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7화 〉 [236화]맙소사, 또 버그야?
* * *
[악독한 박춘배 : "받아라!" ▷▷]
[악독한 박춘배A는 건카타를 사용했다!]
[효과는 별로인 듯하다.]
[페럴란트의 도미닉 경은 악독한 박춘배A에게 방패치기를 사용했다!]
[악독한 박춘배A는 2의 피해를 입었다!]
[악독한 박춘배A는 상태 이상 기절에 빠졌다!]
도미닉 경은 눈앞에 떠오르는 시스템 창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에 떠오르는 문장들은 현재 전투가 굉장히 격렬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했지만...
[페럴란트의 도미닉 경 : "도대체 이 지루한 전투는 언제쯤 끝나는 거요?"▷▷]
[운류 히메 : "어... 글쎄요?"▷▷]
도미닉 경은 이 단순한 반복 작업에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다.
단순히 공격 선택지를 누르고, 상대를 지정하는 일의 연속.
무엇보다도 도미닉 경이 감질난다고 생각하는 건, 상대의 상태가 어떤지 직관적이지 않다는 점이었다.
적의 체력이나 스탯을 보지 못해 그런 것은 아니다.
도트로 된 상대의 모습이 체력의 가감이나 상태 이상 유무에 상관없이 똑같다는 점이 바로 도미닉 경을 지치게 만드는 이유였다.
[페럴란트의 도미닉 경 : "이런 전투는 전혀 즐겁지가 않소."▷▷]
도미닉 경이 드물게 전투를 혹평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전투가 힘들면 힘들수록 더 행복해지는 도미닉 경이 이 정도로 불만을 표시한다는 것 자체가 이 전투가 얼마나 재미없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운류 히메 : "뭐, 사람마다 취향이 다른 법이니까요."▷▷]
히메는 도미닉 경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비열한 말레이에게 공격 선언했다.
실제로 이런 방식의 전투를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개 가차랜드에 오기 전에 나이가 들어 피지컬적으로 쇠퇴기를 맞이한 이들이나, 육체적으로 치고받는 것보다 전략과 전술을 선호하는 이들은 이런 전투방식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페럴란트의 도미닉 경 : "최대한 빨리 이 이상 현상이 사라지길 기도할 수밖에 없겠군."▷▷]
도미닉 경은 투덜거리며 벌써 다섯 번째 돌아오는 박춘배의 공격을 방패로 막아 냈다.
도미닉 경은 고작 2번 공격했을 뿐이었다.
[악독한 박춘배 : "하하! 역시 전투방식이 달라지니 힘을 쓰지 못하는군, 도미닉 경! 이번에야말로 우리의 승리...음?"▷▷]
박춘배는 고작 턴이 빠르다는 이유만으로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으나, 문득 무언가 이상을 발견했다.
[악독한 박춘배 : "...도대체 언제부터 시스템 창이 사라진 거지?"]
[비열한 말레이 : "어어? 대화 넘기기 버튼도 사라졌잖아!"]
박춘배는 어느 순간부터 시스템 창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8비트에서 16비트, 16비트에서 24비트로 배경이 바뀌어 간다는 사실도 알아차렸다.
"잠깐! 그렇다는 말은...?"
"대, 대화창마저 원래대로 돌아왔잖아!"
박춘배와 말레이는 크게 당황했다.
아직 변화는 사소한 수준이었기에 여전히 그들의 모습은 도트에서 벗어나질 못했으나, 점점 해상도가 좋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240픽셀에서 480픽셀로.
480픽셀에서 720픽셀로.
720픽셀에서 1080픽셀로.
그 극적인 변화에 도미닉 경은 문득 히메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
그러나 도미닉 경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도미닉 경의 발이 점점 변화하는 배경 너머로 쑤욱 빠져 버린 탓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오?"
도미닉 경은 마치 늪에 발을 내민 것처럼 땅속으로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 이게 뭐야!"
"버그인가?"
땅에 몸이 가라앉기 시작한 것은 도미닉 경만이 아니었다.
몸이 가벼운 히메를 제외한 박춘배와 말레이도 발목을 잡힌 것이다.
"도미닉 경!"
해상도의 변화에 넋을 놓고 있던 히메가 가라앉기 시작한 도미닉 경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히메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도미닉 경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벌써 허리까지 땅에 잠겨 버린 도미닉 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 손을 잡아요, 도미닉 경!"
도미닉 경이 그 외침에 본능적으로 히메에게 손을 뻗었다.
그 손을 잡아챈 히메는, 도미닉 경을 끌어올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아니, 쓰려고 했다.
"...히메 공?"
도미닉 경이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히메가 도미닉 경의 손을 잡고 힘주어 당기자, 히메는 도미닉 경처럼 땅에 쑤욱 박히고 말았던 것이다.
"...저도 당해 버렸네요."
도미닉 경과 히메는 점점 더 땅속으로 파고들어갔다.
어느새 목까지 잠겨 버린 도미닉 경과, 허리까지 잠겨 버린 히메.
"도대체 이건 무슨 일이오?"
도미닉 경은 이 정도까지 잠겨 버렸다면, 더 이상 손쓸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한 번 죽을 각오를 마친 도미닉 경은 오히려 담담한 심정으로 히메에게 궁금한 것이나 묻기로 했다.
지금 상황에 대해서 말이다.
"모르겠어요. 제가 가차랜드에서 살면서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히메는 당황한 듯 도미닉 경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버그 같아요. 해상도가 갑자기 올라간 것도 그렇고, 이렇게 갑자기 땅에 파묻혀 버리는 것도 그렇고..."
"버그라. 그렇구려."
도미닉 경은 히메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끄덕이려고 했다.
이미 도미닉 경의 턱까지 땅에 잠겨 버려 고개를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는 걸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무래도, 난 여기까지인 것 같소."
도미닉 경이 최대한 고개를 들어 올리려고 노력했다.
"부활하면 행정부로 갈 거요. 이 이상 현상에 대한 보상, 보상을 달라고 해야겠소."
"...가차랜드 사람 다 되셨네요."
도미닉 경이 내뱉은 회심의 농담에 히메는 피식 웃었다.
"그래요. 부활하면 같이 가요. 저도 보상을 받아야겠어요"
"그럽시"
어느새 둘은 거의 완전히 땅에 파묻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미닉 경의 깃털 장식의 끝자락과 히메의 여우 귀 끝자락이 땅속으로 잠겼을 때...
"그러고 보니, 우리 안티 앨리어싱 적용 했던가?"
"...안 한 것 같은데."
도미닉 경은,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 기분이 들었다...
...
도미닉 경과 히메가 땅속으로 잠겨 버린 바로 그 시각, 그 장소에서는...
"...계단 현상이 일어나길래 물어봤는데, 사실이었네."
"뭐 어때. 어차피 해상도를 높여서 계단 현상 사이로 빠질 일은 없잖아."
"급하게 처리했으니 버그가 일어날 수도 있어. 조심해서 걸어. 일단 안티 앨리어싱 걸어 둘 테니까."
레미와 팬텀 박사는 도미닉 경과 히메가 사라진 바로 그 장소를 지나가고 있었다.
레미와 팬텀 박사는 화질이 깨지거나 지직거리는 부분을 조심하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무래도 급하게 화질을 올리느라 버그가 조금 생긴 모양이었다.
물론 둘은 버그가 나도 개의치 않았다.
조만간 출동할 시스템 인더스트리의 코더들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혹시 모르니 빨리 넘어가자. 임시로 화질을 올린 거라 언제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지 모르니까."
팬텀 박사는 레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더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
그리고 그들의 뒤를 따라 걷는 두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아르쿠스와 오그레손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광범위하게 효과를 내는 마법이라니..."
"역시나 전사들의 전당에 있는 이들은 뭔가 다른 모양이오."
아르쿠스와 오그레손은 레미와 팬텀 박사가 일으킨 광범위한 해상도 상승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바라본 사람들이었다.
"코딩이라고 했던가."
아르쿠스는 이 엄청난 현실 개변을 일으킨 위대한 마법의 이름을 읊조렸다.
마법에는 거의 무지한 아르쿠스였지만, 이 마법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정말 전사들의 전당이 맞는 모양이오."
오그레손이 혀를 내두르며 아르쿠스에게 말했다.
"이런 곳에 도미닉 경이 있단 말이지..."
오그레손의 말에 아르쿠스는 문득4지역 1스테이지에서의도미닉 경을 떠올렸다.
하늘을 나는 신들의 전차를 타고 지상을 굽어보는 그 모습은, 그야말로 신의 대전사의 모습이지 않던가.
이런 대단한 곳에서 그런 위풍당당한 위용을 뽐낸다는 것은, 도미닉 경이 얼마나 대단한 전사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적어도, 아르쿠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제발 빨리 도미닉 경을 만나뵈고 싶군."
"하지만 지금까지 도미닉 경을 찾아다니면서 흔적조차 제대로 찾지 못했다는 건, 희망이 없다는 소리 아니오?"
"당연한 것 아니겠나? 신의 대전사, 천사의 자리에 오른 도미닉 경일진대, 어찌 인간의 몸을 가진 우리가 쉽게 그분을 뵙겠는가?"
아르쿠스는 당연하다는 듯 도미닉 경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우리가 더 열심히 그분을 뵙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걸세. 자, 걸음을 옮기세. 한 걸음이라도 더 움직여야 도미닉 경을 찾을 수 있지 않겠나?"
"...알겠소. 그러니까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마시오. 소름 끼치오."
오그레손은 아르쿠스의 눈빛에 소름이 돋았다.
그의 눈은 마치 도미닉 경을 숭배하는 광신도의 그것이었는데, 집착이 심한 연인의 눈빛과 먹이를 노리는 뱀의 눈빛, 그리고 광신에 빠져 주변을 전혀 보지 못하는 눈이 합쳐진 것처럼 보였다.
아무튼, 아르쿠스와 오그레손은 그 자리를 벗어나 도미닉 경을 찾는 위대한 여정을 다시 시작했다.
방금 전, 그들이 밟은 땅 아래 도미닉 경이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 * *