가오는 실루엣을 끝까지 노려보았다.

잠시 눈을 깜빡이면 실루엣의 움직임을 놓칠 것만 같아 눈이 점점 말라가고 있음에도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마침내 도미닉 경과 엄청난 속도의 실루엣의 거리가 약 20타일, 10미터 정도로 바짝 다가오자 실루엣의 정체가 명확해졌는데, 그는 속옷만 입은 대머리의 남자였다.

"어, 어어? 앞에 비켜요! 비켜!"

속옷만 입은 대머리의 남자는 그제야 도미닉 경을 발견했는지 당황하며 비키라고 소리쳤는데, 당연하게도 그의 속도를 피할 만큼 도미닉 경은 민첩하지 못했다.

"부, 부딪친다!"

마침내 도미닉 경의 방패에 수상한 남자가 부딪쳤다.

뜻밖에 부딪히는 소리는 쾅!이 아니라 톡.이었는데, 소리만큼이나 충격이 작았는지 방패에 부딪친 남자는 그 자리에서 팬티를 툭툭 털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 맙소사. 방금 전엔 여기에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 뭐냐. 다친 곳은 없습니까?"

속옷만 입은 대머리의 남자는 도미닉 경에게 손을 건넸다.

도미닉 경은 예상보다 적은... 아니, 거의 없다시피 한 충격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끙. 이거 꽤 괜찮았는데. 인코스도 잘 탔고, 벽도 잘 뚫었고... 분명히 0.02초 정도는 단축 되었을 텐데."

남자는 도미닉 경을 일으켜 세운 이후 지나온 방향을 바라보더니, 이내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고는 어디서 꺼낸 건지 모를 빨간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삑. 하는 소리와 함께 버튼 위에 있던 시계가 멈췄다.

"이번 기록은 실패네요. 설마 이런 변수가 일어날 줄은 몰랐는데. 설마 여기서 우리 빼고 다른 사람을 만날 줄은 몰랐어요."

"우리? 흠... 아무튼 반갑소. 나는 페럴란트의 도미닉 경이라고 하오."

도미닉 경은 상대의 반응에서 공격 의사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천천히 방패를 내렸다.

"이름이 특이하시네. '페럴란트의'가 성이고 '도미닉 경'이 이름인가요?"

"아니, 성은 없소. 기사라 경을 붙였을 뿐, 그냥 도미닉이라고 불러도 되오."

"아, 그렇구나. 꽤 정성 들인 이름이시네. 제 이름은 '아아아(AAA)'입니다. 스피드 러너죠."

"아아아? 이름이 조금... 특이하군. 그나저나 스피드 러너라니, 빨리 달리는 직업이오?"

"비슷하죠. 그러니까, 특정한 목표를 얼마나 빨리 달성하는지 겨루는 이들이라고나 할까요?"

"흠. 이해가 잘되지 않는데."

"그러니까 이런 거죠. 1스테이지가 있으면, 그 스테이지를 얼마나 빨리 깨느냐를 겨루는 사람들입니다."

"...어째서 그런 일을?"

도미닉 경은 아아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도미닉 경은 가차랜드의 모든 것들을 천천히 즐기는 사람 중 하나였다.

물론, 도미닉 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동의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도미닉 경 스스로가 생각하기엔 그랬다.

그는 모르는 것이 있으면 물어보고, 아는 것이 있어도 다시 한번 자세히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별 건 아닙니다. 그저 자기만족이라고나 할까요?"

아아아는 도미닉 경의 반응이 이해된다는 듯 허허 웃으며 말했다.

"혹시 도미닉 경은 가차랜드에 대해서 얼마나 아십니까?"

"잘 모르오."

도미닉 경은 아아아의 질문에 고개를 저으며 잘 모른다고 대답했다.

가차랜드에 대해서 이것저것 알려고 노력하고, 또 제법 많은 것을 알게 된 도미닉 경이었지만 여전히 가차랜드는 미지의 세계나 다름없었다.

지금 여기, 글리치부르크만 해도 그렇다.

가차랜드엔 얼마나 많은 비밀들이 더 존재할지, 도미닉 경은 감히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가차랜드에 대해서 흥미는 가지고 계시겠지요?"

"그렇소."

도미닉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미닉 경 만큼이나 가차랜드에 흥미를 가지는 이들은 손에 꼽을 것이었다.

"저희도 마찬가집니다. 다만, 저희는 정말... 네. 광적으로 가차랜드의 모든 것에 흥미를 가지는 편이지요."

아아아는 차마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듯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가차랜드의 벽에 몸을 부딪치면 어떻게 될까요? 한 번 시도하면 당연히 벽에 부딪쳐 쓰러지거나, 아니면 아프겠지요. 하지만 그 단순한 행동은 열 번, 백 번, 천 번을 반복한다면? 벽이 무너질까요? 아니면 그대로일까요? 혹은 벽은 그대로인데 몸이 벽을 통과해 반대편으로 가게 될까요?"

알 수 없는 고양감에 점점 더 크게 몸을 떨기 시작한 아아아는 이내 더 떨리는 목소리로, 더 크게 소리 질렀다.

"모든 것을 뚫는 창과 모든 것을 막는 방패가 부딪치면 어떻게 될까요? 창이 이길까요? 방패가 이길까요? 아니면 창의 관통 피해로 인해 방패는 멀쩡하지만 방패를 든 사람만 다칠까요? 아니면 방패가 창의 공격을 막아 내고, 오히려 창이 방패에 막힌 반동으로 창을 든 사람에게 피해를 줄까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홍조까지 띤 채 몸을 부르르 떤 아아아는 이내 정상적인 모습으로 돌아와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었다.

"뭐, 그런 겁니다. 저희는 호기심과 승부욕이 광적으로 강한 사람들이라는 거죠."

"이, 이해했소. 알겠으니 한 발자국만 뒤로 물러나 주시겠소? 부담스럽소."

도미닉 경은 아아아의 광기에 놀라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아아아도 자기가 좀 과했다는 걸 알았는지, 머쓱한 표정으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 아무튼 그렇다는 겁니다."

"그나저나, 그렇게 알아낸 것과 스피드 러너인 것은 무슨 상관관계가 있소?"

도미닉 경은 어느 정도 적당히 떨어졌다고 생각하자마자 아아아에게 궁금한 점을 물었다.

"알아내는 건 천천히 해도 괜찮지 않소?"

"그야... 이 모든 호기심은, 기록의 단축을 위한 거니까요."

아아아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쩌면 이런 지식을 활용하려고 스피드 런을 하는 걸지도 모릅니다만, 이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거니까요. 그런 거 신경 쓸 바엔 경로나 좀 더 다듬는 게 낫죠."

도미닉 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아아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가치가 저마다 다르듯이, 눈앞에 있는 이도 그런 사람이라고 여긴 것이다.

물론, 전부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런 사람도 있구나, 정도로 납득했다.

"그러고 보니, 스피드 런이라는 것을 시도 중이라는 건, 이곳의 출구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는 소리요?"

"그 출구가 어디를 말하느냐에 따라 다르죠."

"내가 말하는 출구는, 가차랜드로 돌아가는 길이오."

"아, 그거라면 알고 있죠."

"그렇소? 혹시, 우리에게 그 길을 알려주실 수 있겠소?"

도미닉 경은 마침내 이곳을 벗어날 실마리를 찾았다는 듯 눈을 빛내며 아아아를 쳐다보았다.

아아아는 잠시 고민하는 듯 손끝으로 자기 턱을 매만지더니, 이내 도미닉 경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좋아요. 어차피 기록 세우는 것도 물 건너 갔겠다, 잠시 여러분들을 안내하면서 쉬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따라오세요."

아아아는 그렇게 말하며 기묘한 자세로 다시 지그재그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도미닉 경은 순식간에 멀어지는 아아아를 멍하게 바라보다가, 문득 아아아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좀 천천히 가시오! 따라잡지를 못하겠소!"

5초 만에 100미터는 멀어진 아아아가 아차 싶었는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도미닉 경의 일행을 기다린다는 듯 발을 탁탁 구르며 빨리 오라고 손짓했다.

"우리도 갑시다, 히메 공."

"네? 아! 네!"

도미닉 경은 여전히 등 뒤에 숨어 있는 히메를 향해 말했다.

어째서인지 눈을 감은 채 등에 바짝 붙어 도미닉 경의 등을 통해 전달되는 심장 소리를 유심히 느끼고 있던 히메가 화들짝 놀라며 도미닉 경에게서 떨어졌다.

히메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변하고 귀와 꼬리가 맹렬하게 휘적거렸다.

히메는 도미닉 경에게 들키면 어쩌나 부끄러움에 몸서리 쳤으나, 다행인지 아니면 불행인지 도미닉 경은 이미 아아아를 향해서 달려가는 도중이었다.

"...하아."

히메는 안도의 한숨인지, 아니면 도미닉 경의 답답함에 대한 한숨인지 모를 깊은 한숨을 내쉬며, 도미닉 경의 뒤를 쫓아갔다.

아마도 이 어둠 때문이라고 자신을 속이면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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